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역사

독립신문,
최초의 민간 신문

독립신문,<BR />최초의 민간 신문

글 김승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독립신문,

최초의 민간 신문

『독립신문』 발간


4월 7일은 신문의 날이다. 그리고 이날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 『독립신문』이 창간된 날이기도 하다.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으로 망명했던 서재필은 1895년 12월 귀국해 언론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독립신문』을 발간했다. 『독립신문』은 혼란스러운 국내 정세 속에서 정치적 견제와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3년여 만에 폐간을 맞았으나, 당시 우리가 냈던 유일한 ‘목소리’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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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국문 제1호 1896.04.07, 영문 제2호 1896.04.09.)



서재필의 신문 발간 계획과 암살 위협

서재필이 귀국하고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1896년 1월 20일 일본인이 발행하던 『한성신보』에는 다음과 같은 서재필의 동정이 실렸다.


“서재필 씨는 근자에 서양으로부터 귀국하였기 때문에 감개무량함을 참지 못하는 점이 많아,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워야 되겠다고 하는 중에, 우선 제일착으로 영·한문의 신문을 발간할 생각이라고. 목적은 사회개량의 지도에 두고 또한 조선의 현상을 서양 각국에 알려야 되겠다고 한다.”


『한성신보』는 을미사변에도 관여했던 일본인 아다치(安達謙藏)가 발행하던 신문인데, 일본 외무성의 기밀보조금으로 창간되었다. 이러한 보도가 나가자 일본공사를 비롯한 일본인들은 적극적으로 서재필의 신문 발행을 반대하고 나섰다. 일본공사 고무라(小村壽太郞)는 서재필을 만나 “조선은 미국과 다르고 민도(民度)가 뒤떨어지는 나라이니, 미국 사상인 민권주의 사상, 즉 데모크라시를 전파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충고했다. 신문을 발행하여 미국의 사상인 민권·민주 사상을 전파하면, 나라가 어지럽게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또 서재필이 신문 발행을 강행하면, 일본인들이 그를 암살할지도 모른다는 위협적인 언사도 서슴지 않았다. 서재필은 한 나라의 왕후를 암살한 자들이라면 자신을 죽이는 일쯤은 못할 것도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1월 31일 자신과 함께 신문을 발간하기로 약속한 윤치호를 만나 공포감을 털어놓았다.


“아무래도 신문 발간 계획은 포기해야 할 것 같네. 일본인들이 신문을 발행하는 것을 그대로 두지 않을 것 같아. 그들은 한국이 두 개의 신문을 가질 만큼 발전되어 있지 않는 한, 그리고 그들의 『한성신보』가 존재해야 하는 한, 그 신문과 경쟁하려는 신문의 어떠한 시도도 단연코 분쇄해 버릴 것이라고 말했네. 일본의 의사에 반대하는 어떠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암살할 것이라고 은근히 암시했네. 그들은 나를 독약처럼 미워하지. 내가 며칠 전에 몇몇 한국 상인들에게 석유를 미국으로부터 직접 수입하는 것이 가격을 저렴하게 하여 소비자의 이익이 된다고 말했기 때문이네. 이곳에 나는 혼자라네. 미국 정부도 나를 지원하지 않을 것이고, 대한제국 정부나 민중도 일본인의 암살로부터 나를 보호할 수도 없고 하려고 하지도 않겠지. 내가 보호받지 못한 채 혼자라면, 나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네!”(『윤치호 일기』, 1896.01.31.)


