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역사

미주 최초의 독립군단
대조선국민군단

미주 최초의 독립군단<BR />대조선국민군단
글 김도훈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미주 최초의 독립군단

대조선국민군단


독립군 양성과 활약



2020년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가 일어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이다. 1920년 6월, 10월 일어난 두 전투는 1933년 대전자령전투와 함께 ‘독립군의 3대 대첩’으로 일컬어진다. 봉오동전투는 독립운동사에서 일제와 싸워 최초로 승리한 전투이고, 청산리전투는 최고의 전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두 전투를 승리로 이끈 요인 중 하나는 전문적인 군사훈련을 받은 독립군의 활약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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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선국민군단 병영 낙성식 기념(1914)



한인소년병학교, 해외 최초의 군사학교 

지금까지 독립군을 체계적으로 양성한 군사훈련 기관은 1911년 설립된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독립군 양성을 먼저 주창하고 실천한 그룹이 있다. 그들은 한국과 가까운 만주나 러시아가 아니라 한국으로부터 10,000㎞ 이상 떨어져 있던 미주 한인들이었다. 

미주에 한인사회가 형성된 것은 1903년부터 1905년까지 한인들이 하와이 사탕 농장 노동자로 이민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7,000여 명이 자리 잡은 미주 한인 중 가장 먼저 독립군 양성을 추진한 사람은 박용만이다.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한인사회 3대 지도자이자 항일무장투쟁론을 주장한 대표적 인물이다. 

1905년 2월 미국에 도착한 박용만은 네브래스카주에 자리를 잡고 군사학교 설립을 서둘렀다. 네브래스카주에 자리 잡은 이유는 이 지역 공립고등학교와 주립대학은 군사교육과 간부후보생(ROTC) 훈련 과정이 의무로 되어 있어 군사훈련을 실시하기에 적합하였기 때문이다. 1908년 7월 박용만은 ‘애국동지대표회’를 개최하고 미주·하와이·러시아 등지에서 파견된 대표자들과 국내외 통일 기관을 조직하고 군사학교 설립 안을 의결하였다. 이 의결을 근거로 1909년 6월 네브래스카주에 해외 최초의 한인군사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Military School for Korean Youth)’를 설립하였다. 한인소년병학교는 총 3년 과정으로, 여름방학 때 입소하여 8주 동안 군사훈련을 받는 하계 군사훈련 프로그램으로 운영되었다. 6년 동안 운영된 한인소년병학교는 170여 명의 학생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일본총영사의 항의 등으로 1914년 문을 닫고 말았다. 한인소년병학교는 만주의 신흥강습소는 물론 북미·하와이·멕시코 한인사회에도 영향을 끼쳤고, 1910년 해외 한인의 군인양성운동 확산에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 학교는 단기 군사훈련으로 운영되었다는 점에서 정규 군사학교와는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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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에서 처음으로 독립군 양성을 추진한 박용만



미주에서 일어난 군인양성운동

1910년 8월 일제의 한국강점 소식이 미주에 전해졌다. 미주 대한인국민회(1909년 2월 창립, 1910년 5월 개칭)는 북미와 하와이에서 각기 공동대회를 개최하여 ‘애국동맹단’과 ‘대동공진단’을 조직하고 항일운동방침을 결의하였다. 두 단체는 전보로 한국 황제에게 ‘강제병탄’ 거절을 요구하는 한편, 일왕에게도 합방 취소를 촉구하였다. 이어 만주와 러시아 등지에서 독립전쟁을 전개할 사관생도 양성을 의결하였다. 이에 따라 무예장려문을 발표하고 『체조요지』를 출판·배포하는 등 군사훈련을 적극적으로 실시하였다. 

북미에서는 1910년 10월 대한인국민회가 운영하는 클레어몬트 학생양성소에 ‘군사훈련반’ 설치, 롬폭에 ‘의용훈련대’, 11월 캔자스에 ‘소년병학원’, 12월 와이오밍주 슈페리오에 ‘청년병학원’이 조직되어 매일 저녁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인양성운동이 전개되었다. 하와이에서도 각 지역에 군인양성소를 조직하고 군사훈련을 시작하였다. 군인양성소 설립 후 1910년 11월에는 대동공진단이 군인양성소를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로 이관하였다. 하와이지방총회는 ‘연무부’를 조직하여 하와이 각 지역에 다수의 한인들이 거주하는 곳에서 한인 청년들을 중심으로 매일 저녁에 목총을 메고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이때 군사훈련에 참가한 한인들은 200여 명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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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선국민군단 사격훈련(하와이 호놀룰루)



하와이에 설립된 대조선국민군단

박용만은 1912년 하와이지방총회 기관지인 『신한국보』 주필로 부임하였다. 그는 하와이지방총회 연무부 사업으로 추진하던 군인양성운동을 체계화하였다. 1913년 12월 하와이 한인 지도자들과 독립전쟁을 수행할 독립군단과 사관학교 설립을 합의하였다. 그 결과 1914년 6월 하와이 오하우섬 카훌루에 ‘대조선국민군단(이하 국민군단)’을 창설하고 군단 산하에 ‘대조선국민군단사관학교(Korean Military Academy, 이하 사관학교)’도 설치하여 독립군 양성을 본격화하였다.

