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체절명의 한국사

여진족과의 대결

여진족과의 대결

글 김종성 역사작가


여진족과의대결



고려를 군사적으로 위협한 국가는 크게 볼 때 세 나라다. 하나는 거란족 요나라, 하나는 여진족 금나라, 또 하나는 몽골족 원나라다. 이들은 다 북방 유목국가들이다. 이들과의 대결을 기준으로 고려시대 역사는 대체로 전기·중기·후기로 나뉜다. 


말갈족의 지도자 김함보

세 유목국가 중에서 큰 군사적 타격을 가하지 않으면서도 고려를 상대로 오래도록 수모와 시름을 안겨준 나라는 금나라다.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고구려와 발해에 속했던 말갈족의 후예다. 오랫동안 한민족 지배를 받았던 이들은 926년 발해 멸망을 계기로 한민족의 통제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관계가 끊어진 것은 아니다. 하나의 고리를 매개로 한민족과 여진족의 관계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그 고리는 신라인 김함보다. 

김씨로서 신라 왕족이었던 김함보는 아버지 김행이 왕건의 통일전쟁에 협조하는 데 불만을 품었다. 김행은 930년 지금의 경북 안동에서 벌어진 고창전투 때 왕건과 함께 후백제군을 격파했다. 그 공으로 안동 권씨 성을 하사받았다. 안동 권씨의 시조가 된 것이다. 아버지 김행이 권행으로 바뀐 뒤 김함보는 말갈족 땅으로 망명했다. 김함보란 이름은 망명 뒤 사용한 한자 이름이다. 

김함보는 말갈족 내부의 갈등을 해결하면서 그곳 지도자로 떠올랐다. 금나라 역사를 기록한 『금사』에 따르면, 그는 말갈족의 제도 개편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약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는 만주 북부의 말갈족 완안부를 거점으로 이 민족을 새롭게 개혁했다. 김함보에 의해 재편된 뒤로 이 민족은 종래의 말갈족과 구분하는 의미에서 여진족으로 불리게 됐다. 이 민족은 김함보 7대손인 아골타 때 금나라라는 강대국을 세웠다. 금나라는 김함보를 시조황제로 추대했다. 여진족 후예인 청나라 건륭제가 약 50명의 학자를 동원해 만주 역사를 정리한 『만주원류고』는 국호가 금나라로 정해진 것은 김씨의 자손이 세운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오늘날 금나라 국호의 기원을 설명해주는 주요 학설 중 하나다. 


고려와 여진족의 관례 흐름

말갈족에서 여진족으로 변신한 뒤 이 민족은 고려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거란족 요나라가 동아시아 최강국이던 시절, 여진족은 고려에 사대하고 고려를 상국(上國)으로 떠받들었다. 고려에 조공품을 보내고 회사(回賜)라는 이름의 반대급부를 받아 갔다. 고구려·발해 때처럼 한민족과 하나의 국가를 이루지는 않았지만, 상국과 신하국이라는 새로운 관계를 갖게 된 것이다. 

그런데 완안부의 힘이 강해지면서 정세가 바뀌기 시작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여진족이 고려와 요나라의 국경을 교란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로 인해 안보 위협을 느낀 고려가 1033년 착공해서 1044년경 완공한 것이 바로 천리장성이다. 하지만 만리장성이 중국을 보호해주지 못했듯 천리장성도 고려를 지켜주지 못했다. 계속해서 세력을 확장한 완안부는 1097년에는 두만강 이남과 천리장성 이북까지 위협했다. 고려에 사대하는 이 지역 여진족 집단들을 자신들의 지배 아래 넣을 목적에서였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나온 것이 예종(재위 1105~1122년) 때 벌어진 윤관의 여진족 정벌이다.  

교과서나 백과사전에는 윤관의 정벌이 1107년 사건으로 기록돼 있다. 윤관의 정벌이 1107년 12월에 벌어졌다는 판단하에 그렇게 기술되고 있다. 하지만 『고려사』 예종세가(예종 편)에 따르면, 윤관의 정벌이 개시된 시점은 양력으로 1107년 12월이 아니라 음력으로 정해년 12월이었다. 이때의 정해년 12월 1일은 양력 1108년 1월 15일이다. 따라서 윤관의 정벌은 1107년이 아니라 1108년 사건이다. 『고려사』 축약판인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예종이 윤관에게 통솔권의 상징인 부월을 하사한 것은 정해년 12월 1일에서 3일 사이였다. 

이 시점에 개시된 윤관의 원정은 여진족에 대한 고려의 정책 변화를 상징했다. 그전까지 고려는 여진족이 사대하는 조건으로 조공과 회사 형식의 물물교환 무역을 허용했다. 동아시아에서 상국과 신하국의 무역은 일반적으로 상국의 적자 무역이었다. 유목국가가 상국인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명나라 같은 농경국가가 상국인 경우에는 대체로 상국이 적자를 봤다. 상국들은 적게 조공 받고 많이 회사하는 방식으로 신하국의 충성을 이끌어냈다. 명나라에 적대적이었던 정도전 정권이 해마다 3번 조공하겠다고 우기고 명나라는 3년에 한 번만 하라고 요구한 것은 양국 무역이 명나라에 적자를 안기는 구조로 전개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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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윤관의 정벌이 가진 의미

한편 농경민족과 유목민족의 무역은 대체로 농경민족의 적자 무역이었다. 이것은 농경민이 유목민의 침략을 막는 방편이었다. 고려와 여진족의 무역은 상국 대 신하국의 무역인 동시에 농경민 대 유목민의 무역이었다. 어느 면으로 보나 고려에 적자를 안길 수밖에 없었다. 고려는 이런 식으로 적자를 감내하면서 여진족의 도발을 막았다. 윤관의 정벌은 고려가 이 정책을 폐기했음을 뜻했다. 적자 무역으로 여진족을 달래기보다는 군사적 강공으로 굴복시키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이 전략은 대성공을 거뒀다. 윤관과 17만 대군은 천리장성 이북의 135개 여진족 촌락을 함락하고 그곳에 아홉 성을 축조했다. 지금의 읍 단위에 축조된 고대의 성은 성 안뿐 아니라 성 밖의 주변 지역도 함께 거느렸다. 그래서 성 1개를 차지하는 것은 지금의 군(郡) 1개를 차지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윤관의 정벌은 대성공이었지만 이것은 잠깐의 성공이었다. 동북 9성을 쌓은 그해에 고려군은 김함보의 7대손인 아골타에게 패했고, 이는 1109년에 동북 9성을 반환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 뒤 고려는 더 이상 북진을 추진하지 않았다. 그래서 동북 9성 반환은 태조 왕건 이래의 북진정책을 포기한다는 의미를 띠었다. 

이것은 여진족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기능을 했다. 고려의 북진 가능성을 차단한 여진족은 완안부 중심으로 종족 통합을 이루고, 이를 발판으로 고려의 통제에서 벗어났다. 1115년에는 이들의 나라인 금나라가 건국됐다. 뒤이어 1117년에는 이들이 고려를 자국의 신하국으로 전락시키는 대역전이 발생했다. 고구려·발해 때는 한민족의 지배를 받고, 고려 건국 이후 2세기 동안은 한민족의 신하국으로 살았던 그들이 한민족과의 관계를 역전시키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서두에서 금나라를 두고 ‘커다란 군사적 타격을 가하지 않으면서도 고려를 상대로 오래도록 수모와 시름을 안겨준 나라’라고 말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금나라를 상국으로 받든 약 1세기는 고려인들에게 그런 고통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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