서재필의 말을 들은 윤치호는 크게 놀랐지만, 한편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신문이 내각의 지원을 받아 창간된다면, 일본인들은 그 신문이 반일적인 내용을 싣지 않도록 대신들을 위협해 계획을 무산시킬 것이라 생각했다. 같은 해 2월 2일, 윤치호는 사무실에서 유길준을 만나 서재필의 신문 발간 계획에 관해 이야기했다. 서재필이 일본인의 암살 위협을 받고 포기하려 한다는 말을 들은 유길준은 『한성신보』와 공동으로 발행하면 효과적일 것이라고 제안했다. 윤치호는 서재필이나 일본 측 모두 그것에 동의하지 않을 거라며 부정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이 일로 윤치호는 신문이 서재필 개인의 사업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알게 됐다. 유길준과 그 일파가 신문이 자신들의 이익에 반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일본 측 압력을 받아 계획을 무산시켰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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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협회 활동 당시 서재필의 집(1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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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 발간 후 서재필



오늘날 한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일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이 무너져 유길준이 망명하고, 박정양 내각이 들어섰다. 아관파천은 친러파가 주도했기 때문에 내각에 대한 일본의 압력도 사라졌다. 박정양 내각도 신문 발간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서재필이 전 내각의 유길준과 맺은 약속을 이행하고 신문을 발간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1896년 3월 13일, 서재필을 신문담당부서인 농공상부의 임시고문으로 임명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였다. 그리하여 서재필의 신문 발간 계획은 다시 활기를 띠었다. 그는 당시 서양인들이 발행하던 영문 잡지 『코리언 리포지토리』 1896년 3월호에 “오늘날 한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일(What Korea needs most)”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여 국민과 정부관리의 소통 및 교육을 강조했다. 


“정부는 국민의 실정을 알아야 하고, 국민은 정부의 목적을 알아야 한다. 정부와 국민 상호간의 이해가 있도록 하기 위해서 쌍방에 대한 교육이 있을 뿐이다.…(중략)…교육 없이는 국민들이 정부의 좋은 의도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교육 없이는 정부관리들이 결코 좋은 법률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


서재필은 국민과 정부관리 모두를 교육하는 가장 좋은 길은 신문 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1896년 4월 7일 정부에서 제공한 건물과 보조금으로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서재필이 사장 겸 주필을 맡아 주로 국문판 사설과 영문판 사설을 집필하고, 주시경을 총무 겸 국문판 주필에 임명했다. 영문판 편집도 서재필이 직접 했다. 『독립신문』은 가로 22cm, 세로 33cm 크기의 4면으로 발행했는데, 3면까지는 순한글의 국문판, 4면은 영문판으로 편집하였다. 첫해에는 주 3회 발행하였고, 다음 해에는 격일간으로 발행하다가 셋째 해인 1898년 7월 1일 자부터는 일간 발행하였다. 처음에는 300부를 인쇄하였으나 1898년 말경에는 3,000부까지 부수가 늘어났다.서재필은 창간호 논설에서 오직 “조선만 위하여” 불편부당하고 차별 없는 공정한 보도를 약속하고, 정부와 백성의 의사소통을 도모하겠다고 밝혔다. 또 이 신문을 순한글로 발행하는 것은 남녀 상하 귀천 모두가 누구나 알아보기 쉽게 하기 위함이라고 서술했다. 국문판의 내용을 살펴보면 제1면에 대체로 논설과 신문사고(광고), 제2면에는 관보·외국통신·잡보, 제3면에는 물가·우체시간표·제물포 기선출입항시간표·광고 등을 실었다. 신문은 창간 3개월이 지난 1896년 7월 독립협회가 설립되고부터는 독립협회의 기관지 역할을 담당하며 국민에게 국가의 자주독립의식과 자주민권사상을 갖게 하는 국민계몽과 여론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영문판은 외국인 독자 대상으로 사설(editorial), 국내 잡보(local items), 관보(official gazette), 최신전보(latest telegrames), 국내외 뉴스요약(digest of domestic and foreign news), 통신(communications), 의견 교환(exchanges) 등으로 구분해 편집하였다. 이를 통해 한국사정과 한국인의 주장을 세계에 알리는 데 공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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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에게 『독립신문』을 이어 받았던 윤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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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의 주필로 활동했던 아펜젤러



