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로 읽는 역사

중등학교 학생들의
아주 특별한 추억

중등학교 학생들의<BR />아주 특별한 추억
    


글 김경미 자료부


중등학교 학생들의
아주 특별한 추억

일제강점기 중등학생의 수학여행


  

“수학여행이란 무엇이오. 쉽게 말하면 즉 이론으로 배운 것을 실지로 보아 넓히기 위하여 여행함이올시다...지리에 승지강산(勝地江山)이며 사학에 미술고적과 인정풍속을 실탐(實探)하여 증명코자 할진대 아마도 여행 놓고는 구하여 얻을 곳이 없는 줄 아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행처럼 필요하고 유익한 것이 없음을 확신하나이다.” -『동아일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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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중학교(보성고등보통학교) 수학여행 기념사진 모음 (『보성중학교 제31회졸업기념 사진첩』,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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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학교국어독본 권12』(1937) 제5과 「금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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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의 수학여행 사진-금강산 구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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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학교국어독본 권7』(1933) 제3과 「동경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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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공립고등여학교(전주여자고등보통학교) 수학여행 사진-궁성 앞

(『전북공립고등여학교 수학여행기념 사진첩』,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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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수학여행 기념사진 모음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제4회 졸업기념 사진첩』, 1934)



조선의 중등학교에서 수학여행이 일반화되기 시작하던 1920년, 경주로 수학여행을 다녀온 한 학생은 『동아일보』에 기고한 여행기에서 지리와 역사 교과에서 배운 이론을 여행을 통해 실제로 확인할 수 있다는 수학여행의 교육적 의미를 강조했다. 종종 수학여행의 문제점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져 학부모의 경제적 부담이나 주마간산식 여행 일정 등 수학여행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1930년대에 들어와서는 국내 도시 중심에서 일본과 만주로 여행지가 확대됐다. 그렇다면 여행을 떠난 학생들이 확인할 수 있었던, 학교에서 글로 배운 지식과 실사회에서 눈으로 본 실제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되었을까.


소수만이 누렸던 수학여행의 추억

한 중학교의 1940년도 졸업앨범에는 학생들이 5년간 재학 중에 다녀온 여행의 흔적들이 한 페이지에 담겨있다.(자료01) 인기 있는 수학여행지였던 국내의 경주, 금강산,개성, 그리고 일본의 도쿄, 교토, 나라 등의 풍경과 함께 기차 출입구 층계에 매달리고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어 손을 흔드는 학생들의 신나고 환한 얼굴이 가득하다.

당시 수학여행은 근대 문명을 상징하는 기차의 노선을 따라 일정이 짜였다. 비용을 아끼기 위해 50% 이상의 학생단체 할인을 해주는 가장 운임이 싼 3등 칸 기차를 탔으며, 여러 날 걸리는 여행은 출발과 도착뿐 아니라 이동할 때 야간열차를 이용하여 전 일정의 거의 반을 기차에서 숙박을 해결하는 고된 일정이었다. 그럼에도 수학여행은 학생들에게 “학교에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의 소원”이라 할 만큼 “하루가 천추(千秋)같이 기다려지는” 행사였다.

사실 수학여행은 중등학교에 다닐 수 있는 소수가 누릴 수 있는 혜택이었다. 자료01의 1940년도 졸업생이 학교에 입학했던 1935년의 경우, 중등학교 재학생수는 총 39,238명으로 인구 1만 명당 18.5명에 해당한다. 초등·중등·고등교육 기관의 학생 수 구성비가 각각 94.5%, 5.1%, 0.4%였으니, 고등교육뿐 아니라 중등교육도 극소수를 대상으로 한 엘리트 교육이었다. 중등학교에는 인문계 학교인 수업연한 5년의 고등보통학교와 수업연한 4년의 여자고등보통학교가 있었으며, 이들 학교는 1938년 4월부터 각각 중학교와 고등여학교로 바뀌게 된다. 실업학교로 수업연한 3~5년인 공업학교, 농업학교, 상업학교, 수산학교, 직업학교가 있었고, 또 수업연한 5~6년의 사범학교가 있었다. 이 중등학교 학생 중여학생은 여자고등보통학교생 6,047명과 실업학교생 689명, 사범학교생 205명 등 총 6,947명에 불과했다.

