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로 읽는 역사

잘살려면 어린이를 위하라!
새 조선의 일꾼은 어린이!

잘살려면 어린이를 위하라!<BR />새 조선의 일꾼은 어린이!
    


글 김경미 자료부


잘살려면 어린이를 위하라!

새 조선의 일꾼은 어린이!

일제강점기 「어린이날」의 풍경

  

“오월 일일이 왔다. 조선에서 처음으로 어린이에게도 사람의 권리를 주는 동시에 사람의 대우를 하자고 떠드는 날이 돌아왔다.” 처음으로 조선 전국에서 어린이날을 축복한 1923년 5월 1일, 『동아일보』는 이와 같은 머리말로 어린이날을 알리는 기사를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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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5월 1일 어린이날 포스터(1925, 『동아일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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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5월 첫 일요일 어린이날 포스터(1933, 『조선중앙일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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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5월 첫 일요일 어린이날 포스터(1932)



어린이와 어린이날의 탄생

우리나라에 어린이날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22년 5월1일 천도교소년회가 창립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어린이의 날’ 행사에서였다. 행사는 “10년 후의 조선을 생각(慮)하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기념식, 선전지 배포, 시가행진, 축하회로 진행되었는데, 이는 이후 어린이날 행사의 기본틀이 되었다. 1923년 4월 17일 서울에서 천도교소년회를 비롯한 소년운동단체가 모여 ‘조선소년운동협회’를 결성하고 매년 5월 1일을 조선의 어린이날로 정했다. 이로부터 조선 전국 규모의 어린이날이 시작되었다.

일제강점하에서 어린이날의 시작은 어린이 인권에 대한 계몽운동의 하나였다. 당시 아이들은 ‘애녀석’·‘어린애’·‘아해놈’이라 불리며 압박에 짓눌려 말 한 마디, 소리 한 번 자유롭게 하지 못하던 처지에 있었다.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쓴 방정환은 ‘늙은이’나 ‘젊은이’의 호칭과 동격으로 어린이들도 인격을 지닌 존재로서 높여 부르고자 한 것이다.

1923년 5월 1일 서울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거행된 어린이날 기념식에서는 다음과 같은 「소년운동 선언문」이 낭독되었다.


1.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억압으로부터 해방하여 그들에게 대한 완전한 인격적 예우를 허하게 하라.

2. 어린이를 재래의 경제적 억압으로부터 해방하여 만14세 이하의 그들에게 대한 무상 또는 유상의 노동을 폐하게 하라.

3 . 어린이 그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기에 족할 각양의 가정 또는 사회적 시설을 행하게 하라.


이러한 어린이의 해방은 마땅히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었으나, 일제강점이라는 상황 속에서 특히 강조된 점은 “젊은이나 늙은이는 이미 희망이 없으므로 오직 미래를 담당할 어린이에게 희망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린이는 한 집안의 미래와 더불어 민족의 미래를 살려야 할 존재였다. 이는 자료01~03의 어린이날 포스터 속 “잘살려면 어린이를 위하라!!”, “새 조선의 일꾼은 어린이!!”, “희망을 살리자! 내일을 살리자!!”라는 구호에 잘 나타나 있다.

5월 1일로 정했던 어린이날은 1928년부터는 5월 첫 일요일로 날짜를 바꾸었다. 5월 1일이 노동절, 즉 메이데이와 같은 날이라 경찰 당국에서 집회를 금지하여 행사에 곤란을 겪고,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모임에 나가지 못하도록 하여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이다. 1931년부터는 ‘조선어린이날 중앙준비회’가 구성되어 어린이날 행사를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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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부형모자용 선전지(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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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어린이날 노래 선전지(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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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소년소녀의 결의문 선전지(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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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자전거 등 탈 것에 다는 종이 기(1929~1930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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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기행렬 때 어린이들이 드는종이 기(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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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동아일보』에 실린 어린이날 행사

사진(1932). 위 사진은휘문고등보통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기념식이며, 아래 사진은

소년소녀 기행렬 모습이다



어린이날의 풍경

그럼 어린이날 행사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일제강점기 어린이날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자리 잡은 자료03의 포스터를 따라 1932년의 어린이날로 돌아가 보자.

1932년 첫 일요일은 마침 1일이었다. 메이데이와 겹치는 바람에 경찰 당국과 날짜 문제로 오래 승강이를 벌이다 간신히 행사를 열수 있게 됐고, 출판 허가도 받았다. 포스터와 선전지, 어린이날 기 등이 전국 각 지역 소년단체에 발송되었고, 기념식과 기행렬 등 여러 행사의 준비도 마쳤다. 학교와 시장, 정거장과 같이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에 포스터를 붙였다. 안국동네거리와 종로 등 시내 주요 장소에 선전탑을 세우고 축등도 달았다. 각 가정에는 “어린이날”과 “복(福)”자를 쓴 자그마한 복등을 걸도록 했다.

어린이날인 5월 1일, 새벽 5시부터 서울 시내 각처에서 어린이날을 알리는 소년군의 나팔 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소년단체 회원들이 총동원되어 집마다 ‘부형모자용 선전지’[자료04]를 돌렸다. 어린이날 행사에서는 무엇보다 부모를 비롯한 어른들의 어린이에 대한 인권 의식을 일깨우는 것이 중요했다. 이를 위해 사용된것이 선전지로, 선전지에는 “어린이는 어른보다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 등의 5가지 유념할 사항이 적혀있고, 이것을 벽에 붙여두고 자주 읽으라는 당부도 써 놓았다.

