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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일본의 등장과
을사늑약

제국주의 일본의 등장과<BR />을사늑약
    


글 강응천 기획집단 문사철 대표, 역사저술가


제국주의 일본의 등장과

을사늑약


  

욱일기(旭日旗). 일본 군대가 상징으로 사용하는 깃발의 이름이다. 일장기의 태양 무늬에서 퍼져나가는 햇살 무늬를 형상화한 그 모양처럼 20세기 초의 일본군은 무섭게 뻗어 나갔다. 1895년 동아시아의 중심 국가로 군림해 온 청을 황해에 가라앉히더니, 10년 뒤에는 유럽 열강인 러시아를 대한해협에서 침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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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을 위해 부산에 진주한 일본군



자본주의는 유럽에만 있다?

러일전쟁은 제국주의 열강 사이에 벌어지던 숨 막히는 영토 분할 전쟁의 동아시아판 클라이맥스였다. 일본은 영국과 미국의 은밀한 후원 아래 동아시아에서 러시아를 견제함으로써 실력을 검증받았다. 애당초 세계는 러시아의 승리를 점쳤으나, 결과는 아시아의 ‘떠오르는 태양’ 일본의 승리였다. 유럽의 침략에 고통받던 아시아인은 일본의 승리에 환호했다. 그러나 일본은 그들의 기대처럼 유럽의 제국주의에 맞서는 아시아의 수호자가 아니었다. 지리적으로만 아시아에 속할 뿐 일본도 유럽 열강과 다름없이 식민지를 탐하는 제국주의를 지향하고 있었다. 러일전쟁 직후 대한제국에 강요한 ‘을사늑약’은 그와 같은 일본의 정체를 잘 보여주는 역사적사건이었다.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던 1905년,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책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자본주의 탄생의 비밀을 탐구하고자 했다. 베버가 그러한 목적의식 아래 던진 질문은 왜 자본주의가 오로지 유럽에서만 나타나는가 하는 것이었다. 치밀한 탐구를 통해 그가 얻은 결론은 책 제목에 명시적으로 나타나 있다. 소명 의식에 사로잡힌 금욕적이고 근면한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도의 정신이 자본주의를 낳았다는 것이다.

베버는 자본주의의 발전을 이룬 곳에는 개신교도의 비율이 상당히 높았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리하여 개신교와 자본주의의 관계를 살핀 결과 개신교도들이 소명 의식을 갖고 근검절약한 덕분에 자본주의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에 제국주의 국가로 떠오른 일본은 최소한 두 가지 측면에서 베버의 결론과 상충한다. 첫째 일본은 유럽국가가 아니면서도 자본주의 국가로 성공했다. 둘째 일본은 개신교가 전혀 뿌리내리지 못했는데도 자본주의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유럽의 자본주의 국가와 맞붙어 승리를 쟁취한 최초의 아시아 국가로 떠올랐다.


유럽 자본주의 국가를 제압한 아시아 자본주의 국가 일본

러일전쟁의 발단은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을 러시아, 독일, 프랑스가 견제하고 나선 ‘삼국간섭’이었다. 일본이 랴오둥반도와 만주 일대를 차지하자, 러시아를 비롯한 세 나라가 이를 가로막으면서 불씨가 일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은 자국의 중국 진출을 저지하는 러시아에게 만주를 양보하는 대신 한반도는 자신이 갖겠다는 절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마저 거절했다. 게다가 대한제국의 외교는 일본보다 러시아로 기울고 있었다. 일본은 중국과 한반도에서 배제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힌 끝에 전쟁을 통해 중국 진출의 돌파구를 마련하기로 결정했다. 러시아의 야심을 경계하고 있던 영국과 미국은 은밀하게 일본을 지원하고 나섰다.

1904년 초, 일본은 러시아에 개전을 선언하고 러시아 조차지인 랴오둥반도의 뤼순항을 점령했다. 이후 전장은 육지로 옮겨져 수십만 명의 양국 병력이 충돌했다. 전투마다 수만 명씩 희생자가 나오는 가운데, 승세는 일본이 잡아 나갔다. 러시아가 기우는 전세를 뒤집기 위해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발틱함대를 출동시켰으나, 지구 반 바퀴를 돌아온 발틱함대는 대한해협에서 일본 해군의 기습을 받아 물귀신이 되고 말았다. 이로써 1년 넘게 지속된 러일전쟁은 많은 사람의 예상을 깨고 일본의 승리로 귀결되고 말았다.

러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한반도는 물론 만주에 대한 진출권까지 확보했다. 근대 이후 아시아 국가로는 처음으로 유럽 국가를 무력으로 꺾고 제국주의 대열에 올라선 것이다. 일본열도는 승전의 기쁨으로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다. 그러나 흥분한 것은 일본만이 아니었다. 많은 아시아인이 일본의 승리를 자신의 승리로 받아들이며 기뻐했다.


