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숨결
찬란한 5월의 어느 날
광주 시간여행

글·사진 임운석 여행작가
찬란한 5월의 어느 날
광주 시간여행
시간 여행은 과거의 흔적이나 이야기를 되짚어보는 여행이다. 멋진 풍광이나 특별한 이벤트는 없지만 옛것을 보고 듣고 느끼기에 부족하지 않다. 그래서 시대의 가치와 정신을 배우는 게 이 여행의 묘미다. 광주 양림동은 100여 년 전 근대문화의 정취가 오롯이 남아 있다. 근대 건축물에 감춰진 오래된 향기를 찾아 광주를 다녀왔다.

선교사들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양림동

정크 아트존으로 변한 펭귄마을

1904년 광주에서 최초로 설립된 양림교회.
현 예배당은 1954년에 지은 것이다
광주의 예루살렘, 양림동 서양촌
광주광역시 양림동은 야트막한 언덕배기인 양림산 아래에 자리한다. 양림산은 예나 지금이나 나무가 많아 실록이 짙고 깊다. 옛날에는 읍성 밖에 자리한 터라 전염병에 걸려 죽은 시체들이 있던 곳이다.
양림동에 근대 문화유산이 오늘날까지 잘 보존될 수 있었던 까닭은 선교사들의 활동 덕분이다. 1904년, 미국 남장로회 소속 선교사 유진 벨(한국명 배유지, 1868~1925)과 클레멘트 C. 오웬(한국명 오원, 1867~1909)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선교사들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면서 광주 사람들은 양림동을 ‘서양촌’이라 불렀고, 선교사들과 기독교 신자들은 ‘광주의 예루살렘’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양림동 여행은 관광안내소인 ‘양림마을 이야기관’에서 출발하는 게 좋다. 여기서 스탬프 투어를 위한 안내지도를 제공한다. 본격적인 투어에 앞서 양림쌀롱을 찾아보자. 여행자 라운지로 활용되는 이곳은 오래된 한옥을 개조해 1930년대 앤티크 가구와 소품들로 꾸며 놓았다. 400여 권에 달하는 여행 서적도 구비돼 있으며 모던한 의상도 대여한다.
펭귄마을 역시 양림동의 핫 플레이스 가운데 하나다. 양림동에서도 가장 낙후된 곳이었지만 지금은 전국에서 찾아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300m 정도 되는 좁은 골목길 담벼락에 70~80년대에 사용하던 생활용품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멈춰버린 벽시계, 1980년 이후 멈춰버린 달력, 찌그러진 밥그릇, 소화기를 재활용해서 만든 펭귄 등 빈터나 담장마다 박물관을 옮겨놓은 것 같다.
양림동 한가운데 자리한 양림교회는 1904년 12월 25일에 세워진 교회다. 지금의 교회당은 1954년에 지은 것으로 붉은 벽돌에서 예스러움이 묻어난다. 교회당 옆에 오웬기념각이 있다. 이 건물은 유진 벨 선교사와 함께 의료 선교사로 광주에 들어온 오웬 선교사를 기념해 세워졌다. 오웬 선교사는 목회와 의료봉사를 병행했는데, 과중한 업무 탓에 광주에 부임한지 5년 만인 1909년, 급성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오웬기념각은 예배당이 부족해 마음 아파했던 그의 뜻에 따라 미국에서 친척들이 보낸 기금으로 1914년에 건립했다. 회색 벽돌을 네덜란드 식으로 쌓아 이국적인 느낌이다. 기념각은 예배와 교회 행사에 활용됐으며, 특히 크리스마스에는 지역민들을 초대해 축제를 여는 등 문화의 장으로 사용됐다.

색감이 돋보이는 선교사 사택
한국을 사랑한 푸른 눈의 이방인들
양림동에는 희생과 봉사를 몸소 실천한 헌신적인 인물들이 많다. 광주기독병원의 2대 원장이자 의사였던 로버트 M. 윌슨(한국명 우일선) 선교사가 대표적이다. 1905년 워싱턴대학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의료선교사로 광주를 찾은 이후 한센병 환자들을 따뜻하게 보살폈다. 그를 ‘성자에 가까운 분’이라 칭송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가 살던 가옥은 현재 우일선 가옥이라 불리며 양림동을 찾는 여행자들이 꼭 한 번 들르는 명소가 됐다. 우일선 선교사 사택은 1920년대에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광주에 현존하는 서양식 주택으로는 가장 오래됐다. 1층에 거실, 가족실, 다용도실, 부엌, 욕실이 있고, 2층에 침실이 있으며, 지하에는 창고와 보일러실이 있다. 오웬기념각과 같은 회색 벽돌을 네덜란드 식으로 쌓았다. 정면, 측면 어디서 보더라도 서양식 가옥 특유의 멋이 느껴진다.
엘리자베스 셰핑(한국명 서서평) 여사와 최흥종 목사 역시 한센병 환자들의 자활에 헌신한 인물이다. 그 가운데 최흥종 목사는 젊은 시절 한때 건달 생활을 하며 방황하던 중 선교사들의 희생정신에 감화되어 기독교인이 됐다. 이후 제중원에 들어가서 한센병 환자를 치료하는 일에 헌신했다. 그러다가 1911년에 땅을 무상으로 기증해 국내 최초의 한센병 환자 수용 시설인 광주나병원을 설립했다. 그 이후에도 그는 목회를 지속하며 한센병 환자 치료에 일생을 바쳤다.

