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인연

대한민국 임시정부
안살림꾼 정정화와 이를 도운 김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BR />안살림꾼 정정화와 이를 도운 김의한

글 김형목 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대한민국 임시정부

안살림꾼 정정화와 이를 도운 김의한



정정화는 일제강점기라는 척박한 역사에서 주어진 여성의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끊임없이 공부하며 독립을 향해 나아갔다. 남편 김의한도 독립운동가 동지로서 그를 지지하고 존중했다. 이들 부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안팎에서 활약하며 우리 독립운동사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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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난징에서 김의한, 정정화, 아들 김자동(1935)



민족과 운명을 같이 하다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제는 대한제국 식민지화를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을사늑약과 군대해산으로 대한제국은 국제사회에서 완전히 고립된 ‘미아’의 존재로 전락했다. 일제 강점 이후 ‘복종과 순종’만이 절대 가치로 미화되거나 강요되는 분위기가 확산됐다. 여성의 경우, 대부분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가장(家長)의 결정에 따라 망명 사회 일원으로 살아가는 운명에 놓였다. 낯선 환경에의 적응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현실은 이를 방증한다.

그러나 정정화(본명 정묘희)는 모든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으로 옮겼다. 빈궁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의 활동자금과 생계비 마련을 위해 연통제를 활용하여 세 차례나 국내 잠입했다. 이후에도 세 차례 더 감행하여 목숨 걸고 칠흑 같은 야음을 틈타 압록강을 건너 국내로 들어왔다. 조그마한 쪽배에 의지한 결행은 혈기왕성한 청년조차 상상할 수 없는 모험이었다. 정정화는 개의치 않고 자신이 선택한 길을 걸어 나갔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무수한 고초를 겪었으나 감내하기 힘든 난관도 장애물로 생각하지 않는 담대함을 보여주었다. 해방 후에는 민족통일과 민주화를 위해 노력했고, 한국전쟁 중 남편이 납북되는 아픔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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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정정화와 김의한



부부 인연으로 항일투쟁에 나서다

철부지 소녀 정묘희는 동갑내기 김의한(金毅漢)과 1910년에 결혼했다. 남편 김의한은 대한제국 대신을 지낸 동농 김가진(金嘉鎭)의 셋째 아들이다. 3·1운동 중 비밀결사 단체인 조선민족대동단 총재로 활동하던 시아버지와 남편이 갑자기 사라졌다. 부자는 상하이로 망명해 국외 항일투쟁에 나선 것이다. 이들의 망명은 정정화의 운명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1920년 상하이 망명 당시 정정화는 시아버지를 모시고 남편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삼종지도(三從之道)를 아녀자의 숭고한 미덕으로 알고 실천하는 ‘나약한’ 존재였다. 현지 조계지의 이방인 생활은 커다란 충격과 아울러 현실 인식을 일깨웠다. 다양한 경험과 신문·잡지를 통해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분석하는 능력도 길렀다. 남편 김의한은 이를 지지하고 격려했으며, 섬세하게 배려했다. 정정화는 며느리나 범부 아내의 역할에 안주하지 않고,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여성의 지위와 역할을 한 단계 발전시킨 인물로 거듭났다.


요인들 생계를 위해 국내로 몰래 들어오다

부부가 다시 만난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지사들을 보며 생계유지가 가장 급선무로 떠올랐다. 현지에서 생계비를 마련하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 그리하여 정정화는 시아버지, 남편 등과 의논한 뒤 임시정부 밀령에 따라 국내 잠입을 결행했다. 상하이에서 이륭양행 배편을 이용해 단둥에 도착, 최석순(崔錫淳)의 도움으로 신의주에 이어 무사히 서울로 들어왔다. 기대와 달리 모금은 쉽지 않았다. 3·1운동 후 고조되던 민족의식은 기만적인 문화통치로 점차 퇴색되는 분위기였다. 독립운동자금을 내놓을 만한 자산가나 망명가는 만남조차 꺼리는 상황이었다. 결국 그는 일가 도움으로 모금한 돈을 가지고 잠입한 경로를 역순으로 다시 상하이로 향했다.

