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인연

국경을 초월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인생 항로

국경을 초월한<BR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인생 항로

글 김형목 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국경을 초월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인생 항로



1920년대 일본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박열. 일본 유학생들이 펴낸 잡지 「조선청년」에 ‘나는 개새끼로소이다’라고 시작되는 박열의 시가 실렸고, 그 시를 본 가네코 후미코는 그에게 반해 고백하게 된다. 그렇게 그들은 운명적인 사랑을 시작함과 동시에 평생의 동지가 된다. 그러나 1923년 칸토대지진 당시 일본 왕세자를 폭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아 역사적인 재판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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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   영화 〈박열〉 포스터 



영화로 역사 무대에 새롭게 등장하다 

몇 년 전 영화 〈박열〉이 개봉되어 시민들에게 커다란 울림을 주었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일제에 저항하다가 22년간 옥살이를 한 혁명가 박열과 그의 연인이자 영원한 동지인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에 관한 이야기였다. 기묘한 인생역정은 사람들에게 관심과 호기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기모노를 입고 삐딱하게 의자에 앉은 남자와 그 무릎 사이에 비스듬히 앉아 무언가를 읽고 있는 여자의 모습은 충격적이다. 요즘에는 별로 신기한 장면은 아니나 약 100년 전에 사진이라는 사실에서 너무나 자유분방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더군다나 여자의 목덜미를 돌아 가슴에 놓인 남자의 손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남녀의 도발적인 자세는 어쩌면 일제 당국자를 비웃듯 의식적으로 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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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   /   가네코 후미코



한국에서 생활하다가 일본으로 돌아가다

가네코는 1903년 1월 일본의 요코하마에서 출생하여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모의 불화로 제때 호적에 이름조차 올리지도 못했다. 소학교 입학은 물론 마음대로 다닐 수 없는 고단한 삶이었다. 여덟 살 때 충북 청주에 사는 고모 양녀로 들어갔으나 사실상 하녀와 같은 힘든 나날을 보냈다. 정이 많은 한국인을 대하면서 가슴 찡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3·1운동 당시 학대받던 한국인을 생각할 때면 연신 눈물을 흘렸다. 한국에서 지옥 같은 7년을 보내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야 하는 처량한 신세였다.

가네코는 고향에서 냉대 속에서 살았다. 이에 도쿄로 올라가 신문팔이, 인쇄소 직공, 식모 등의 일을 전전하였다. 어려운 처지에도 고학생들을 만나면 한없이 맑은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마음속으로 불우하고 가난한 사람은 열심히 공부해도 큰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엄연한 현실을 알았다. 어린 시절부터 온갖 착취를 경험하면서 힘을 가진 강자에 대한 경멸은 점점 대담한 행동으로 이어졌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다 

박열은 1902년 2월 경북 문경군 호서남면의 가난한 농가에서 1녀 3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공립보통학교를 수학한 후 일제강점기 최고의 명문인 경성고등보통학교에서 입학했다. 시골 출신의 경성고보 입학은 흔히 “개천에서 용 났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자신은 물론 집안의 대단한 경사였다. 가난한 형편에도 공부에 열중하는 그는 빈한한 집안을 일으킬 ‘희망봉’이었다. 

재학 중 3·1운동에 연루되어 경성고보를 퇴학한 후 귀향하여 문경에서 친구들과 함께 4월 중순까지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이러한 와중에 친구들로부터 일제의 가혹한 고문 소식을 전해 들었다. 향후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힘들다는 판단 아래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후 학업과 노동을 병행하며 이른바 ‘불령선인(후테이센진)’들과 자주 어울렸다. 틈틈이 세이소쿠(正則) 영어학원에도 다니면서 사회 정세도 파악했다.


운명적인 만남으로 굳건한 동지가 되다

이곳에서 반제국주의 자유사상을 가진 여성 가네코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오뎅집에 일하면서 재일유학생들을 만났으며, 우연히 박열의 자작시를 읽고 강한 감동과 함께 그를 흠모하게 되었다. 박열의 〈개새끼〉라는 시는 가슴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것없는 나는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여러 번 시를 읽고 읽어 틈이 날 때마다 낭송했다. 그럴 때마다 환상 속의 주인공을 자연스럽게 그리는 일이 빈번해졌다. 시를 쓴 박열이라는 주인공과 만남을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기다렸다. 가네코는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면 서로 교제하자”고 단숨에 사랑을 고백하였다. 강자에게 대한 반감과 허무주의자를 자처하는 자유분방한 박열이 마냥 좋았다. 곧바로 동지로서 함께 살기 위하여 동거 생활을 시작한다. 별다른 거리낌이나 망설임이 전혀 없었다. 굳건한 동지적인 결합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맞았다.