유진 벨 선교사를 기념하는 배유지기념예배당
광주 여성의 자긍심, 수피아여학교
양림동은 여성 교육의 요람이기도 하지만 수난의 현장이기도 하다. 유진 벨 선교사가 1908년에 설립한 수피아여학교(현 수피아여중고)는 1919년 3·1만세운동으로 일시 폐교됐고,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무기한 휴교 됐으며, 1937년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를 맞았다. 학교가 다시 문을 연 것은 1945년에 이르러서다.
우일선 가옥에서 수피아여학교로 가는 길목에 단출한 서양식 건물이 눈에 띈다. 원래 커티스메모리얼홀이라 부르던 곳으로 지금은 배유지기념예배당이라 부른다. 선교사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1921년에 지었다. 그 아래에 ‘대한독립만세’를 큰소리로 외치는 듯한 형상의 광주 3·1만세운동 기념 동상이 있다. 동상 뒷면에는 만세운동에 참여한 23명의 이름이 적혀있다. 수피아여학교 교사와 학생 중 옥고를 치른 인물들이다. 그중에는 일본 헌병이 휘두르던 칼에 왼팔이 잘리자 오른손으로 태극기를 흔들었던 윤형숙과 광주 YWCA와 민주화 운동을 이끈 ‘광주의 어머니’ 조아라 여사, 독립과 여성 운동에 평생을 바친 김마리아 여사 등의 이름도 있다. 그들은 광주인의 자긍심을 일깨워줄 만한 인물들이다.
수피아여학교 수피아홀과 윈스브로우홀에도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수피아홀은 이 학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서 현재 역사관으로 사용 중이다. 그 아래 3층짜리 붉은 건물은 윈스브로우홀이다. 1927년, 미국 남장로회 윈스브로우 여사를 주축으로 설립된 부인조력회에서 ‘생일 헌금’ 5만 달러를 헌금해 지었다. 정면 중앙 출입구를 중심으로 좌우대칭을 이뤄 안정감이 느껴진다. 정문 오른쪽에 매달린 무쇠종이 추억을 소환하듯 ‘땡땡땡’ 수업 시간을 알린다. 현재 교사로 사용 중이라 내부는 관람할 수 없다.
호남신학대학교를 지나 사직공원에 오르면 전망 타워가 있다. 양림동은 물론이고 서쪽에 영산강, 동쪽에 무등산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생후 3년 만에 생을 마감한 선교사 자녀의 묘비
양림동이 잔잔한 울림으로 남는 이유
호남신학대학교에 가면 작은 숲길이 있다. 숲길은 윌슨길, 오웬길, 프레스톤길, 카딩톤길, 시핑길 등 선교사들의 이름을 딴 산책길이다. 어떤 길을 걸어도 길의 종착지는 선교사 묘원으로 이어진다. 유진 벨 선교사 및 오웬 선교사를 포함해 스물두 명의 선교사와 그의 가족들이 안식한 곳이다. 개중에 작은 무덤은 꽃도 피어보지 못한 채 천국으로 간 어린 자녀들의 무덤이다.
이곳에 묻힌 선교사들의 공통점은 최고 엘리트 코스를 밟은 장래가 촉망된 청년들이라는 점과 안정된 삶을 포기하고 낯선 이국땅에서 평생을 헌신한 데 있다. 그들은 낯선 문화에 적응하기보다 그것을 뛰어넘었다. 그들은 천형이라며 가족에게마저 버림받은 한센병 환자의 손을 잡아줬으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빈민을 제 가족처럼 거둬들였다. 그리고 고아들의 부모가 되길 자처했다. ‘조선의 테레사’라 불린 서서평 선교사는 대학을 세우고, 대한간호협회를 창립해 세계간호협회에 가입시키는 등 낙후된 의료 환경개선을 위해 한평생을 바쳤지만, 정작 자신은 반쪽짜리 담요와 동전 몇 개, 그리고 강냉이 두 홉만을 남긴 채 1934년 풍토병과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났다.
시간 여행에는 아름다운 풍광이나 가슴 설레는 체험은 없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 잔잔한 울림이 있다. 선교사의 사랑과 희생, 봉사와 나눔에 가슴이 따뜻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