1921년 늦은 봄 정정화는 두 번째로 국내 잠입을 시도했다. 맡은 임무를 성공리에 끝내고 상하이에 안착할 수 있었다. 그런 와중 친척 오빠 정필화가 임시정부 경무국에 체포·처단되는 쓰라린 비애를 맛보았다. 일제 회유에 따른 팽배한 불신감에 벌어진 일이었다. 상하이는 곤궁한 생활과 일제 감시의 눈초리가 도사리는 살벌한 곳이었다.


왕성한 독서로 정세 변화를 감지하다

상하이에서 여성단체인 대한부인회가 조직되었다. 회원 대부분이 신식교육을 받은 신여성이었다. 그들은 돌발적인 행동과 오만함으로 교민사회에서 크게 호응받지 못하였다. 정정화는 이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도 새로운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성재 이시영(李始榮)과 세관 유인욱(柳寅旭)은 정정화에게 좋은 스승이었다. 성재는 한학과 역사서 등을 가져다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유인욱은 국제정세를 이해하기 위해 영어의 중요성을 일깨우며 큰 도움을 주었다. 정정화는 중국 고전을 접할 수 있는 신문이나 잡지 등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독학에 가까운 학습을 통해 스스로 시세 변화를 인식하고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정정화는 다시 국내로 들어왔다. 네 번째였다. 이때 그는 아버지에게 미국으로의 유학을 요청했다. 평소 완고했던 아버지는 이를 흔쾌히 허락하였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시아버지의 사망으로 원대한 계획은 졸지에 무너지고 말았다. 비록 미국 유학은 좌절되었으나 학문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임시정부 요인을 돕던 정정화에게 국제정세에 대한 이해는 더욱 절실한 현안으로 다가왔다. 다섯 번째 국내 방문에서 그는 6개월 동안 친정집에 머물며 문학·역사와 관련된 서적을 읽었다. 방대한 독서는 정정화 자신의 ‘올바른’ 방향타를 모색하는 든든한 에너지원이었다.


임시정부 안살림꾼으로 자리매김하다

상하이 생활은 하루 세 끼 식사를 거르지 않으면 행복한 정도였다. 식사는 주먹밥을 간신히 면하였고, 미역이나 김 따위는 드물어도 배추로 여러 가지 반찬을 해먹을 수 있었다. 의복은 주로 전통적인 중국 옷인 짱싼(長衫)을 입었다. 아주 값싼 천을 사서 직접 만들어 입었다. 구두나 운동화 등의 가죽·고무 제품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다. 대부분 짚신을 끌고 다녔다. 정정화가 중국 망명지에서 있었던 26년 동안 받은 선물 중 가장 특별한 선물은 ‘구두’였다.

망명 생활에서 여성들은 자녀를 장래 독립운동가로 키우는 일을 ‘시대 소명’이자 책무로 여겼다. 인성학교나 3·1유치원 운영, 한글 교육 강조 등이 이러한 사실을 방증한다. 정정화는 가정에만 있지 않고 원로 독립운동가의 수발을 자청했다. 임시정부나 한국광복군과 관련된 대소사가 있으면 여성들을 이끌어 책임지고 치렀다. 김의한은 정정화와 매사 상의하여 결정할 만큼 아내의 의견을 존중하는 남편이었다. 이에 정정화는 남편에게 운동 노선, 대인관계에 대한 조언을 스스럼없이 하는 동지가 되었다.

