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체절명의 한국사

서희에게는
외교술에 더해 ‘알파’가 있었다

서희에게는<BR />외교술에 더해 ‘알파’가 있었다

글 김종성 역사작가


서희에게는

외교술에 더해 ‘알파’가 있었다



926년 발해 멸망을 계기로 요동(만주)은 한민족의 손에서 멀어졌다. 이로써 우리 민족은 요동 및 중국과 힘든 경쟁을 펼쳐야 했다. 그런데 발해 멸망과 더불어 한민족을 힘들게 만든 또 하나의 요인이 있었다. 바로 동아시아 패권 구도의 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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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담판으로 거란의 침략을 물리친 서희(전쟁기념관 제공)



발해는 멸망하고 요동은 강해지다

발해 멸망 이전만 해도 중국 최대 위협은 ‘베이징을 중심으로 시계 9~12시 방향’에서 나왔다. 이 방향에 있는 흉노족·티베트족·돌궐족 등이 중국에 대한 최대 위협이었다. 그러나 발해 멸망 이후에는 0~3시 방향에 있는 요나라·금나라·원나라·청나라가 중국을 위협했다. 이 때문에 10세기부터는 요동 땅이 더 강력해졌다. 당나라(618~907)가 서북쪽 유목 국가들을 약화시켰기 때문이기도 하고, 발해시대(698~926)에 요동의 경제력이 상승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발해 때 축적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발해 멸망 후 요동 왕조들이 강한 역량을 갖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한민족이 요동을 상실한 시점부터 요동이 강해졌기 때문에 요동과 맞닿은 한반도는 10세기부터 열악한 환경에 놓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종 임금(재위 981~997)이 이끄는 고려왕조는 993년 제1차 요나라 침공과 함께 큰 위기에 직면했다. 거란족 요나라의 이 같은 군사행동은 요동 상실 후 한민족이 맞이한 최대 위기나 다름없었다.

이 위기를 극복하는 데 기여한 일등 공신은 외교술의 귀재, 서희(942~998)다. 그는 적장 소손녕과 담판을 지으며 거란군을 철수시켰을 뿐만 아니라, 강동 6주까지 확보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단지 외교관의 말 한마디로 동아시아 최강국 군대의 발길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외교관의 힘은 언변과 판단력에서도 나오지만, 무엇보다 본국의 국력이나 객관적 정세가 중요하다. 서희의 담판을 뒷받침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기에, 993년의 고려가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고 판단하는 게 합리적이다.


송나라 정복을 향한 요나라의 첫발, 고려 침공

발해 멸망 후 요동 지배자가 된 요나라의 최종 목표는 중국 정복이었다. 그런데 중국 전역을 점령하자면, 한반도의 고려왕조와 압록강 주변의 여진족을 미리 제압해 두어야 했다. 고려와 여진족을 그냥 두고 중국 송나라(북송)를 침공했다가는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요나라는 993년 제1차 고려 침공을 감행했다. 이 침공은 고려와 송나라 연합, 고려와 여진족 연합의 차단을 위한 것이었다.『고려사』 성종 세가(성종 편)에 따르면, 고려는 방어군을 3개 군으로 편성한 뒤 박양유를 상군사에, 서희를 중군사에, 최량을 하군사에 임명했다. 송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적이 있는 외교관 서희가 중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고려사』 서희 열전에는 아명이 서염윤인 서희는 경기도 이천의 호족인 서필의 아들이며 문과 급제자 출신이라고 나와 있다. 문과 출신인 서희가 군대를 지휘할 수 있었던 것은 고려 초부터 문관이 무관을 지휘하는 관행이 굳어진 결과였다.

