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숨결

멈춰버린 시간 속으로
목포 시간여행

멈춰버린 시간 속으로<BR />목포 시간여행

글·사진 임운석 여행작가


멈춰버린 시간 속으로

목포 시간여행



목포는 시간 여행자의 도시다. 속도가 미덕인 시대에 아날로그에 머물러 낮잠을 자는 것 같은 풍경들 뒤에는 100년 전 수난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목포역에서 출발해 유달산까지, 시간의 퍼즐을 맞추듯 목포를 여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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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항에 정박한 어선



여행자 목포의 매력에 주목하다

최근 트로트 가수 경연대회가 선풍적 인기를 얻고 있다. 감정을 촉촉이 적시기도 하고 흥에 겨워 박장대소하기도 하는 트로트가 요즘처럼 웃을 일 없는 사람들에게 재미를 선사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잊히지 않는 노래가 있다. 시간이 지나도 기억 한편에 자기만의 영역을 확보한 채 절대 밀려나지 않는 노래. 나에게는 트로트 〈목포의 눈물〉이 그렇다. 1935년 이난영 선생이 처음 부른 오래된 이 노래는 아버지께서 즐겨 부르시던 애창곡이었다. 남달리 기타와 전통가요를 즐기셨던 아버지는 기타 줄을 튕기며 감정을 토해내듯 노래하셨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숨어드는 때…….”

노랫말에는 삼학도, 목포항, 노적봉, 유달산, 영산강이 줄줄이 등장한다. 각각의 장소들은 갑골문자처럼 각인되어 지금까지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다. 하지만 너무 어렸을 때라 노랫말의 의미는 고사하고 목포가 어딘지도 몰랐다. 그저 넋을 놓고 노래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듣고 따라 불렀다. 

목포는 1897년 10월 개항했다. 부산, 원산, 인천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 개항했다면 목포항은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칙령에 따라 개항한 도시다. 하지만 그 배경을 보면 앞서 개항했던 항구들과 다르지 않다. 일본 주도하에 개발이 이루어진 까닭이다. 

일제는 유달산을 중심으로 남쪽 지역에 자국민들이 거주하는 거류지를 개발했다. 필지를 사각형으로 나누고 넓은 도로망을 갖춘 바둑판 모양의 전형적인 계획도시였다. 반면 조선인들이 살던 유달산 동쪽은 거미줄보다 더 복잡했다. 다닥다닥 붙은 집들은 좁은 길과 함께 실타래처럼 엉켰고 심지어 돌아갈 길 없는 막다른 길도 많았다. 

일제의 식민지배가 시작된 1910년 이후, 목포는 식민지 수탈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드넓은 호남평야에서 거둬들인 미곡과 면화는 탐식자 일제의 입맛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 결과 목포항은 1930년대에 전국 3대 무역항으로 성장했으며, 도시 규모 역시 전국 6대 도시로 손꼽혔다. 하지만 광복 이후 목포의 성장은 가파르게 곤두박질쳤다. 산업화 시절 야당 도시라는 인식이 강했던 터라 보이지 않게 차별이 이어졌다. 게다가 국제항으로서의 매력을 상실한 목포항은 더는 지역 경제발전의 견인차가 될 수 없었다. 낙후된 지역을 벗어나려는 젊은이들의 ‘목포 엑소더스’ 열풍도 한몫 거들었다. 목포에 드리워진 쇠락의 그림자는 걷잡을 수 없이 짙어졌다. 그 결과 목포 원도심의 풍경은 1970년대로 고정되어 버렸다. 

목포를 찾는 여행자들에게는 낡고 오래된 것이 오히려 독특한 매력 포인트다. 산업화시대 이후에 태어난 20대에게는 시간여행을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그 이전 세대에게는 복고 여행의 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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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산 기슭 온금동에서 바라본 목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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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경이 아름다운 목포 젊음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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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호동에는 근대문화재급 

옛 건축물들 300여 채가 남아 있다



목포 여행은 낡고 오래된 것 들춰보기 

목포역과 목포항을 잇는 만호동 거리를 찾았다. 태엽을 감아주지 않아 멈춰버린 시계처럼 거리는 옛 모습에 머물러 있었다. 영화 〈1987〉과 〈택시운전사〉의 거리 풍경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 같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영화가 흉내 낼 수 없는 세월의 온기가 느껴진다고 할까. 원도심에는 문화재급 근대건축 300여 채가 남아 있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지은 것이니 100년이 더 지난 셈이다. 만호동 거리 풍경은 옛 모습 그대로 여행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거리에서 시선을 올려다보면 유달산이 보이고, 가슴 깊이 숨을 들이켜면 짠 바닷냄새가 폐부 깊숙한 곳에 스며든다. 행인들의 질펀한 전라도 사투리와 항구에서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가 무성영화 같은 장면에 활력을 더한다. 반듯반듯한 계획도시에서 밀려난 조선인들은 유달산 자락에 작은 집을 짓고 살았다. 하루하루 고된 노동으로 연명하듯 살아가는 그들에게 꿈이나 희망은 사전에나 나오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100년의 세월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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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목포 만호동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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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사적 제289호인 옛 일본 영사관, 현재 목포근대역사관으로 운영 중이다



목포는 설움을 딛고 환희에 차다

목포의 랜드마크는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유달산이다. 유달산에 오르기에 앞서 노적봉에 닿았다. 노적봉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지략이 드러난 곳이다. 당시 왜군보다 열세였던 조선 수군은 노적봉을 이엉으로 덮어 멀리서 보면 마치 군량미를 쌓아놓은 것처럼 보이도록 위장했다고 한다. 거짓 정보를 제공해 왜군의 사기를 꺾으려는 전략이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 탓일까? 일제는 유달산과 노적봉 사이에 도로를 내어 원래 하나였던 산을 두 동강이로 나누어 놓았다. 

노적봉 맞은편 계단을 따라 유달산에 발을 내민다. 반복되는 계단 탓에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다. 해발 229m라는 높이가 무색하다. 하지만 들머리 부근과 일부 구간만 제외하면 나머지 구간은 어린아이도 쉽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몸이 편해지자 봄기운이 잔뜩 오른 유달산의 이모저모가 오감으로 느껴진다. 낯익은 노래 〈목포의 눈물〉이 이난영 노래비에서 흘러나오고, 정오에 시각을 알렸던 오포대와 유선각에 오르자 목포 시가지와 푸른 다도해가 시원스레 펼쳐진다. 바닷물에 미끄러지듯 흘러가는 선박들이 한가롭기 그지없다. 

400여 년 전에는 왜군이 이 바다를 짓밟았었다. 그리고 100년 전에는 일제가 주인 행세를 하며 이 땅에 군화 자국을 남겼다. 그러나 그 모든 아픔은 한낱 지나간 일이 되었다. 짧은 시간 목포를 돌아보면서 느꼈다. 목포는 옛 시간에 멈춰선 도시가 아니라 미래를 향해 한발 한발 전진하고 있는 생동감 있는 도시라는 사실을. 그 감격이 밀물처럼 가슴에 밀려온다. 목포의 설움이 아닌 목포의 환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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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산에서 바라본 목포 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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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의 지략으로 왜군의 사기를 떨어뜨린 노적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