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항일정신이 깃든
문화재 현판의 복원

항일정신이 깃든 <BR />문화재 현판의 복원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항일정신이 깃든 

문화재 현판의 복원



현판은 건축물의 문이나 대청 위 또는 처마 밑에 글씨를 판에 새겨서 걸어 놓은 것을 말한다. 흔히 당호(堂號)라 하여 건물의 성격을 짐작하게 한다. 현판은 삼국시대부터 등장하는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無量壽殿)과 경북 안동의 안동웅부(安東雄府)의 현판으로 모두 공민왕의 글씨이다. 당호는 명필의 글을 받아서 널빤지에 새기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도 의미가 크다. 근래 박정희 글씨로 새긴 현판을 두고 철거할 것인지 말지를 두고 논란이 이는데, 이를 밝혀 하나의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alt

현충사 현판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

박정희는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이후 1979년 10월에 피살당할 때까지 18년 넘게 권력을 독차지하였는데, 그가 누린 권력의 시간만큼이나 남긴 글씨도 많다. 1989년 10월 민족중흥회가 펴낸 박정희 휘호집 『위대한 생애』를 보면, 그는 전국에 1,200여 점의 글씨를 남겼다고 한다. 이 가운데 기념비·기념석으로 혹은 현판으로 제작된 것도 적지 않다. 

박정희 글씨로 새겨진 대표적인 기념비로는 제주시 산천단 인근 도로변에 세워진 ‘五一六道路’(5·16도로, 1967), 추풍령 휴게소의 경부고속도로 준공 기념탑 전면에 새겨진 ‘서울부산간고속도로는 조국 근대화의 길이며 국토 통일의 길이다’(1970.07.), S&T모티브 부산 1공장 본관 앞의 ‘精密造兵’(정밀조병, 1971.04.), 서울 광진구 능동 서울어린이대공원 분수대 옆에 있는 ‘어린이는 내일의 주인공, 착하고 씩씩하며 슬기롭게 자라자’(1973.05.),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 진천 본원 광장에 있는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1974.05.), 남해고속도로 순천 방향 섬진강 휴게소에 있는 ‘호남남해고속도로 준공 기념탑’(1974.11.), 경북 안동댐 준공 당시 새겨진 ‘안동호’, ‘안동 다목적 준공 기념탑’(1976.11.), 안중근 의사 탄생 100돌을 기념해 세운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의 ‘民族正氣의 殿堂’(민족정기의 전당, 1979.09.), 전북 남원의 ‘만인의총정화기념비’(1979.10.), 여의도 전경련빌딩 입구에 설치된 ‘創造 協同 繁榮’(창조 협동 번영, 1979.10.), 경남 통영 ‘한산대첩기념비’(1979) 등을 꼽을 수 있다.


현판이 문제가 되는 이유

이러한 기념비와 기념석 등은 박정희 임기 동안에 마친 토목공사나 건축 준공식에 맞춰 조성된 것들로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박정희 글씨의 현판은 기념비와는 성격이 다르다. 박정희 현판은 당사(黨舍)·관공서·군 관련 신축 건물, 기념관, 교육관 등이나 사적지 내에 걸렸다. 문제 되는 것은 후자이다. 전자와 관련한 것은 시대가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없어지기도 하고 철거되기도 하였다. 현재 남은 대표적인 것으로는 경주 남산 동쪽의 중앙에 위치한 ‘統一殿(통일전)’과 그와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화랑교육원의 ‘화랑의 집’·‘화랑의 얼’, 현충사 밖에 신축한 충무수련원(현 충무교육원)의 ‘나라사랑’, 2군사령부 내 군법당의 ‘武烈寺(무열사)’, 공군 5236부대의 ‘유신문’, 경북대 개교 30주년 기념 본관의 ‘創造와 開拓(창조와 개척)’, 한글회관 준공 입구 ‘한글회관’ 등이다. 이러한 것들은 논란의 여지가 없지는 않지만 그리 크지도 않다.

