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독립운동가의 초상

우리는 한국의 독립과
자유를 원한다!

우리는 한국의 독립과 <BR />자유를 원한다!
    


글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교수


우리는 한국의 독립과
자유를 원한다!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프랭크 스코필드는 3·1운동 직후 일본 하라 수상을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일본의 지배를 받던 시절, 세계 곳곳에는 스코필드처럼 한국의 독립과 자유를 바라며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외국인들이 있었다. 그중 2019년 현재 서훈을 받은 외국인 독립유공자는 모두 70명이다. 그들은 자신이 갖추고 있던 능력을 발휘해 힘껏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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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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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암리 방화 학살로 파괴된 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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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암리 사건에 관한 스코필드 보고서 



스코필드, 3·1운동의 목격자이자 증언자

스코필드(F. W. Schofield)는 영국 출신으로 10대 말 홀로 캐나다로 이주해 농장에서 일하며 토론토대학에서 세균학을 전공했다. 그가 한국 땅을 밟은 것은 1916년, 28살이 되던 해였다. 캐나다선교회 선교사로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 애비슨의 초청으로 들어와 세균학을 강의했다.

1919년 2월 28일 세브란스병원 직원으로 3월 1일 독립선언식을 준비하던 민족대표 이갑성이 스코필드를 찾아왔다. 이갑성은 그에게 독립선언서를 보여주며 다음날로 예정된 독립선언식 소식을 알렸다. 이갑성은 3월 1일 오전에도 다시 스코필드를 찾아와 만세시위를 사진으로 남겨 달라 부탁했다. 그날 오후 스코필드는 거리로 나가 서울의 만세시위 현장을 생생하게 필름에 담았다.

1919년 4월 15일 경기도 수원군 제암리에서 일본군이 끔찍한 학살을 저질렀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29명이 목숨을 잃었다. 제암리 학살 사건은 다음날인 4월 16일에 수원군 내 수촌리에서 일어난 일본군의 만행을 조사하러 나온 미국 영사 커티스 일행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스코필드는 4월 18일 제암리를 찾아 현장 사진을 찍고 「제암리의 대학살 보고서」를 남겼다. 수촌리 학살에 대해서도 「수촌리 만행 보고서」를 남겼다. 그는 이 보고서들을 비밀리에 선교본부에 보냈고,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영자신문 『상하이 가제트』 5월 27일 자에 제암리와 수촌리 학살과 관련해 익명으로 투고했다.

스코필드는 서울의 만세시위를 기록하고 일본군의 학살을 폭로하는 활동과 함께 조선총독부의 반인권적 탄압에 대해 항의하는 활동을 펼쳤다. 만세시위로 투옥된 세브란스병원 간호사 노순경을 면회하고는 조선총독부를 찾아가 열악한 감옥 환경을 개선하고 잔혹한 고문 행위를 중지할 것을 요구했다. 그해 8월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800여 명의 선교사 앞에서 조선총독부의 만행을 비판하는 연설을 했고, 하라 수상을 만나 일본의 식민 통치를 비판했다.

스코필드는 1920년 3월 세브란스에서의 근무 계약 기간이 만료되면서 본국인 캐나다로 돌아갔다. 이후에도 그는 한국 언론에 글을 실어 “조선은 나의 고향과 같이 생각됩니다”, “나는 ‘캐나다인’이라기보다 ‘조선인’이라고 생각됩니다”라며 한국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 해방이 되고 스코필드는 1958년 한국에 들어왔다. 이후 언론을 통해 한국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한편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다가 1970년 4월 12일 81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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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 다쓰지(외손자 오이시 스스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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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을 입은 후세 다쓰지(1926)(외손자 오이시 스스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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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산당 사건 변호를 위해 경성에 오는 포시진치(후세 다쓰지)의

소식을 전하는 기사(『중외일보』, 1927.04.29.)



후세 다쓰지, 독립과 인권을 위한 변론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


일본인 변호사로서 한국 독립운동과 민중운동 관련 재판에서 변론에 앞장섰던 후세 다쓰지(布施辰治)의 묘비명이다. 일본 미야기현 출신으로 23살이 되던 해인 1903년부터 변호사로 활동하던 후세는 한국이 식민지가 된 직후부터 한국 문제에 관심을 보였다. 1911년 ‘조선의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함’이라는 글을 발표해 검사국의 취조를 받았다. 1919년 2·8독립선언서 발표로 검거된 최팔용, 백관수 등 9명에 대한 출판법 위반사건에서는 2심 변호인으로 활약했다. 1920년 ‘민중 변호사’로 살아가겠다는 선언을 담은 ‘자기 혁명의 고백’을 발표하면서 한국인과 타이완인을 위한 사건에도 직접 나설 것임을 천명했다.

