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터전

미주 한인의 3·1운동,
필라델피아 ‘제1차 한인회의’

미주 한인의 3·1운동,<BR />필라델피아 ‘제1차 한인회의’

글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


미주 한인의 3·1운동,

필라델피아 ‘제1차 한인회의’


Ⅲ. 3·1운동의 발발과 재미 한인의 독립운동 ④



3·1운동으로 나타난 한국인의 독립 열망을 미국 사회를 비롯한 전 세계로 알려야 한다는 생각은 대한인국민회와 전 미주 한인들의 절실한 바람이었다. 이런 때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선정된 이승만과 정한경은 서재필과 협의하여 미국에서의 3·1운동을 처음으로 계획했다. 이승만이 3월 20일 자로 중앙총회장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이승만·정한경·서재필 세 사람은 장차 뉴욕에서 큰 연회를 열어 각국 신문기자들을 초청해 연설로써 한국인에 대한 큰 동정을 불러일으킬 생각이었다. 그러나 곧 계획이 바뀌어 이승만·정한경·서재필 명의로 작성된 3월 24일 자 청첩장에서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필라델피아에서 ‘대한인총대표회의’를 개최하는 것으로 변경했다. 갑자기 계획을 변경한 배경에는 필라델피아에서 활동 중인 서재필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제1차 한인회의’의 추진

당초 대회 명칭은 ‘대한인총대표회의’로 계획했으나 대회 결과를 정리하면서 ‘제1차 한인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 일명 ‘한인자유대회’)로 규정했다. 이것은 미국 독립운동 때인 1774~1775년, 필라델피아에서 두 차례나 열린 식민지 ‘대륙회의(The Continental Congress)’를 본뜬 것으로, 과거 미국의 독립운동과 지금의 3·1운동을 동일한 대의를 지닌 것으로 봤기 때문이었다. 대회 개최 목적은 국내 3·1운동의 고귀한 뜻을 이어받아 전 세계에 일제의 불법적인 식민통치와 식민지 한국의 실상을 알리고, 한국 독립의 동정과 지지를 얻기 위함이었다. 

 ‘제1차 한인회의’는 급하게 준비되었다. 그런데다 한인들이 아주 적은 미국 동부지역에서 개최되는 지리적 요인 때문에 희망과 달리 많은 한인이 참석할 수 없었다. 하지만 대회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필라델피아 리틀극장에서 시작돼 3일 동안 이어진 대회의 참가자 수는 약 150명 정도였다. 이것은 당시 하와이와 멕시코를 제외하고 북미 한인의 수가 겨우 1,600여 명에 불과한 것을 감안할 때 결코 적은 수가 아니었다. 참가자들 대부분은 북미대한인유학생연맹 결성에 참여했던 미국 중·동부지역 한인 유학생들이었다. 

필라델피아에서 대회를 개최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서재필이었다. 서재필은 필라델피아에서 사회·경제적 기반을 잘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대회에 미친 영향도 아주 컸다. 실질적인 대회 기획이나 운영을 총괄하였으며, 대회를 성공적으로 진행시키기 위해 필요한 연사 초청이나 장소 선정, 미국 독립기념관으로의 시가행진과 이에 필요한 필라델피아시 측의 협조 등을 치밀하게 준비했다. 그리고 대회 의장으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회의를 주재했다. ‘제1차 한인회의’는 대회 행사를 주관한 이승만·정한경·서재필 외에 임병직·김현구·‘장기한’(장택상으로 보기도 함)이 간사로, 천세헌이 서기로 활동하였고 영어 속기를 위해 미국인 리글 씨가 고용되었다. 그 외 윤병구·민찬호·김현구·임병직·장택상·조병옥·유일한·김노디·민규식·천세헌·임초 등이 참석했다. 

