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로 보는 역사 이야기

인종차별을 극복한
다이빙 영웅 새미 리(Sammy Lee)

인종차별을 극복한 <BR />다이빙 영웅 새미 리(Sammy Lee)

글 유완식 독립기념관 자료부 학예연구관


인종차별을 극복한 

다이빙 영웅 새미 리(Sammy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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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서울올림픽 당시, 새미 리의 게스트 카드(1988)



1948년 런던올림픽 당시 다이빙 10m 플랫폼에 출전하여 미국 대표팀에서 아시아계로는 처음으로 금메달을 딴 선수가 있었다. 바로 한인 이민 2세의 한국계 미국인 다이빙 선수였던 ‘새미 리(Sammy Lee)’였다. 새미 리는 런던 올림픽에 이어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 출전하여 금메달을 따며 올림픽 다이빙 사상 최초의 2회 연속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

그러나 다이빙 영웅에게도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을 극복해야만 했던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 1920년 켈리포니아주 프레즈노에서 하와이 사탕수수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새미 리는 고교시절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 및 인종차별에 대한 현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2010년 미주동포후원재단이 수여했던 ‘자랑스러운 한국인상’ 수상 당시 새미 리의 수상소감에 나타난다. 

“그땐 인종차별이 심했습니다. 학교 친구들과 함께 식당에 가면 저만 제지를 당했고, 고등학교 졸업식 땐 무도회조차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수영장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여, 우여곡절 끝에 수영장에 들어가 다이빙 연습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저의 수영 연습이 끝나면 물을 새로 받았습니다. 황인종은 더럽고 지저분하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당시엔 유색인종의 수영장 입장이 일주일에 단 하루만 허용될 정도로 차별이 심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새미 리는 수영장에 입장할 수 없는 날엔 물 대신 모래 위에서 점프하며 훈련을 거듭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쟁쟁한 미국 선수들을 제치고 대표 선수가 되었다. 인종차별이라는 큰 벽도 그가 세계적인 다이빙 영웅이 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훗날 그는 LA 타임스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은 나의 꿈을 막지 못했다. 오히려 나는 미국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로 다짐하였다.”   

인종차별을 극복하고 다이빙 영웅이 된 새미 리는 올림픽 출전 이후 대한민국과 자주 인연을 맺으며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을 격려하였다. 그는 2010년과 2014년 대한민국 동계올림픽 유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명예 홍보대사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2010년에는 한국인들에게 자신의 활동상을 알리기 위해 미국 대표로 올림픽 경기에 출전하면서 착용하였던 수영복 등 66점을 독립기념관에 직접 기증하였다. 이중 ‘1948년 런던올림픽 착용 수영복’ 등 6점이 등록문화재 제501호로 지정되었다. 한국계 뿐 아니라 아시아계 전체를 빛낸 자랑스러운 미국인으로 존경받던 새미 리는 2016년 12월 2일 폐렴 합병증으로 캘리포니아 뉴포트 비치의 자택에서 향년 9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백인들이 더 좋은 몸매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색인종은 올림픽 다이빙 챔피언이 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너무 화가 나 그들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고 싶었다.” 이 말은 2012년 제30회 런던올림픽 개막을 4일 앞둔 7월 23일 자 뉴욕타임스 특집호에 실린 것으로 1948년 런던올림픽 당시 미국 대표 새미 리가 남긴 메시지였다. 5피트 2인치(157cm)라는 작은 신장에도 불구하고 당시 백인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다이빙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새미 리, 그는 차별이라는 벽을 의연하게 넘어선 진정한 영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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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올림픽 당시 ‘새미 리(Sammy Lee)’가 입었던 수영복(1948)[등록문화재 제50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