독립신문, 3년 역사의 끝

점차 『독립신문』의 논조가 외국의 국권침탈과 정부 탐관오리에게 비판적으로 변해가자 러시아와 일본의 항의를 받은 대한제국 정부는 서재필을 추방하고, 『독립신문』을 폐간하려 했다. 1897년 12월 서재필의 중추원 고문직 해고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자 서재필은 독립신문사의 모든 시설을 현금 5,000원에 내어놓고, 인수조건으로 자신이 지명하는 사람을 편집인으로 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먼저 러시아 측이 좋은 조건으로 인수 의사를 밝혔지만, 서재필의 편집인 지명이라는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서재필도 러시아에 인계하기보다는 차라리 굶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본공사관 측도 인수 공작을 진행했지만, 대한제국 정부로 하여금 인수하여 폐간시키려던 계획과 상충하고 본국 정부도 거절하여 성사되지 못하였다. 대한제국 정부도 윤치호와 일본공사의 권고로 인수를 검토하였으나, 서재필이 추방되면 자연 폐간될 것으로 보고 응하지 않았다. 결국 서재필은 독립신문사의 소유권을 자신이 유지한 채 믿을만한 사람에게 맡겨 계속 발행하게 하는 방안을 채택했다.1898년 5월 6일 저녁 7시경 서재필은 윤치호를 찾았다. 윤치호에게 독립신문사를 맡기기 위해서였다. 서재필은 자신보다 2살 아래인 독립협회 동지 윤치호에게 말했다. 


“자네가 독립신문을 맡아주게. 국문판과 영문판 모두 말이네. 백성들을 위해서도, 자네 자신을 위해서도, 그리고 나를 위해서도 꼭 그렇게 해주게. 이것은 지금 정부 아래서 대신을 하는 것보다 더 큰 일이고 더 좋은 일이네. 러시아인들이 나에게 신문사를 1만 원에 팔라고 했지만, 신문사를 러시아인에게 팔기보다는 차라리 굶는 편이 낫지. 자네가 신문을 맡으면 정치와 사람들을 조심해야 하네. 신문을 맡아 1, 2년만 버텨주면 상황이 바뀔 걸세.”


윤치호는 자신이 『독립신문』을 맡았을 때에도 그 명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국문판은 그런대로 할 수 있다 할지라도 영문판은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윤치호에게 서재필의 부탁은 부탁이기 전에 시대적 사명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거절할 수 없었다. 1898년 5월 11일 마침내 윤치호는 독립신문사 인수계약서에 서명했다. 계약서에는 서재필 박사와 아펜젤러(Appengeller, H. G.) 목사, 윤치호가 1년간 편집자로 되어 있고, 연봉은 각각 600원, 360원, 720원이었다. 서재필이 편집자 겸 명목상 사장이 되었다. 아펜젤러는 영문판 편집을, 윤치호는 국문판 편집과 독립신문사의 실제적인 운영을 맡았다. 1898년 5월 서재필이 미국으로 돌아간 뒤 윤치호가 신문을 계속 발행했으나, 그해 10월부터 독립협회 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이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 시작되면서 신문도 다시 탄압 받았다. 결국 1898년 12월 윤치호가 회장으로 있던 독립협회는 해산을 당했다. 윤치호는 정부의 회유와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1899년 1월 원산감리 겸 덕원부윤으로 부임했다. 『독립신문』의 주필은 아펜젤러가 맡게 되었다. 1899년 6월 신문사는 영국인 선교사 엠벌리(Emberley, H.)를 사장 겸 주필로 임명하고 아펜젤러가 동업자로 후퇴해 퇴세를 만회하려 하였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더욱이 정부에서 같은 해 7월 독립신문사의 사옥 반환을 요구하였다. 이에 미국공사 알렌(Allen, H. N.)이 정부와 서재필 사이를 중재하고 나섰다. 결국 1899년 12월 24일, 서재필이 신문사의 사옥과 인쇄 시설 일체를 일금 4,000원에 정부에 양도하기로 타결되었다. 『독립신문』은 1899년 12월 4일 자로 종간호를 내고 폐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