철거 문제로 종종 사회적 논쟁거리가 되는 것은 후자로 문화재 혹은 독립운동 관련 사적지의 현판이다. 2001년 11월에 민족정기소생회 회원들이 서울 종로 탑골공원 앞 정문에 걸려 있던 ‘삼일문’ 현판을 제거했다고 하여 징역 1년형을 구형 받았다. 문제가 된 ‘삼일문’ 현판은 1967년 12월 탑골공원을 중수하면서 만든 정문에 박정희가 한글로 쓴 것이다. 현재는 독립선언서에서 집자한 글씨로 제작된 ‘삼일문’ 현판이 걸려 있다. 2005년 3월에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 있는 윤봉길 의사 사당인 충의사 현판 ‘忠義祠(충의사)’가 도끼로 부서졌다. 이 현판은 1968년 4월 사당이 건립되면서 박정희 글씨로 제작된 것이었다. 이를 부순 이는 특수 공용 물건 손상 등 혐의로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그 뒤 슬그머니 박정희 글씨 현판이 다시 내걸렸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우리가 지켜낼 역사에 대한 고민
사회적으로 논란이 크게 일었던 것은 ‘광화문’ 현판이었다. 일제가 조선총독부 건물을 신축하면서 광화문은 지금의 민속박물관 근처로 옮겨졌다가, 한국전쟁 당시 누각이 불타면서 현판도 사라지고 말았다. 그 뒤 1968년 12월 광화문이 복원되면서 박정희가 한글로 쓴 ‘광화문’ 현판이 내걸렸다. 이로부터 40년이 다 되어갈 무렵 2006년 12월 ‘경복궁 광화문 제모습찾기’가 선포된 이후 2010년 8월 광화문이 재건되었다. 이 과정에서 광화문 현판을 둘러싼 논쟁이 뜨거웠다. 박정희 현판을 그대로 달 것인지가 아니라, 한글로 할 것인지 문화재 복원 차원에서 한자로 한 것인지로 대립하였다. 결국은 중건 당시 훈련대장 임태영의 글씨를 복원한 ‘門化光(문화광)’ 현판이 걸렸다. 
최근 2017년 9월에 이순신 가문의 15대 맏며느리이자 충무공기념사업회 대표인 최순선 씨가 충남 아산 현충사 사당에 걸려 있는 박정희 친필 현판 대신에 옛 사당의 숙종 사액 현판으로 교체할 것을 문화재청에 요청하였다가 거부된 일이 있었다. 당시 종가 측은 현판 교체가 이뤄질 때까지 충무공의 유물을 전시할 수 없다며 『난중일기』 원본과 충무공의 장검을 회수하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숙종 사액 현판은 1706년 현충사 첫 건립 때 사당에 걸렸던 것으로,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사당이 헐리자 후손이 보관하다가 1932년 국민들이 성금을 모아 사당을 재건립하면서 다시 걸렸다. 이후 박정희가 1967년 현충사 성역화 사업을 벌이며 콘크리트로 한옥 양식을 본떠 새 사당을 짓고 현충사, 충의문, 충무문 등 3개의 문에 자신의 친필 현판을 걸었다. 이후 본래 현충사는 ‘구사당’으로 불리며 기능을 상실하였다.
2020년 현재 문화재에 걸린 역대 대통령의 글씨는 모두 37곳(43건) 가운데 박정희 글씨는 28곳(34건)에 달한다. 임진왜란과 항일투쟁에 관련한 것이 15건으로 절반 가까이 된다. 이 밖에 8건은 충신 등의 유적, 2건은 외세에 대한 항전 유적 등이다. 그렇다고 이 모두를 철거하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항일과 관련된 인물이나 유적은 우선 고려해야 한다. 박정희의 친일 행적이 밝혀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와 같은 현판들은 부적절하기 때문이다. 그 외의 것들은 문화재의 가치와 역사성 등을 고증하여 적절하지 않으면 교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지난 6월 6일 제65회 현충일 기념행사가 대전현충원에서 치러졌다. 전두환의 글씨였던 ‘현충문’ 현판이 안중근의 글씨체로 교체되었다. 이는 유의미한 변화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 역사의 현장에 그들의 글씨가 또 다른 어떤 역사의 의미로 해석되지 않을까 고민해볼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