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터전

구미위원부의
설립과 활동(Ⅰ)

구미위원부의 <BR />설립과 활동(Ⅰ)

글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


구미위원부의 설립과 활동(Ⅰ)


Ⅳ. 3·1운동의 이후 재미 한인사회의 변화 ①



3·1운동 발발  후 그동안 대한인국민회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한인사회에 새로운 단체와 조직들이 생겨나면서 변화의 바람이 일어났다. 미주 한인 최대의 자치기관으로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대한인국민회의 위상이 크게 흔들리면서 한인사회는 재편되기 시작했다. 그러한 변화의 중심에 이승만이 설립한 구미위원부가 있었다.


구미위원부의 설립

3·1운동 발발 이후 최대의 수혜자를 꼽으라면 단연 이승만이다. 파리강화회의 파견 대표로 선정된 이승만의 파리행 계획은 미국의 여권 발급 불허로 무산되었으나, 3·1운동 발발 이후 그의 위상은 완전히 바뀌었다. 이승만은 상하이에서 특별대표로 활동한 현순으로부터 두 차례(4월 4일, 4월 15일)에 걸쳐 임시정부 수립과 ‘국무총리’ 선임 소식을 들었다. 

그는 필라델피아 ‘제1차 한인회의’ 때 실제로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활동했다. 그런 가운데 이승만은 1919년 5월 말 국내에서 건너온 신흥우를 워싱턴 DC에서 만나 한성정부 선포 문건을 입수하고 자신이 집정관총재로 선출된 사실을 알았다. 한성정부는 서울에서 13도 대표들이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조직하고 선포한 것으로 상하이나 블라디보스토크의 다른 어떤 임시정부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이승만은 6월 초부터 한성정부의 존재를 대내외에 알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대한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사실을 미국을 비롯해 각국 정부에 알렸다.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를 영어로 마땅히 번역할 말이 없는 상태에서 그는 자신을 ‘대통령(president)’으로 소개했다. 7월 4일에는 국내외 동포들에게 ‘대한민주국 임시집정관총재 선언서’를 발표해 한성정부의 정통성과 정부에 대한 복종 그리고 정부 유지를 위한 재정 의무를 촉구했다. 이어서 8월 13일 집정관총재 명의로 ‘국채표에 대한 포고문’을 발표하고 김규식·송헌주·이대위 세 사람으로 구성한 ‘재무위원회’ 설치를 공표했다. 이승만이 ‘재무위원회’를 설립하겠다고 한 것은 미주지역의 재정을 총괄하는 기관을 만들겠다는 구상이었다. 

그런데 이승만은 8월 25일 집정관총재 직권으로 ‘대한민국특파 구미주찰위원부’ 즉 ‘구미위원부’ 출범을 공포했다. 이 날은 김규식이 8월 24일 워싱턴 DC에 도착한 다음 날이었다. 김규식은 파리강화회의 종결을 앞두고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던 중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하고 싶다는 요청(1919. 5. 25.)을 이승만에게 했는데 이승만의 화답으로 미국에 오게 되었다. 이승만이 당초 ‘재무위원회’에서 ‘구미위원부’로 명칭을 바꾼 것은 재정권 관할만을 내세울 때 대외 명분을 충족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한 까닭으로 보인다. 미주 교민들로부터 안정적으로 독립운동자금을 거두기 위해 구미의 외교와 선전활동을 전담할 기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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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위원부에서 활동한 인물들(앞줄 왼쪽부터 남궁염·송헌주·이승만·김규식·신형호,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부터 임병직·김노디)



독립공채 판매와 조직 확대

이승만은 구미위원부의 초기 조직을 위원장 김규식, 위원 이대위와 송헌주로 구성했고 기존의 파리 한국통신부와 필라델피아 한국통신부를 비롯해 1920년 6월 새로 신설한 런던사무소까지 편입해 산하의 부서로 편성했다. 외형적으로 볼 때 구미위원부는 구미지역 선전외교활동의 중심 기관으로 자리매김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집정관총재가 되고 나아가 1919년 9월 통합된 임시정부에서 마침내 임시대통령으로 확정되면서 이승만의 대내외의 입지는 더욱 탄탄해졌다. 그의 비중과 역할이 커질수록 그동안 무형정부로 자처했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입지는 국외 여러 민간단체의 하나로 크게 위축되었다. 

그런 중에 이승만이 추진한 독립공채 발매 요구(1919. 9. 4.)에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반발해 애국금 모금을 강행하자 1919년 9월부터 중앙총회와 구미위원부 사이에 애국금-공채표 논쟁이 일어났다. 애국금-공채표 논쟁은 미주지역 재정권 관할을 둘러싼 중앙총회와 구미위원부 간의 알력으로 비추어질 수 있으나 중앙총회의 입장에서 볼 때 구미위원부는 상하이 임시정부로부터 설립 허가를 받지 않은 이승만의 임의 단체라는 불신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은 1920년 2월 24일 「재무부 훈령」 제1호를 공포하여 대한인국민회의 애국금 모금을 폐지하고 ‘독립공채’ 판매로 정리했고 이어서 3월 23일 전문에서 이승만에게 재정의 모든 업무를 구미위원부로 일임할 것임을 통보했다. 미주 한인사회의 재정관할권을 구미위원부로 넘기겠다는 것은 임시정부가 이승만이 설립한 구미위원부를 공식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임정의 조치에 크게 고무된 이승만은 1920년 4월 10일 ‘주차구미위원부 공포서’, ‘공채조례’, ‘지방위원조례’를 작성해 공포했다. 이를 통해 구미위원부는 공채 판매 목표액을 30만 달러로 설정하고 각 지방에서 투표로 뽑은 지방위원과 시찰원으로 하여금 독립공채를 판매하는 것으로 정했다. 

임정으로부터 재정관할권을 인정받은 구미위원부는 모금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먼저 재정 수입(1919. 9 ~ 1922. 4)을 보면 예납금·공채금·의연금 등 총 149,653달러이다. 재정 지출(1919. 12 ~ 1921. 8)의 경우 총 89,141달러인데 그중 임정 대통령공관과 위원부 사무실 35,677달러, 필라델피아 통신부 15,765달러, 파리통신부와 런던사무소 8,276달러, 임시정부 16,552달러를 지출했다. 주로 사무실 유지와 활동 경비, 각 통신부의 선전활동에 지출하였고 임정에 대한 지출은 전체 지출 중 18%에 불과하다. 임정 송금액을 놓고 볼 때 중앙총회가 1918년 11월부터 1920년 7월까지 총 지출한 110,835.76달러 중 40%인 46,454.06달러를 임정에 보낸 것과 비교하면 턱없이 적다. 

구미위원부 위원장 김규식은 독립공채 판매로 모금한 돈을 가능한 임정에 보내려 했다. 그가 위원장으로 재직한 1920년 9월까지 임정으로 송금한 금액은 총 7,000달러인데 전체 송금액 16,552달러의 42%에 해당된다. 김규식은 위원장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모금한 재정 관리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것은 구미위원부가 이승만의 사적인 기구가 아니라 임정의 공기관이라는 점을 주지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그의 활동 방침은 이승만에게 상관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독자행동으로 비추어져 김규식과 이승만 간의 갈등으로 점차 비화되었다. 

‘지방위원조례’를 근거로 구미위원부는 산하 지방위원부의 조직을 확대했다. 지방위원부는 미국 본토 25곳, 하와이 11곳, 멕시코와 쿠바 6곳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실제 제대로 운영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