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터전

해외 한인사회 최초의 군사학교
헤이스팅스 한인소년병학교

해외 한인사회 최초의 군사학교<BR />헤이스팅스 한인소년병학교
    


글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


해외 한인사회 최초의 군사학교

헤이스팅스 한인소년병학교


  

해외 한인사회 최초로 세워진 군사학교는 1909년 6월 미국 네브래스카주 헤이스팅스(Hastings)에서 박용만(朴容萬)의 주도로 설립한 한인소년병학교이다. 1914년까지 운영된 이 군사학교는 미주를 비롯한 1910년대 해외 한인들에게 강력한 항일무장투쟁의 독립정신 고취와 군인양성운동을 촉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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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한 박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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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소년병학교의 군사훈련 모습



한인소년병학교의 설립과 운영

헤이스팅스에 군사학교를 설립하는 계획은 1905년 2월 미국에 도착한 박용만이 1908년 7월 덴버에서 북미애국동지대표회(1908.07.11.~14.)를 개최하면서 수립되었다. 이 대회에서 군사학교 설립안이 가결되자 그는 박처후, 임동식, 조진찬, 김장호 등과 군인양성을 위한 세부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네브래스카주 정부와 커니시와의 교섭을 통해 설립 허가를 받아내어 1909년 6월 초순, 마침내 커니시의 조진찬 농장에서 한인소년병학교를 시작했다. 입학생은 14세의 김용성부터 50세가 넘는 조진찬까지 13명이었다.

한인소년병학교(Young Koreans'Military School)는 1909년 국망이라는 절박한 위기감 속에 설립되었기 때문에 강력한 항일무장투쟁을 교육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태평양 건너 미국이라는 지역적 거리 때문에 당장의 군사 지도자 양성보다 미래 독립운동을 위한 민족 지도자와 민족의 일꾼을 양성하는 데 주력하였다. 소년병학교는 헤이스팅스대학의 지원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대학 재무이사인 존슨(P. L. Johnson)이 한인소년병학교의 설립 소식을 듣고 헤이스팅스대학의 기숙사와 시설물을 훈련장소로 제공한 것이다. 이렇게 제공한 데는 기독교 대학인 헤이스팅스대학을 통해 한인 청년들을 전도해 장차 동양 선교의 방편으로 삼겠다는 선교정신이 있었다. 1910년 봄, 헤이스팅스대학으로부터 20에이커의 농장을 임대받아 경작하자 소년병학교의 운영은 한결 나아졌다. 그 결과 1910년 6월 제2기 개학 때는 전보다 두 배 많은 26명의 한인 청년들이 입소해 훈련을 받았다.

한인소년병학교는 하기방학을 이용해 운영했다. 생도들은 헤이스팅스를 비롯해 인근의 도시에서 유학하는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평소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6월 초 여름방학이 되면 한인소년병학교에 입소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가을학기 개학을 앞둔 8월에 교육 과정을 마쳤다. 한인소년병학교의 첫 졸업식은 1911년 8월 거행되었다. 이 때 13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듬해 졸업식에도 13명을 배출했으나 그 이후의 기록이 없어 전체 졸업생 수는 파악하기가 어렵다. 1909년 개교 이후부터 폐교되는 1914년까지 소년병학교에 등록된 생도 수는 중복된 인원을 포함하여 170여 명이었고 그 가운데 졸업생 수는 약 40여 명 정도인 것으로 보인다.


한인소년병학교의 교육과 영향

한인소년병학교의 교육 과정은 미국의 근대식 군사학교를 모방해 엄격한 규율을 갖추었다. 생도들은 소대와 중대로 편성되어 박용만을 중심으로 군사교관인 김장호와 이종철의 지도하에 군사훈련을 받았다. 교과목은 독립전쟁에 필요한 군사학과 군사조련은 물론 역사, 지리, 과학, 영어, 국어, 한문, 성서 등으로 이루어졌다. 그 외 육상반, 야구반, 연극반 등을 운영하며 과외활동도 했다. 이러한 교육 과목과 내용은 한인소년병학교가 군사교육과 군사훈련에만 주력한 것이 아니라 나라를 되찾고 독립된 새 국가를 건설할 민족의 지도자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함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생도들의 일과는 고되고 벅찼다. 오전에는 농장에 나가 일을 하였고, 오후에는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저녁에는 교실에서 공부하였다. 매주 일요일에는 헤이스팅스대학을 후원하는 헤이스팅스 제일장로교회에 나가 예배드리고 성경을 공부하였다. 오전 야외활동부터 저녁 교과 수업까지, 여간한 체력과 정신력이 아니고서는 버티기 어려울 만큼 빡빡한 일정이었다. 그러나 모든 진행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때문에 한인 생도들은 힘든 내색없이 오히려 즐거운 마음으로 참여했다. 더구나 교육을 통해 일깨운 일본에 의해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강렬한 민족의식은 고된 훈련과 교육과정을 이겨내는 힘이 되었다.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한 박용만은 학교 유지를 위한 경비 마련은 물론 헤이스팅스 인근 지역의 한인들을 결속시키기 위해 1909년 네브래스카 대한인거류민회를 만들었다. 대한인거류민회를 통해 매년 1인당 3달러의 인두세를 내게 하고 거둔 금액 중 100달러를 학교 운영비로 썼다. 그 외 농장이나 탄광에서 힘들게 일하던 한인 노동자들이 학교를 후원해 주었다.

한인소년병학교는 교장이던 박용만이 1912년 12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의 초청으로 하와이로 떠나면서 어려워졌다. 1914년 2월 조진찬, 백일규, 박처후 등 29명의 이름으로 소년병학교유지단을 조직해 각계의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으나, 학교 운영에 큰 역할을 맡았던 박처후와 백일규가 헤이스팅스를 떠나면서 힘을 잃었다. 그런데다 고등학교 졸업 후 학생들이 타지역의 대학교로 진학하면서 입학할 학생도 급격히 감소하였다. 이런 연유로 1914년 8월 4일 한인소년병학교 설립 6주년 기념만찬회를 끝으로 한인소년병학교는 폐교하였다.  소년병학교의 설립은 전 미주 한인사회에 군인양성운동을 촉발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1909년 11월 17일 멕시코의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에서 이근영이 숭무학교(崇武學校)를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캘리포니아주 롬폭의 의용훈련대(1910.08.), 마우이섬의 대동공진단(1910.07.)과 이를 기반으로 설립한 하와이지방총회의 연무부(1910.11.), 캔자스시티의 소년병학원(1910.11.), 와이오밍주 슈피리어의 청년병학원(1910.12.) 등이 연달아 설립되어 1910년대 군사교육의 붐을 일으켰다.

한편 한인소년병학교를 통해 길러진 청년 인재들은 이후 한국독립운동계와 미주 한인사회에 중추적인 인물로 활약했다. 설립자 박용만을 비롯해 박처후, 김장호, 정희원, 정한경, 김현구, 유일한, 김용성 등은 미주와 고국 땅에서 항일무장투쟁의 독립정신을 가진 독립운동가로, 언론인으로, 외교인으로, 그리고 학자와 실업가로 민족의 독립과 미래를 위해 헌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