잡지 발행으로 자신들의 신념을 알리다

당시 여명회·코스모 구락부·자유인연맹 등의 강연회 참여는 반제 자유사상과 아나키즘에 크게 공명하는 계기였다. 우선적인 과제는 자유를 향한 실천적인 행동 중 하나는 잡지 간행이었다. 조직·규율·권위를 거부하는 아나키즘을 표방한 잡지 발행에 중점을 두었다. 1922년에는 동지들과 함께 『뻔뻔스러운 조선인(太ぃ鮮人)』을 만들었다. 일본이 말하는 불령선인이 조금도 무례하고 뻔뻔하지 않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이듬해에는 아나키스트 항일단체인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해 노동쟁의 후원과 민중강연회 참가 등의 대중활동을 펼쳤다. 불령사 설립 목적은 권력에 대한 저항을 주요한 목적으로 삼았다. 박열이 비밀리에 진행한 폭탄 입수도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려던 의도였다. 일본 ‘왕세자’ 결혼식장에 폭탄을 던지려는 계획은 칸토대지진으로 실행할 수 없었다. ‘선량한 한인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수천 명이 강제 연행될 때 이들도 검속되었다. 1923년 10월부터 1925년 6월까지 총 21회에 걸친 혹독한 신문조사를 받았다. 조사 과정에서 일왕을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구입하려 했다고 당당히 밝혔다. 


옥중 투쟁에서 당당하게 자신들 주장을 밝히다

조선의 사대관모와 관복을 입고 법정에 출두해 반말투로 일왕의 죄를 밝혔다. 옥중에서 작성한 선언문인 〈음모론〉, 〈나의 선언〉, 〈불령선인으로부터 일본 권력자 계급에게 준다〉는 글을 낭독하는 법정투쟁을 벌였다. 1926년 3월 공판에서 이들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가네코는 판결 순간 “만세”를 외치며, “모든 것이 죄악이오. 허위요. 가식이다”라고 소리쳤다. 10일 만에 특별감형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행되었다.

이들은 사형선고 1개월 전에 혼인서를 제출함으로써 영원히 삶과 죽음을 함께 하고자 결심하였다. 변론을 맡았던 후세 다츠지(布施辰治) 변호사는 선고 공판을 앞두고 옥중에서 혼인신고를 대신해 주었다. 둘은 역설적이지만 도쿄형무소에서 합법적인 부부가 되었다. 얼마 후 부부는 각각 지바형무소와 도치키형무소로 옮겨짐에 따라 이별해야 하는 운명이었다. 가네코는 가혹한 자신의 상처와 자유사상을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라는 책자에 고스란히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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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 출옥 환영대회(아키타현 1945. 10. 27.)



자유를 향한 열정으로 동지애를 발휘하다

그러던 중 1926년 7월 23일 가네코의 자살 소식이 전해졌다. 자살의 원인이나 방법도 알려지지 않은 타살의 의문 속에 시신은 교도소 측에 의해 서둘러 매장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혹시 판결이 어긋나서 당신만 사형선고를 받는 일이 있더라고 나는 반드시 같이 죽을 것이요. 당신 홀로 죽게 만들지 않겠다”고 말했던 가네코이기에 죽음은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유골은 옛 흑우회 동지들의 노력으로 발굴되어 우여곡절 속에서 4개월 만인 11월 5일 박열의 고향 선산인 문경군 팔령산(八靈山)에 묻혔다.

이들 부부에게는 적지 일본에서 한국의 청년들과 함께 한 생애 마지막 몇 년이 가장 설레는 나날이었다. 가네코는 홀로 있는 감옥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여름밤 어슬렁어슬렁 모여든 젊은이들 

그 모임을 생각하면 나도 그곳에 가고 싶어진다.

하얀 깃, 짧은 겹옷에 헝클어진 머리카락 

나와도 잘 어울리는 벗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는 벗의 유필(遺筆)을 곰곰이 

떠올려 보아도, 생각나지 않네 벗이 한 말

벗과 둘이서 일자리 찾아 헤맸지 

여름날 긴자(銀座)의 돌길이여 


1945년 12월 6일 도쿄에서 박열 석방을 환영하는 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 옥중에서 박열을 감시했던 형무소 주임인 후지시다 이사부로(藤下伊一郞)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연설을 하였다.

1946년 5월 박열은 백범 김구 선생의 부탁을 받아 3열사들의 유해송환 책임을 맡았다. 의열투쟁의 선봉에 섰다가 일본에 방치된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 등의 유해를 고국에 모셔오는 데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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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 귀국 환영 기념(1948. 8.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