서희가 있는 고려군은 지금의 평안남도 안주시에 해당하는 안북도호부에 집결했다. 고려군이 평안북도와 남도를 가르는 청천강 바로 밑에 집결한 상태에서 선발대가 강 이북으로 파견됐다. 그러나 이 부대는 거란군에 대패했고, 고려는 충격에 빠졌다. 반대로, 거란군의 사기는 충천했다. 서희 열전에 따르면, 소손녕은 “아군 80만 명이 도착했다”며 세를 과시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고려 임금이 직접 와서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요나라 역사서인 『요사』는 요나라의 다섯 도읍 중에서 상경·중경·동경의 장정 숫자가 도합 22만 6,100명 정도였다고 기술한다. 소손녕 군대는 신의주에서 직선으로 서북쪽 161㎞인 동경(지금의 랴오양)에서 동원된 부대였다. 동경에서만 동원된 병력이 80만일 수는 없었다. 역사학계는 이 병력을 6만 이하로 보고 있다. 그의 말은 허풍이었지만, 선발대의 대패를 보고받은 고려 조정은 깊은 공포에 빠졌다. 지방 귀족들의 군사력이 만만치 않았던 고려 전기에, 군주가 손쉽게 동원할 수 있는 중앙군 병력은 3만을 넘기 힘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거란군이 6만 이하라 할지라도, 고려군한테는 상대하기 벅찬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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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 6주 지도



군사력보다 강한 서희의 외교력

이 일로 고려 조정에서는 항복하자는 의견과 서경(평양) 이북을 떼어주자는 의견이 나왔다. 서희 열전에는 서희가 이런 의견들에 반대했다고 나온다. 그는 선발대가 패한 것에 불과하므로 제대로 싸워본 다음에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성종과 대신들은 기가 죽어 있었기 때문에 평양 이북을 떼어 주자는 의견으로 세가 기울었다. 서희의 주장이 먹히지 않는 상황. 그런데 이때, 기적이 일어났다. 안북에서 서북쪽으로 26㎞ 떨어진 안융진이란 군사기지에서 고려군이 뜻밖의 승리를 거둔 것이다. 또 다른 고려시대 역사서인 『고려사절요』는 “(소손녕이) 안융진을 공격했지만, 중랑장 대도수와 낭장 유방이 소손녕과 싸워 이겼다”고 전한다. 안융진은 1,200명 정도의 병력이 배치된 곳이었다. 이런 소규모 부대가 소손녕의 본진을 격파했으니, 부대원들이 얼마나 격렬히 항전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위의 ‘대도수’는 고려에 망명한 발해 왕자 대광현의 아들이다.

안융진 전투는 고려 조정에 생기를 불어넣고, 서희의 어깨에 힘을 실어줬다. 동시에 거란군을 위축시켰다. 이런 분위기에서 서희와 소손녕의 그 유명한 담판이 시작됐다. 회담장에서 소손녕은 왕건 이래의 북진정책을 비판했다. 거란이 고구려 영토를 차지하고 있으니 고려가 북진정책을 폐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서희는 고려야말로 진정한 고구려 후계자이므로 요나라 땅의 일부도 고려 땅이라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서희는 명분은 요나라에 넘기고 실리는 고려가 챙기는 방향으로 협상을 이끌었다. 결국 고려가 요나라를 황제국으로 받드는 대신, 요나라는 압록강 남쪽의 강동 6주에 대한 고려의 영유권을 인정해주는 쪽으로 협상을 마무리했다. 종종 서희가 이 회담에서 새로운 영토를 얻어온 것처럼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강동 6주는 요나라 땅이 아니었다. 그래서 요나라가 양도할 수 없었다. 이곳은 여진족이 사는 땅으로, 강동 6주에 대한 고려의 영유권을 인정한다는 것은 고려가 여진족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하는 것에 대해 요나라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이런 합의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서희가 요나라의 침략 동기를 간파했기 때문이다. 요나라는 고려를 멸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려가 송나라 및 여진족과 연대해 거란을 견제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 침략했다. 요나라의 목표는 송나라임을 간파한 서희는 ‘고려가 여진족을 공격하고 그 땅을 갖겠다’는 제안을 던졌다. 이는 여진족과 연대하지 않겠다는 의미로서 소손녕의 귀를 즐겁게 했다. 또 고려가 요나라를 황제국으로 받들겠다고 나서며 송나라와 관계를 끊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 역시 소손녕의 가슴을 울리는 말이었다. 결국 서희는 요나라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고, 강동 6주에 대한 군사행동을 합리화할 명분을 확보했던 것이다. 

거란군은 돌아갔고, 고려는 평화를 되찾았다. 발해 유민이 포함된 안융진 병사들의 용감한 저항과 외교관 서희의 정세분석력 및 용기가 993년의 고려를 건져 올렸다. 한민족에서 떨어져 나간 요동이 더욱 강한 힘을 갖게 된 상황에서 요동 지배자 요나라의 침략을 받은 한민족은 그렇게 한숨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