당시 조선사회의 경제적 여건에서 여행은 쉽지 않은 경험이었다. 특히 일본이나 만주로의 수학여행은 10일이상의 일정에 여행비용이 30-40원 정도 필요했다. 당시 일반 교원의 월급이 30원 정도였으니 대부분 가계에 상당한 부담이 되는 금액이었다. 학교에서는 학부모의 부담을 덜기 위해 매월 3-4원 정도의 수업료를 낼 때 20전-1원정도의 수학여행비를 적립하도록 하여 모아두는 방식을 채택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전에는 조선총독부의 학무당국에서 5할이 여행을 가면 허락했는데 지금은 8할이 아니면 허락하지 않는다”는 신문 기사를 통해 여행에 참가하지 못하는 학생도 상당수였음을 알 수 있다.


금강산의 절경과 경주의 천 년 역사

그럼 자료01 의 학생들처럼 1930년 후반에 수학여행을갔던 학생들의 주요 수학여행지를 따라가 보기로 하자.

자료01의 왼쪽 아래에 있는 두 장의 사진은 금강산 수학여행 사진이다. 금강산은 이들이 보통학교 때 배웠던 『보통학교국어(일본어)독본』에서 “숭고신비, 웅대호장, 실로 산악미의 극치”라고 묘사됐던 곳이다. 뛰어난 경관을 지닌 금강산은 일제가 조선 제일의 관광지로 개발하여, 1914년 서울과 원산을 잇는 경원선 철도가 완성되고 1931년에는 철원과 내금강 사이에 전철이 완전 개통됐다. 1932년에는 안변에서 경원선과 연결되는 동해북부선이 고성까지 이어졌다. 따라서 수학여행단은 경원선을 타고 철원에서 금강산전기철도로 갈아탄 뒤 내금강 역에서 내려 금강산 여행을 시작했다. 장안사, 명경대, 만폭동 등 내금강을 구경하고는 비로봉을 넘어 외금강 쪽으로 가서 구룡연, 만물상 등을 돌아본 후 온정리의 외금강 역에서 동해북부선을 탔다. 그리고 안변에서 경원선으로 갈아타고 경성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자료03에서 볼 수 있듯이 구룡연 폭포 앞에서 교복 차림에 등산용 지팡이를 들고 단체사진을 찍은 학생들은 아마 아침 일찍 여관을 나와 비로봉을 넘었을 것이다. 이 학생들이 자신의 몸으로 직접 오르며 눈으로 확인한 금강산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자료01의 왼쪽 윗부분에는 경주의 첨성대와 석굴암 앞의 단체사진이 있다. 경주는 일제가 조선과 일본의 고대사를 연결하기 위해 여러 문화유적에 대한 학술조사를 벌인 결과 ‘신라 천 년의 도읍지’로서 관광지가 된 곳이다. 1918년에는 대구에서 포항까지 연결하는 경편철도인 경동선이 개설됐고 이와 함께 개설된 서악에서 경주까지의 지선은 1919년에 이르러 불국사까지도 연결했다. 이제 경주로 수학여행을 가려면 경부선의 대구역에서 경주행 경편기차로 갈아타고 경주역에 내리면 됐다. 경주에서는 도보로 이동하면서 첨성대, 안압지, 왕릉 등을 보고나서, 경편철도로 경주역에서 불국사역으로 이동하여 토함산에 올라가 석굴암을 보고 내려와 불국사를 관람했다. 그리고는 불국사역에서 경주까지 경편열차를 타고 대구역으로 돌아갔다.

이들이 보통학교 4학년 때 배운 『보통학교국어독본』의 석굴암 기행문에는 “이런 훌륭한 조각을 남긴 사람의 이름이 전하지 않는 것은 실로 아쉬운 일이다. 천이백 년의 옛날에 이 정도의 미술을 갖고 있던 신라의 문화는 분명히 진보하고 있었던 것”이라 하여, 경주는 현재 식민지로 몰락한 조선의 사라진 과거의 영광을 보여주는 곳으로 기술됐다. 한 학생은 여행기에서 “천 년 전의 문화가 이렇게도 발전했을까? 그렇다면, 옛날의 문화 발달은 지금 어느 곳으로 자취를 감추었을까?”라고 묻기도 했다. 그러나 1933년 봄에 경주로 수학여행을 간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 학생 황수영은 경주에서 다보탑과 처음 대면한 순간 석탑의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이후 신라미술 연구의 길을 걷게 된다.