국민군단과 사관학교의 운영과 재정은 연무부에서 담당하였다. 박종수와 안원규 등은 1,500에이커에 달하는 농장 부지를 기부하였다. 그 규모는 300~400명의 군인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였다. 이를 기반으로 박용만은 하와이 군사령부로부터 군단 설립을 정식으로 인가받았다. 

국민군단과 사관학교의 편제는 미국 군대를 모방한 근대적 군사조직이었다. 국민군단은 크게 군단, 병학교, 훈련소로 구성되었다. 이를 지원하기 위해 제복소, 별동대, 곡호수, 고수 등이 별도로 조직되었다. 군단은 사령부와 경리부로, 훈련소는 대대, 중대, 소대로 구성되었다. 박용만은 군단사령부 단장이자 병학교 교장을 맡았고, 박종수는 병학교 대대장이자 훈련소 대대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별동대는 후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총장을 역임한 노백린이 맡았다.  

100여 명으로 시작하여 많을 때는 300여 명에 이르렀던 국민군단은 이름 그대로 ‘국민군’이라는 이름으로 군단을 조직하려는 것이었고, 사관학교는 군단의 핵심이 될 사관을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국민군단 임원들은 군단에 기숙하면서 농장에서 노동을 하였고, 틈틈이 군사훈련과 학습을 실시하였다. 사관학교 학생들도 야외에서는 군사훈련을 받고, 교실에서는 군사학을 공부하였다. 다만 하와이 군사령부가 실제 군총 사용을 불허하자 군사훈련 때는 목총을 사용하였다. 

사관학교의 교과 내용은 한인소년병학교의 교과 과정을 발전시킨 것이었고, 교재는 28종에 달하였다. 특히 1911년 박용만이 역술·간행한 『군인수지』는 사관학교의 주요 교재로 사용되었다. 국민군단과 사관학교에서는 박용만이 직접 작사한 「국민군가」와 「조선국가」를 애창하였다. 「국민군가」 가사는 후일 만주 등지에서 독립전쟁을 전개하기 위한 독립군 양성의 포부를 드러낸 것이었다. 


흑룡강 맑은 물 

남북만주 푸른 풀 넓은 들 

우리 말 안장 벗겨라 

국민군 군가 부르세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과 제정 러시아가 연합국에 가담하면서 국제 정세에 변화가 일어났다. 일본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미국과 친밀한 유대관계를 바탕으로 미국에 국민군단의 활동 중단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외교론에 중점을 둔 이승만 세력과 무장투쟁론을 실천하려던 박용만 세력이 대립하자, 일제는 이 내분을 이용하여 박용만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1915년 여름 일제는 주미 일본공사관을 통해 미국 국무장관에게 박용만의 군사 활동을 강력히 항의하였다. 일제의 항의를 받은 미국 국무장관은 내무부에 엄중 조사를 요구하였다. 미국 내무부는 다시 하와이 총독에게 박용만 등 국민군단 간부들의 무기 소유 여부, 일본에 대한 반일 선동 여부를 조사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하와이 정부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에 승인하였던 특별경찰권을 취소하여 하와이 한인사회의 자치권을 박탈하였다. 이외에도 국민군단은 경제적으로도 곤란을 겪었다. 국민군단은 병농일치를 바탕한 둔전제를 기본 원리로 운영되었다. 그런데 이즈음 파인애플 농장의 불경기와 흉작 등으로 수입이 크게 감소되어 국민군단에서 사용하던 농장 계약이 만기되어도 연장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1916년 농장주의 압력으로 계약을 취소당해 1917년경 문을 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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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선국민군단 행진(하와이 호놀룰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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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선국민군단 시가행진(호눌룰루, 1917)



대조선국민군단 이후

1919년 3월 박용만은 호놀룰루에서 ‘대조선독립단’ 하와이지부를 설립하였다. 대조선독립단은 국내와 중국 등지의 독립군단과 통일을 꾀하기 위해 박용만이 통일군사정부를 염두에 둔 조직이었다. 이후 박용만은 러시아로 가서 대한국민군을 조직하고 국내외에 국민군을 조직하기 위해 힘썼다. 그러나 국내에 조직한 국민군이 일제에게 발각되는 바람에 국민군 조직도 실패로 돌아갔다. 

이에 박용만은 1920년 다시 중국 베이징으로 거점을 옮겨 ‘군사통일회’를 조직하고 만주와 러시아에 사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다시 움직였다. 이때 대조선독립단에서는 국민군단 시절 적립하였던 20,000여 달러를 재정 후원하면서 박용만의 항일무장투쟁 활동을 지원하였다. 이러한 활동도 1928년 10월 박용만이 피살됨으로 인해 끝내 빛을 보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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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호놀룰루에 있는 대조선국민국단 사관학교(1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