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반민특위 습격사건,
한국 현대사의 해악

반민특위 습격사건, <BR />한국 현대사의 해악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반민특위 습격사건,

한국 현대사의 해악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이달엔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을 추모하는 현충일이 있고, 6·25전쟁, 제2연평해전에서 목숨을 잃거나 희생된 분들을 기념하고자 하는 데 의미가 있다.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국민들이 자유와 평화를 만끽할 수 있는 것은 그분들의 숭고한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기 때문이다. 


친일 민족 처벌 위한 반민특위 설치

우리에겐 역사의 본보기로 삼아야 할 중요한 사건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전의 일이다. 하나는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안두희 총에 맞아 사망한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이전인 6월 6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가 과거 친일 경찰들에 의해 습격을 당한 사건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 정권이 출범한 지 1년이 가까이 될 무렵이었다. 두 사건은 두 개처럼 보이지만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반민특위는 1948년 9월 일제강점기 친일 민족 반역자를 처벌하기 위해 제헌국회가 제정한 ‘반민족 행위 처벌에 관한 특별법(이하 반민법)’에 의해 조직되었다. 반민법은 제헌헌법 부칙 제101조 “단기 4278년(1945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조항에 근거하였다. 그 뒤 특별조사위원회를 시작으로 특별재판부, 특별검찰부가 조직되어 1948년 10월 22일 반민특위(위원장 김상덕)가 설치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순탄치 못했다. 친일파들의 조직적이고 권력을 앞세운 저항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반민법 공포 그날 우익단체 한국반공단(단장 이종형)은 ‘반공구국총궐기 국민대회’를 열어 반민법을 주도한 소장파를 성토하였고, 친일 경찰 출신 노덕술·최난수 등은 반민법 제정을 주도한 의원들을 납치·살해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위협에 특위·특별검찰부 조사위원, 검찰관·조사관 등의 신변을 보호하고자 특경대가 설치될 정도였다. 그런데도 반민특위 요인의 협박과 테러 행위는 다양한 방식으로 자행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예산 배정과 사무실 미배정 등으로 반민특위의 발목을 잡았으며, 조사에 필요한 자료 요청도 거부하기 일쑤였다.


이승만 정권의 반민특위 와해 작전

1949년 1월 특별조사위는 화신재벌 친일파 박흥식을 필두로 최린·이종형·이승우·노덕술·박종양·김연수·문명기·최남선·이광수·배정자 등을 체포하였다. 이에 이승만은 1949월 1월 〈반민족행위처벌법〉 시행 최소화 담화를 발표하고 그해 7월까지 국무회의에서 11회에 걸쳐 반민법 개정 논의를 거쳐 그 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반민법 개정 요구는 특별검찰부·특별재판부 및 특경대를 폐지하는 것이었지만 궁극적으로 반민특위 자체를 와해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그해 2월에 이승만은 ‘반민법이 헌법에 위배’된다는 담화를 발표하는가 하면, 4월에는 ‘공소시효’ 단축안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특히 이승만은 친일 경찰 출신의 경찰 간부들이 구속되면서 정치적 위기에 내몰리자 “서울시 수사국장 노덕술을 치안 기술자”라며 정부가 보증해서라도 석방토록 하는가 하면 그를 체포·구금한 특별조사위원회 관계자의 의법을 처리하라고 지시하였다. 5월에는 반민특위 활동에 앞장선 국회의원 3명을 남로당의 프락치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검거하였다(제1차 국회프락치사건). 6월에 접어들면서 이승만 정권은 반민특위를 와해시키기 위한 총공세를 펼쳤다. 우익단체 국민계몽대는 ‘빨갱이 의원’ 성토대회를 개최하고는 특별조사위원회로 몰려가 건물을 에워싸고 “공산주의자가 이 안에도 있으니 빨리 나와라”, “반민특위 내 공산당을 숙청하라”며 사무실로 침입하려 하였다. 위험에 처한 반민특위 직원들이 중부경찰서에 연락했지만 소용없었다. 반민특위가 나서서 6월 4일 배후 인물들을 체포·수감하자, 다음날 서울시경은 비상경계에 들어갔고 경찰국 산하 사찰과 직원 440여 명은 신분 보장을 요구하며 사표를 제출하는 것으로 갈등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반민특위와 경찰 당국이 정면충돌하는 양상이었다. 

1949년 6월 6일 오전 8시, 서울시 중부경찰서 서장 윤기병의 지휘 아래 40여 명의 사복경찰들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였다. 특별조사위원·조사관·특별검찰관·특별재판관 등의 가택수색까지도 이뤄졌다. 특경대장 등 대원 30여 명이 중부서로 체포되었고 특별검찰관과 총장이 몸수색을 당했다. 사복경찰들은 특별재판부에서 투서·진정서철, 반민자 죄상 조사서, 출근부 등을 압수해갔다. 이른바 반민특위 습격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는 이승만 정권이 반민특위를 와해시켜 친일파 숙청을 원천 봉쇄하려는 극단적 대응이었다. 특경대의 무장해제는 명분에 불과했다.


반민특위 해체 후 독재 정권 등장

반민특위 습격사건 이후 정국은 극단적인 반공 정국으로 빨려 들어갔다. 반민특위 습격사건을 지휘한 내무차관 장경근은 연행한 특경대원·사무직원들에게 “반민특위는 빨갱이의 소굴이다”, “너희들은 언제 남로당에 가입했느냐”며 이를 기정사실화하였다. 이런 가운데 6월 22일 국회부의장 김약수 등이 국가보안법 위반 협의로 검거되는가 하면(제2차 국회프락치사건), 반민특위 활동을 적극 지지하며 친일파 숙청에 강경 발언을 쏟아 냈던 김구가 1949년 6월 29일 암살되었다. 이후 반민특위 활동은 급속히 위축되었고 와해 절차가 진행되었다. 

1950년 6월 20일로 규정된 공소시효는 1949년 8월 31일로 앞당겨졌고 반민 피의자의 조사와 체포는 급격히 줄었다. 특별검찰부는 공소시효 마감일에 상당수의 반민 피의자를 기소유예 석방하여 특검 업무를 종료했다. 특별재판부는 9월 23일부터 보석 및 구류 취소 등으로 업무를 종료하였다. 더욱이 반민특위의 폐기 법안이 통과되면서 민족 반역자에 대한 처벌이 불가능해졌다. 또한 1951년 2월 ‘반민족 행위 재판기구 임시조직법’이 폐지되어 공소 계속 중인 사건은 모두 ‘공소 취소’되었고 반민법에 의한 판결도 모두 효력을 상실하였다. 반민특위는 어렵게 조성된 민족정기를 살릴 기회를 상실한 채 시효 만료로 문을 닫고 말았다. 이로써 민족정기는 굴절되었고 이승만을 정점으로 하는 친일 반민족 세력이 재등장하고 독재 권력을 낳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사회갈등지수가 OECD 국가 가운데 2위에서 4위 정도로 아주 높다. ‘갈등 공화국’이라 말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생기는 갈등 비용은 한해 82조 원에서 246조 원에 이른다는 분석도 있다. 이러한 사회적 갈등은 지역·이념·빈부·남녀·세대 간에서 비롯된 것이다. 민주화 이전엔 지역 갈등이 컸지만 지금은 이념 갈등이 제일 크다. 이는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 간의 대립에서 기인한 것인데 친일 문제도 한몫한다. 반민특위 습격사건은 그 불씨가 되었고 결국 반민특위를 좌절시켰다. 결국 민족 양심과 사회정의, 나아가서는 민족정기의 패배를 가져다주었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에 커다란 해악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