아시아의 승리에 열광한 아시아인들

중국의 혁명가 쑨원은 일본이 러시아에 승리하자 아시아 민족은 독립에 대한 커다란 희망을 품게 되었다고 말했다. 인도의 독립운동가 네루도 “일본이 유럽의 가장 강대한 한 나라에 대해 승리했는데, 인도라고 못 하겠는가?”라고 한껏 고무되었다. 아시아뿐만이 아니다. 러시아의 침략에 시달리던 폴란드, 핀란드 등 유럽의 약소국가 지도자들도 러시아가 패배한 덕에 독립을 쟁취할 수 있게 됐다며 일본에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 같은 반응은 러일전쟁의 결과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과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큰 문제는 한국인 중에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지용 같은 친일파가 은밀히 일본의 승리를 바라며 전쟁 자금을 헌납하고, 일부는 일본 첩자로까지 활약한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안중근을 비롯한 개화파 애국지사조차 처음에는 일본의 승리를 백인종에 대한 황인종의 승리로 보고 이를 반겼다. 그들은 일본의 승전을 계기로 동양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했다. 물론 이러한 기대는 일본이 아시아 민족의 해방 대신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에 대한 식민 지배로 발걸음을 옮김에 따라 지독한 배신감으로 바뀌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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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한

일본 내각총리대신 가쓰라 다로(왼쪽)와

미국의 육군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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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 전문



제국주의에 피부색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러일전쟁은 러시아와 일본이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강화조약을 맺음에 따라 종결되었다. 포츠머스조약 체결 직전 일본은 자신을 후원했던 미국, 영국과 비밀조약을 맺었다. 이 비밀조약은 러일전쟁 이후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틀을 짠 것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과 일본은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고 필리핀과 대한제국에 대한 각자의 권리를 인정했다.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고 필리핀에 대해 어떤 침략적 의도도 갖지 않는다고 약속했다.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미국도 러일전쟁의 논리적 귀결로서 일본이 대한제국의 보호권을 확립하는 데 찬성하고, 일본의 한국 지배가 극동 평화에 이바지할 것이라고 축원했다. 그 다음 달 영국과 일본은 제2차 영일동맹을 맺었다. 그때 일본은 “한국에서 정치·군사 및 경제상의 탁월한 이익을 옹호·증진하기 위해 정당하고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도·감리 및 보호 조치를 한국에서 집행할 권리”를 인정받았다.

1905년 11월 18일 새벽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중명전에서 체결된 ‘을사늑약’은 이러한 국제적 밀약의 산물이었다. 조약의 핵심 내용은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다는 것과 일본인 통감을 두어 정치에도 간섭한다는 것이었다. 한 나라의 주권은 외교권과 군사권이 핵심이다. 그런데 그중 하나인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김으로써 사실상 국권을 상실한 대한제국은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했다.

을사늑약을 배후에서 지휘한 일본인은 이토 히로부미이고, 그의 책략에 부응해 국권을 팔아넘긴 한국인은 학부대신 이완용을 비롯한 다섯 명의 고관대작이었다. 그들을 ‘을사오적’이라 한다. 소식을 전해 들은 백성은 을사오적을 처단하라고 외치며 분노로 들끓었고, 양반들은 을사늑약 파기를 주장하는 상소를 줄지어 올렸다. 상가는 철시 투쟁을 벌이고, 학생들은 동맹휴학에 나섰다. 일본의 배신에 치를 떤 개화파 지식인 안중근은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국권회복운동에 투신했다. 1909년 10월 26일 그가 하얼빈역에서 처단한 사람은 을사늑약의 주역으로 이후 조선통감을 맡아 침략의 최전선에 나섰던 이토 히로부미였다.


스모그의 시대

1905년이 일본에게는 아시아의 패권 국가로 발돋움하는 욱일승천의 해였다면, 한국에게는 을사늑약과 함께 사실상 식민지의 치욕이 시작된 해였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앞날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시계(視界) 제로의 상황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그해 최고의 자본주의 선진국인 영국에서 나타난 새로운 현상은 마치 그와 같은 한국의 암울한 상황을 표현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영국의 수도 런던은 예로부터 안개가 많이 끼기로 유명한 도시였다. 매캐하고 뿌연 연기가 런던을 뒤덮으면서 대기를 혼탁하게 하고 차량과 보행자를 위협하고 있었다. 1905년 런던에서 열린 공중위생회의에서는 이 같은 새로운 대기 현상을 일컫는 ‘스모그(smog)’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스모그는 연기(smoke)와 안개(fog)의 합성어로, 런던처럼 매캐하고 뿌연 연기가 안개와 함께 온 도시를 뒤덮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스모그의 원천은 자본주의 산업 발전의 상징인 공장의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였다. 세계 자본주의의 수도인 런던에서 그러한 굴뚝 연기는 한때 산업혁명을 상징하는 광경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공장이 점점 더 많이 건설되고 석탄 소비가 늘어나자, 석탄이 타면서 나온 매연이 안개와 혼합돼 시민의 건강과 안전을 위협하게 된 것이다.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라는 암울한 조건에서 스모그의 시대를 맞이할 채비를 거의 마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