후세는 1923년 한국인 유학생 사상단체인 북성회 회원들과 함께 하기순회 강연회에 참여하기 위해 처음 한국을 방문했다. 한여름, 남부 각지의 강연회에 참여하면서도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린 의열단원 김시현 재판의 변호사로 활약했다. 그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을 무렵 간토대지진이 일어났고 이때 수천 명의 한국인이 학살당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후세는 한국인 학살 사건을 조사하고 고발하는 자유법조단을 이끌었다. 또한 의열단원 김지섭의 ‘폭발물취제벌칙위반사건’과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대역사건’의 변론을 맡았다. 후세는 1926년에는 두 번째로 한국을 방문하면서 일본인으로서 간토대지진에 대해 사죄와 책임을 통감한다는 내용을 담은 사죄문을 작성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보냈다. 또한 전라남도 나주군 궁삼면으로 내려가 농민들과 동양척식주식회사 간의 토지 분쟁 사건을 조사했다. 1927년에는 한국을 오가며 이인, 김병로, 허헌 등 한국인 변호사들과 함께 조선공산당 사건을 변론했다. 한국의 독립운동과 한국인의 인권을 위해 발 벗고 뛰었던 후세는 한국 독립이 세계 평화의 문제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조선 문제는 결코 조선에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조선 문제는 동양의 발칸 문제이다. 조선은 세계 평화와 혼란을 좌우하는 하는 열쇠이다. 전 세계의 문제이면서 인류의 문제이다.”


1930년대 일본에 파시즘이 본격적으로 발흥하면서 후세에게 고통스러운 시간들이 찾아왔다. 1932년에는 법정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징계재판을 받고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다. 1933년에는 신문지법과 우편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금고 3개월의 실형을 살았다. 1939년 다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이때 변호사 등록이 말소되었다. 고난의 세월 끝에 후세는 일본 패전 후 변호사로 복귀했다. 이후 재일 한국인의 권리를 찾는데 더욱 앞장섰다. 1953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재일 한국인의 권리와 인권에 관련된 사건들의 변호를 담당하는 등 ‘한국인의 영원한 동지’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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쑹메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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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회담에 통역관으로 참석한 쑹메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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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환송연(1945.11.04.)



쑹메이링, 한국의 독립을 지원한 퍼스트레이디

쑹메이링(宋美齡)은 중국 국민당 정부를 이끈 장제스의 부인이었다. 1897년 감리교 목사 출신의 사업가인 찰리 쑹의 여섯 자녀 중 넷째로 태어난 그는 1908년 11살의 나이로 미국 유학을 갔다. 웨슬리안대학을 거쳐 웰즐리대학을 졸업하고 1917년에 귀국했다. 그리고 10년간 YWCA 등에서 활동하다 1927년 장제스와 결혼했다. 이후 쑹메이링은 장제스의 개인비서, 통역관 겸 외교고문으로 수완을 발휘했다.

쑹메이링은 한국 독립운동에도 관심을 보이며 후원했다. 그 성원에 답하듯 중일전쟁 중에 미국의 한인 여성단체인 대한애국부인회가 쑹메이링에게 군사의연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쑹메이링은 충칭에서 임시정부와 광복군이 활동할 때 자신이 대표로 있는 부녀지도위원회를 통해 중국 돈으로 10만 원을 기부했다.

쑹메이링은 무엇보다 카이로회담에서 한국 독립을 위해 크게 공헌했다. 1943년 장제스를 대신해 미국을 방문했고, 그해 11월에 카이로에서 열린 미국, 영국, 중국의 정상회담에 장제스와 동행했다. 11월 23일 저녁에는 루스벨트와 그의 보좌관 홉킨스, 그리고 장제스와 쑹메이링이 만찬을 함께 했다. 만찬과 함께 밤 11시까지 이어진 회의에서 장제스는 일본이 패망한 후에 한국이 자유와 독립을 획득할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하며 루스벨트를 설득했다. 이때 영어를 하지 못하는 장제스를 위해 쑹메이링이 적극적으로 교섭에 나섰다. 장제스는 카이로회담을 마치고 귀국 후에 “나는 영어를 전혀 모릅니다. 무슨 일이든 부인이 나서서 처리했습니다. 그녀가 없었다면 절대로 이번 회담의 성공은 없었을 것입니다”라며 쑹메이링의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 이날 중국과 미국 정상 간의 합의는 영국의 반대라는 난관을 뚫고 결국 카이로 선언에 담겼다.

1945년 8월 마침내 일본이 패망하고 임시정부는 환국을 앞두게 되었다. 1945년 11월 4일 장제스는 임시정부를 환송하는 연회를 베풀었다. 이 때 함께 참석한 쑹메이링은 귀국 비용에 보태라고 10만 달러를 전했다. 임시정부가 중국 땅을 떠날 때까지 후원자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쑹메이링은 국공내전에서 국민당 정부가 패하면서 타이완으로 이주했다. 타이완에서는 퍼스트레이디의 역할에 그치지 않고 입법의원을 하는 등 독자적인 정치활동을 펼쳤고 대미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말년에는 타이완과 미국을 오가며 살다 107세를 일기로 2003년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