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오늘 세계의 그날

3·1운동과
진정한 20세기의 시작

3·1운동과<BR />진정한 20세기의 시작



글 강응천 기획집단 문사철 대표, 역사저술가


3·1운동과

진정한 20세기의 시작




1918년 제국주의 열강 간의 대충돌인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세계대전 중이던 1917년 러시아는 사회주의혁명을 일으켜 자본주의 체제에서 빠져나갔다. 러시아는 열강들의 간섭전쟁을 막아내며 동방 식민지·종속국들과의 협력에서 생존을 모색했다. 세계대전을 통해 신흥 강국으로 떠오른 미국의 윌슨 대통령도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선언해 식민지 민중에게 독립의 희망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모든 식민지가 아닌 패전국 식민지에게만 적용되었다. 영국을 도운 아랍 국가들이 패전국인 오스만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얻은 것처럼 말이다. 인도는 자치를 허용하겠다는 영국의 약속을 믿고 참전해 싸웠지만, 승전국인 영국은 인도의 독립을 허용하지 않았다. 한국인에게는 안타깝게도 일본은 승전국에 속했다. 덕분에 일본은 한국의 독립운동을 억누르고 중국 침략을 가속화할 수 있었다. 세계대전의 종식과 사회주의 러시아의 등장으로 세계는 진정한 의미에서 20세기를 시작했지만, 한국인이 갈 길은 아직도 멀었다.




alt

1918년 12월 27일 자 『매일신보』에 실린 독감 기사



세계대전보다 맹렬했던 서반아 독감

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전쟁터에서 발생한 ‘서반아(에스파냐) 독감’이 전 세계를 강타했다. 1918년 9월부터 3개월 동안 감기, 폐렴으로 죽은 사람이 2,000만 명을 넘었다. 한국에서도 서울에서 첫 환자가 발생한 이래 인천·대구·평양·원산·개성 등지로 계속 번져나가면서 엄청난 사망자가 발생했다. 에스파냐의 의학 전문 학술지 『자마』에는 「한국에서 확산되는 인플루엔자」라는 연구보고서가 실렸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독감의 “발원지는 시베리아이고 철길을 따라 확산”되었다.

조선총독부는 그해 12월 말 현재 742만 2,113명의 한국인 환자가 발생해 13만 9,128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국내에 들어와 있는 일본인, 중국인 등을 합치면 사망자는 14만 518명에 이르렀다. 농촌에서는 들녘의 익은 벼를 거두지 못할 정도로 상여 행렬이 끊이지 않았고, 각급 학교는 일제히 휴교해야 했다.

1918년 12월 27일 자 『매일신보』가 로이터 통신을 거쳐 보도한 『타임스』 기사에 따르면 “유행성 감기로 3개월간의 사망자가 600만 명이고, 5년간의 대전쟁에는 2,000만 명이 사망했으므로 이번 감기가 전쟁보다 다섯 곱절이나 맹렬”한 셈이었다.

실제로 그해 8월과 10월 사이 ‘서반아 독감’으로 사망한 미군 수가 2만 4,000명인데, 제1차 세계대전에서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미군의 수는 3만 4,000명이었다. 엄청난 피해가 아닐 수 없었다. ‘서반아 독감’이 격전지를 중심으로 빠르게 번져 나가면서 젊은 병사들이 밀집해 있는 부대 막사가 바이러스 확산에 좋은 환경을 제공했던 것으로 분석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앞당긴 결정적인 요인이 ‘서반아 독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처럼 영국, 프랑스, 독일을 휩쓴 ‘서반아 독감’은 에스파냐를 초토화하고 북아메리카와 아시아까지 확산되었다. 특히 알래스카와 캐나다를 비롯한 북아메리카 대부분의 지역은 죽음의 땅이 되었다. ‘서반아 독감’은 ‘1918년의 대재앙’으로 불리면서 중세 흑사병의 공포를 20세기 벽두의 세계에 몰아오고 있었다.



alt

종로의 만세시위 군중

alt

덕수궁 앞 만세시위

alt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민족 대표단



전쟁과 독감을 뚫고 울려 퍼진 만세 함성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세계대전과 인플루엔자도 새로운 시대가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러시아혁명과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해방과 혁명을 외치는 함성이 전후 세계를 뒤덮기 시작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30분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한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은 그 신호탄이었다. 그것은 한국이 일본에 병합된 지 9년 만에 식민지의 설움이 분출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남녀노소, 양반, 천민을 가리지 않고 모두 목 놓아 만세를 부르면서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온 세상에 알렸다.

그날 아침 일찍부터 서울의 종로와 서대문 거리에는 격문이 살포됐다. 오후 2시까지 파고다공원에 오기로 했던 민족 대표들이 나타나지 않자, 학생 대표 정재용이 팔각정 위에 올라가 힘차게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낭독이 끝나자 군중들은 파고다공원 뒷문으로 달려나가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종로 1가로 진출한 시위대는 남대문역, 정동, 덕수궁, 광화문, 서소문 등으로 몰려다니며 만세를 불렀다. 시위대는 거리에 있는 시민들의 합류를 권유했고, 이에 시민들이 함께 만세를 부르며 행진을 계속했다. 상인들은 가게 문을 닫고, 수업을 받던 학생들도 거리로 나와 시위에 동참했다. 만세시위는 일제 경찰의 강력한 폭력 진압에 맞서 서울뿐 아니라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지에서 동시에 전개됐다. 9년간 억눌려 온 분노가 용암처럼 전국을 휘감아 돌았다.