정정화는 천부적인 겸손함과 근면성을 가졌다. 주위 사람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뛰어난 능력도 겸비하였다. 연속되는 피난살이에도 대가족이 공동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던 원천은 정정화와 같은 ‘종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백범의 어머니 곽낙원이나 부인 최준례와 관련된 일화는 심금을 울리기에 족하다. 이런 점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절반을 떠받친 여성’이라는 평가는 너무나도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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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한, 정정화, 아들 김자동의 귀국 1주년 사진(1947)



임시정부 생활사를 알리는 ‘민족 서사시’를 남기다

임시정부에 관한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정리·발간되었다. 그러나 일상사에 관한 사료는 그 이면에 묻혀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독립운동가의 생활사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그들의 숭고한 인생역정을 되짚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조국에 대한 헌신과 이웃에 대한 배려로 집약되는 정정화의 참된 인생역정은 1987년 2월 발간된 『녹두꽃』에 그대로 녹아있다.


“내가 임시 망명정부에 가담해서 항일투사들과 생사존몰(存沒)을 같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나의 사사로운 일에서 비롯되었다. 다만 민족을 대표하는 임시정부가 내게 할 일을 주었고, 내가 맡은 일을 했을 뿐이다. 주어지고 맡겨진 일을 모르는 체하고 내치는 재주가 내게는 없었던 탓이다.”(회고록 『녹두꽃』 서문 중)


1998년 8월 이를 보완한 『장강일기』가 출판되었다. 『장강일기』는 임시정부 초기 운영한 연통제를 밝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또 윤봉길 의거 후 임시정부가 감내한 대장정의 실상 복원에도 크게 도움이 되고 있다.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杭州)→자싱(嘉興)→난징(南京)→광저우(廣州)→구이린(桂林)→치장(?江)→충칭(重慶)까지 이어지는 8년간의 장엄한 ‘민족 서사시’인 것이다.


이념 갈등을 통합의 길로 이끌다

부부의 삶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통일단결의 정신이다. 이들은 중국 관내 한인 세력이 갈리고 찢기면서 이렇다 할 중심세력 없이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겼다. 부부는 중국 관내와 옌안(延安)의 독립운동 세력이 좌우 이념을 넘어 하나로 합치기를 갈망했다. 시종일관 김구와 정치 노선을 함께하면서도 당파를 달리하는 김규식·최석순 가족과도 원만하게 지냈다. 한국독립당 일부 인사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던 김원봉에게도 편견 없이 대했다. 좌우통합을 바라보는 관점을 일견 평범하고 소박한 문제 같지만, 사람에 대한 넓은 아량과 무한한 신뢰감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김의한은 좌우통합을 추진하는 김구를 지지했다. 한국독립당 내 보수 인사가 이를 반대하며 의견을 달리할 때는 직접 설득에 나섰다. 부부는 해방 후에도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남북협상 통일 정부 수립에 동참했다. 이승만 정부는 정정화에게 도지사급 감찰위원을 제의했으나 단호하게 거절했다. 해방된 조국에서도 부부의 삶은 고단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외아들 김자동을 올곧게 키워 그 후손들도 민주화를 위한 여정에 동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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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중 서울에서 정정화(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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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50주년 기념으로 공연된 연극 〈아, 정정화〉



역사 무대 주인공으로 부활하다

1991년 11월 2일 운명한 정정화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되었다. 정정화 사망 직전인 1990년, 정부는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평양에서 사망한 남편 김의한에게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정정화의 삶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준다. 2001년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은 ‘8월의 독립운동가’로 정정화를 선정하였다. 1998년 8월 극단 민예는 극단창립 25주년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50주년 기념공연으로 정정화의 일대기를 다룬 연극 〈아, 정정화〉를 무대에 올렸다. 2001년 극단 독립극장이 〈아, 정정화〉를 〈치마〉라는 제목으로 바꾸어 공연했고, 이듬해 8월 도쿄와 오사카에서 〈치마〉의 공연이 열렸다. 모든 회차가 만석을 이룰 만큼 성황이었다. 공연이 끝난 후 민단과 조총련계는 일제히 출연진을 격려했다. 정정화의 공연이 좌우 이념을 뛰어넘는 계기가 된 것이다.

평양 애국열사릉과 국립대전현충원에 따로 묻혀 있는 부부는 언제쯤 상봉할 수 있을까. 독립운동이 완성될 평화통일의 그 날이 기다려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