그러나 이번 대회는 한인들만을 위한 행사가 아니었다. 한·미인 연합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국제적 대회였다. 한인들 외에 종교계, 교육계, 언론계 등 미국의 각 방면에서 활동 중인 주요 미국인들이 대회 주빈으로 참석했다. 이들 미국인은 성경 봉독, 기도, 축사, 강연, 증언 등의 순서를 맡아 대회의 보조자가 아닌 행사의 주역으로 참여했다. 대회 진행은 간간히 우리말도 담았으나 주로 영어로 진행하였고, 대회 결과물로 First Korean Congress란 책자를 만들어 미국 사회 요로에 배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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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한인회의’를 ‘자유를 위한 외침’으로 크게 보도한 The Philadelphia Press 기사(1919.04.17.)



‘제1차 한인회의’의 내용과 영향

제1차 한인회의’는 오전에는 주로 초청 연사의 강연을 듣고, 오후에는 주제별로 작성한 결의문과 호소문을 발표, 토의하는 순서를 가졌다. 주제별 결의문과 호소문의 작성은 미리 선정된 기초위원을 통해 하도록 했는데, 이 일은 대회의 핵심 활동이었다. 작성한 6개의 결의문과 호소문은 ①「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내는 결의문」, ②「워싱턴의 미국 적십자본부에 보내는 호소문」, ③「미국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 ④「한국인의 목표와 열망」, ⑤「일본의 지각 있는 국민들에게 보내는 결의문」, ⑥「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청원서」 등이다.

각 결의문과 호소문에 나타난 일관된 관점은 독립된 한국을 민주주의와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둔 미국식 공화제의 근대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한국인의 목표와 열망」에 담긴 10개조의 결의문은 기본적으로 미국식 대통령 중심제를 모델로 하면서, 내각책임제적 요소를 가미한 독립 국가 건설을 지향하였다. 즉, 새로 건설될 독립 정부는 대통령 1인에 대한 권력 집중을 제도적으로 방지하면서 능력 있는 각계 인사들이 참여하는 국민 주도의 민주주의를 제창했다. 그러면서 특별히 국민 교육을 강조했다. 이것은 독립 후 정치·경제적 여건을 감안해 일정 기간 민주주의를 위한 학습 과정이 필요하다고 본 것으로, 미국식 민주주의 방식을 답습한다고 하더라도 한국인의 형편과 실정에 맞추어 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1차 한인회의’에서 제기된 한국인의 독립 열망은 필라델피아를 비롯한 미국의 주요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다. 3·1운동 때부터 촉발된 미국 언론의 친한 동정 보도가 이번 대회를 계기로 더욱 확대되었다.

 ‘제1차 한인회의’ 마지막 날 참석자들은 당초 예정한 대로 필라델피아시 당국의 협조를 받아 양손에 한국과 미국의 국기를 들고 개최지인 리틀극장부터 미국 독립기념관까지 시가행진을 거행했다. 도착지인 독립기념관에서 대회 직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경’으로 선임된 이승만의 3·1독립선언문 낭독과 만세삼창, 독립기념관 내부 관람과 단체 기념촬영 등으로 모든 일정을 마무리했다. 

‘제1차 한인회의’의 영향은 미주 한인사회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축하하는 독립경축일로 이어졌다. 하와이의 경우 4월 12일을, 북미의 경우 4월 15일을 전 미주 한인의 독립경축일로 거행하였다. 무엇보다 이번 대회를 통해 미주 한인들은 물론 친한 미국인들로 하여금 전 미국을 향해 선전·외교활동을 본격화하도록 만들었다. 대회 직후 서재필은 필라델피아에 한국통신부를 조직해 선전 활동에 착수하였고, 이승만은 워싱턴DC에 구미위원부를 조직해 외교활동에 뛰어들었다. 톰킨스 목사를 주축으로 한 친한 미국인들은 필라델피아를 필두로 미국 각지에 한국친우회를 결성하였다. 3·1운동으로 거세게 불타오른 미주지역의 독립운동 열기는 한·미인 연합이라는 유례없는 국제적인 공조 속에서 미국과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