일본 수학여행이 남긴 것들

자료01의 대다수 사진은 일본 수학여행의 사진들이다. 중등학교의 일본 수학여행은 대개 히로시마, 오사카, 나라, 나고야, 도쿄, 교토, 가마쿠라, 닛코 등 일본의 주요 도시들을 차례로 방문하면서 일본의 역사적 인물을 모신 궁전과 신사, 근대시설 및 거리, 일본의 자연환경 등을 견학하는 것으로 짜였다.

학생들이 일본 수학여행에서 이용한 교통수단은 자료01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기차를 비롯하여 ‘관부연락선’, 승합자동차 외에 등산케이블카와 공중케이블카(로프웨이)도 있다.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잇는 정기 여객선인 ‘관부연락선’은 경부선이 개통된 1905년에 개통되어 일본의 철도와 연결됐다. ‘관부연락선’으로 시모노세키에 상륙한 학생들은 기차로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했다. 도시 내에서는 승합자동차에 나눠 타고 이동하는 경우도 있는데, 1939년 보성중학교 학생들은 교토 시내에서 히에이산의 엔락쿠지에 다녀오면서 등산케이블카와 공중케이블카를 타는 경험도 했다. 자료01의 사진은 이와 같은 일본의 발달된 교통수단도 수학여행의 중요한 기억으로 남았음을 보여준다.

일본 수학여행의 방문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천황이 거주하는 도쿄의 궁성 앞이었다. 보통학교 4학년 때 배웠던 『보통학교국어독본』의 도쿄구경 기행문에서 주인공이 아침에 집을 나와 가장 먼저 간 곳이 궁성이었고, 그 앞에서 주인공은 공손하게 궁성을 향해 절을 했다. 그리고는 궁성 앞 광장에서 갑옷투구로 무장하고 말에 올라타 궁성을 지키고 있는 난공(楠公)의 동상을 보게 된다.(자료04) 교과서에서처럼 수학여행단은 도쿄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천황이 사는 궁성을 찾아 절을 하고, 궁성의 니주바시(二重橋)를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찍었다.(자료05) 그리고는 광장에 있는 쿠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 동상 앞에서 설명을 들었을 것이다. 그는 일본역사상 가장 대표적인 충신으로, 학생들이 『보통학교국어독본』과 『보통학교국사』 등을 통해 보통학교 때부터 반복해서 배웠던 인물이다. 자료01의 사진에도 오른쪽 위 니주바시 앞의 단체사진과 함께 그 아래 동그란 사진 속에 쿠스노키의 동상이 있다.

수학여행에서 찍은 사진은 학생들의 졸업앨범에 실려 영원히 그들의 기억에 남도록 했다. 여러 장의 기념사진 중 여행을 대표하는 사진으로 졸업앨범에 실린 것은 니주바시 앞의 단체사진이었다.(자료06) 일본 수학여행에서 눈으로 확인한 모든 것이 수렴해야 하는 곳은 바로 천황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도쿄의 궁성 앞이었던 것이다.당시 학생들의 일본 수학여행기를 보면, 일본의 휘황찬란한 근대도시의 네온사인 아래서 ‘촌뜨기’가 되어 주눅이 든 학생도 있었고, 오랜 역사와 근대 문명을 겸비하고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일사불란한 일본의 모습에 황국신민의 일원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된 학생도 있었다. 그런데 같은 경험을 하면서도 식민지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를 생생하게 몸으로 느낀 학생도 있었다. 1937년 수학여행을 다녀온 전주고등보통학교 5학년생들은 전교생 앞의 보고회에서 동조동근(同祖同根)에 근거한 내선일체를 가르쳤던 학교의 교육은 기만이었음을 실제로 견문했다고 폭로했다. 춘천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한 학생은 상록회라는 조직사건에 대한 경찰 당국의 조사에서 일본 수학여행의 경험이 일본인에 대한 반감과 민족사상 고취의 한 계기가 되었다고 진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