3·1만세운동의 기폭제는 해외에서 먼저 터졌다. 1918년 여운형 등 젊은 독립운동가들은 신한청년단을 결성해 전후 세계 질서가 논의되는 파리강화회의(1919년 1월)에 김규식을 파견했다. 그러나 승전국들은 일본의 편을 들며 식민지 한국의 대표를 외면했다. 독립운동 세력은 민족의 의지를 알리는 주체적인 방법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던 중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이는 국내에도 영향을 미쳤다. 손병희(천도교), 이승훈(기독교), 한용운(불교) 등 종교계 대표들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비밀 회동을 갖고 고종의 장례식 기간에 맞춰 만세시위를 준비했다.

그러나 민족대표 33인은 파고다공원 시위가 폭동의 우려가 있다며 거사 전날 태화관으로 회동 장소를 긴급 변경했다. 그리고 3월 1일 오후 2시경 그곳에서 만세 삼창을 한 뒤 일본 경찰에 자수했다. 민족대표들은 시위 지도를 포기했으나 학생, 시민 등 일반 민중은 포기하지 않고 만세운동에 나선 것이다. 나라 전체의 운명이 이름 없는 민중의 손에 맡겨진 전무후무한 상황 속에서 만세 소리는 점점 더 커져 나갔다.



alt

1919년 5월 4일 시작된 중국의 5·4운동을 기념하는 칭다오 5·4광장



대륙을 뒤흔든 함성

파리강화회의에는 중국도 대표단을 파견했다. 그들은 식민지 한국과는 달리 당당히 승전국의 일원으로 참가해 패전국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산둥반도를 되돌려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영국, 미국, 프랑스 등 서양 열강은 자신들의 반식민지로 전락했던 중국을 우습게 보았다. 그들은 중국의 요구를 거절하고 오히려 일본의 21개조 요구를 받아들여 산둥반도를 일본에 넘기기로 결정했다. 21개조는 일본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독일이 갖고 있던 중국 내의 이권을 모두 자신들에게 넘기라는 요구였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중국 사람들은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1919년 5월 4일 산둥반도의 중심 도시인 칭다오를 시작으로 열강의 침략과 무기력한 정부에 항의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베이징의 톈안먼광장에서도 베이징대학 학생들을 중심으로 약 3,000명이 모여 파리강화회의의 굴욕적인 결정을 격렬하게 성토했다. 시위 학생들은 “조약 서명을 거절하라!”, “죽음을 걸고 칭다오를 되찾자!”, “밖으로 주권을 쟁취하고, 안으로는 매국노를 징벌하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파리강화회의를 규탄했다.

학생들은 특히 친일파 관료인 차오니린, 장종샹, 루쭝위를 매국노로 지목하고 이들을 처단할 것을 요구했다. 차오니린은 1915년 일본이 요구한 21개조를 중국 정부가 받아들이는 조약에 서명하게 한 대표적인 친일파 관료였다. 학생들은 구호를 외치는 데 그치지 않고 차오니린의 집으로 몰려가 집에 불을 질렀고, 그 자리에 있던 주일공사 장종샹을 붙잡아 집단 폭행을 가했다. 군대가 출동해 시위를 진압했지만, 이튿날인 5월 5일부터 베이징을 비롯한 전국에서 동조 시위가 이어졌다. 6월 들어서는 공업지대인 상하이까지 시위가 번져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벌이고 상인들이 철시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중국 정부는 일단 친일파 관료 3명을 해직시키고, 파리강화회의 결정에도 서명을 거부하겠다고 밝혔다. 그동안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온 중국이 민중의 힘으로 모처럼 기력을 되찾을 조짐을 보인 것이다. 한반도에 이어 중국에서도 진정한 20세기의 동이 트고 있었다.



alt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린 파리강화회의. 이때 베르사유조약이 체결되었다



갈 길은 아직 멀었다

한국인과 중국인을 분노케 한 파리강화회의가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조약 체결과 함께 막을 내렸다. 이 조약으로 독일은 많은 영토를 잃고 고액의 배상금을 물어야 하는 처지에 몰렸다. 독일 영토 가운데 알자스와 로렌은 프랑스, 북부는 벨기에와 덴마크, 동부는 폴란드에 할양되었다. 독일의 군사력은 병력 10만 이하로 제한되고 탱크, 잠수함, 항공기 같은 장비의 생산이 금지되었다. 또 독일에게는 약 330억 달러에 달하는 가혹한 배상금이 부과되었다. 영국 대표로 참석한 저명한 경제학자 케인스에 따르면 이 액수는 독일 경제를 붕괴시킬 정도로 가혹한 것이었다.

독일은 전쟁을 일으킨 주범이니만큼 그처럼 가혹한 징벌이 내려지는 게 어쩌면 당연했다. 그러나 한국, 중국, 인도 등은 패전국도 아닌데 가혹한 운명을 받아 들여야 했다. 한국과 중국의 산둥반도를 비롯한 적도 이북 태평양 지역의 식민지는 일본, 남태평양과 아프리카 일부는 영국이 차지하기로 결론이 내려졌다. 또한 콩고 이북 아프리카의 식민지는 프랑스가 차지하기로 했다. 결국 베르사유조약은 열강들끼리의 영토 분할을 재조정했을 뿐 식민지·종속국들 앞에 놓인 가시밭길은 여전했다. 진정한 20세기는 그들의 민족해방운동과 함께 열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