어린이날 의식은 계동에 있는 휘문고등보통학교 구장에서 거행되었다. 각 소년단체는 단체 기와 함께 “희망의 꽃은 어린이!”, “모이자, 배우자, 일하자!”, “소년의무교육을 실시하자!” 등의 표어를 쓴 큰 기를 들었다. 소년소녀들은 각각 ‘어린이날 기’를 들고 식장에 모여들었다. 조선소년군과 소년척후대에서 군악과 나팔을 울리고 장내외를 경비했다. 오전 11시 안정복의 사회로 개회식이 선언되자 소년군의 주악과 나팔이 울리고 참가자 일동은 소리 높여 ‘어린이날 노래’를 합창했다. 1925년부터 부르던 어린이날 노래는 스코틀랜드 민요 멜로디에 맞춰 지은 ‘야구가’에 방정환이 다음과 같은 노랫말을 지어 넣은 것이었다.


1 절

기쁘고나 오늘날 5월 1일은 / 우리들 어린이의 명절날 일세 / 복된 목숨 길이 품고 뛰어 오는 날 / 오늘이 어린이의 날


후렴

만세 만세를 같이 부르며 / 앞으로 앞으로 나아갑시다 / 아름다운 목소리와 기쁜 맘으로 / 노래를 부르며 가세


2 절

기쁘고나 오늘날 5월 1일은 / 반도 정기 타고난 우리 어린이 / 길이길이 뻗어날 새 목숨 품고 / 즐겁게 뛰어노는 날


어린이날 날짜가 바뀌면서 가사 중 “5월 1일”은“어린이날”로, 후렴의 “만세 만세를 같이 부르며”는 “동무여 동무여 손을 잡고서”로 바뀌었다.[자료05] 다음 중앙준비회를 대표한 정홍교의 인사말에 이어 내빈으로 동아일보사 편집국장인 이광수가 간단한 축사를 했다. 그리고 소년대표 정세호가 나와 “지금 어른보다 더 새롭고 영특한 사람이 되기 위해 모든 새것을 배우기에 힘쓰자” 등 5개 조항이 적힌 「결의문」[자료06]을 낭독했다. 다시 어린이날 노래를 합창하고 어린이날 만세 삼창을 한 후 식을 마쳤다.

이어서 어린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기행렬이 시작되었다. 어린이들이 줄을 지어 어린이날 기를 흔들며 어린이날 노래를 목이 터지도록 부르면서 서울 중심가를 행진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단체별로 표어 기와 단체 기를앞세우고 악대와 나팔수로 행렬을 조직한 다음 식장에서 출발해 돈화문-수은동(현 종로구 묘동)-종로2정목(종로2가)-종로사거리-황금정(현 을지로)사거리-경성부청(현서울도서관) 앞-동아일보사 앞-종로사거리-견지동-안국동네거리-재동네거리를 돌았다. 소년소녀들은 다시 식장으로 돌아와 만세 삼창을 하고 해산했다.

어린이날 축하회에는 어린이를 위한 연예공연과 함께 어른들을 위한 계몽프로그램도 마련되었다. 어린이날 당일 저녁 7시 반부터 경운동의 천도교기념관과 견지동의 시천교당에서 어린이 대회가 열려 동요, 무용, 동화극으로 어린이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다음날인 5월 2일 저녁 7시 반 같은 장소에서 열린 부형모자대회에서는 소년문제에 관한 강연과 연극, 무용, 음악 등의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어린이날을 축하하는 부대행사도 다채롭게 진행되었다. 행사에 참여하는 상점에서는 어린이 물건을 특별할인 해주고, 사진관에서는 어린이 사진을 반액에 찍어주며, 병원은 어린이에 대해 무료 건강진단을 해주었다. 조선인이 운영하는 회사들은 포스터 등 행사에 필요한 물품을 기증하고 금일봉을 제공하며 행사를 지원했다.[자료03~07]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사설과 상세한 보도 기사로 어린이날 행사를 널리 알림으로써 전국적으로 소년운동과 어린이날의 뜻을 전파하고 운동에 동참할 것을 격려했다.


어린이날 행사에 대한 일제의 탄압

이와 같이 어린이날 행사가 해마다 전국적으로 성황을 이루자 조선총독부 당국에서는 비상하게 주의를 기울였다. 서울의 기념식장에는 종로경찰서 형사와 기마경관까지 출동하여 단속했으며, 소년단체에서 들고 있는 기를 조사해 쓰인 문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끌어내렸고, 기념사가 중간에 금지당하거나 축사를 하러 온 내빈이 아예 단에 오르지 못 하는 일도 있었다. 기행렬 때는 수백 명의 정·사복 경관이 따라다니며 경계를 폈다. 1925년 기행렬용 어린이날 기는 “무엇이나 붉은색이라면 사지를 벌벌 떠는 경찰당국”에서 불온한 붉은색을 썼다고 사용을 불허하였다.[자료08]

지방에서의 억압은 더욱 심하여 각지 경찰서에서 어린이날 행렬과 선전문 살포, 강연회를 금지 또는 제한하였으며 서울에서 사용 허가가 난 선전지를 압수하는 일도 빈번했다. 느닷없이 금지당한 행사를 진행하려다 소년단체 회원들이 검거, 취조를 당하는 일도 있었다.

결국 1937년에는 어린이날 기념식 외 모든 행사를 완전히 금지당했으며, 1938년부터는 기념식도 열 수 없었다. 전국의 소년단체가 참가하여 조선 민족의 명절로 거행되던 어린이날 행사는 조선총독부에서 주도하는 ‘아동애호주간’이 대신했다. 미래를 짊어질 희망으로서 어린이의 인권 의식을 일깨우던 어린이날은 각 가정에서 어린이를 데리고 창경원이나 덕수궁에 놀러가는 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