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독립운동가의 초상

손으로! 돈으로!

손으로! 돈으로!
    


글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교수


손으로! 돈으로!


  


독립운동가들은 기꺼이 나라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쳤다. 그들의 모든 것에는 재산도 포함되었다. 생계를 위해서든, 독립운동을 위해서든 자금은 필요했기에, 소위 돈을 가진 독립운동가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국내외 활동 기지로 자금을 보냈다. 조선 제일의 부자에서 빈털터리가 되었지만, 그들은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대한사람으로서의 품격 있는 삶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은 1920년 12월 25일 자에서 ‘대한사람이 남자나 여자나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해야할 일’여섯 가지를 제시했다.


1. 달마다 얼마씩 돈을 내시오.

2. 돈을 내기 위하여 한 가지 직업을 가지고 부지런히 돈을 버시오.

3. 날마다 한 사람씩 당신과 같이 돈을 낼 사람을 얻으시오.

4. 나랏일을 위하여 몸을 바친 이를 돕고 그의 가족을 도우시오.

5. 당신이 청년이거든 곧 학교에 들어가시오. 학교에 갈 처지가 못 되거든 통신교수를 받든지 기타의 방법으로 힘 있는 국민이 되기 위하여 공부를 시작하시오.

6. 당신이 애국자거든 대독립당을 세우기 위하여 힘쓰시오. 머리로 말고 손으로 돈으로.


나라를 잃은 대한사람에게 독립을 위한 고귀한 삶의 길을 제시하며 마지막에 ‘손으로, 돈으로’를 강조한 점이 눈에 띈다. 하지만 그 길은 누구나 갈 수 없는 가시밭길이었다. 이처럼 자신의 몸은 물론 자신이 가진 재산마저 아낌없이 내놓으며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독립운동가들을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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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우수리스크에 있는 최재형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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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형(오른쪽)과 그의 형(왼쪽), 조카(가운데)



최재형, 국권회복을 위해 총을 든 사업가

최재형은 노비 출신으로 1860년 함경북도 경원에서 출생했다. 9살이 되던 해에 극심한 흉년을 견디지 못하고 가족이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했다. 그는 러시아 학교에 다니던 중 가출해 한동안 상선의 선원으로 살았다. 당시 최재형은 ‘표트르 세메노비츠’라는 러시아 이름을 썼다. 17살 때부터 장사를 시작해 돈을 모아 대농장을 경영했다. 또한 군납 회사를 설립하는 등 여러 사업에 잇달아 성공하면서 한인사업가로 명성을 날렸다.

최재형은 연해주 한인을 이끄는 지도자로도 활약했다. 1895년부터 한인촌인 얀치혜남도소의 책임 관리직인 도헌을 맡아 13년을 일했다. 이때는 무엇보다 학교 설립에 힘썼다. 소학교는 물론 고등소학교도 설립해 졸업생 중 우등생 1명을 매년 러시아 각지로 유학 보냈다.

을사조약 체결로 국운이 기울자 최재형은 이범윤과 함께 의병부대를 조직했다. 1908년 4월에는 이범윤, 이위종, 엄인섭, 안중근 등과 함께 의병부대인 동의회를 조직해 총장에 추대되었다. 의병부대 운영자금 대부분은 그의 주머니로부터 나왔다. 하지만 1909년 무렵부터는 의병부대를 이끌고 국내진공작전을 펼치는 대신 계몽운동에 나섰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간되던 『대동공보』가 재정난으로 폐간될 위기에 처하자 이를 인수해 사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연해주에서 한인결사체인 권업회가 출범하면서 총재로 선출되었다. 1919년 3월 연해주에서 출범한 임시정부인 대한국민의회에서는 외교부장에 임명되었다. 곧이어 4월 11일 상하이에서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초대 재무총장에도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대신 항일 빨치산 부대에 비밀리에 무기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1920년 3월니콜라예프스크에서 한러 연합부대가 일본군을 섬멸하는 니항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빌미로 일본이 군대를 증파했다. 일본군은 한인 독립운동을 섬멸할 계획으로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했다. 이때 잡혀 이송 도중인 4월 7일 탈주를 시도했다가 총격을 받아 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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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 이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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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서농장에서 일하는 신흥무관학교 학생들



이회영, 푸른 청춘의 기백으로 몸을 사르다

이회영은 1867년 서울에서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한제국이 기울어갈 무렵 국권회복운동에 뛰어들었다. 1907년 상동학원 학감으로 취임해 교육운동에 힘쓰며 안창호, 양기탁, 이동녕, 신채호 등과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했다. 신민회는 교육과 산업의 진흥에 앞장서면서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는 일을 도모했다.

이회영은 대한제국이 망하자 곧바로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뛰어들었다. 1910년 12월 그를 포함한 여섯 형제와 가족 등 40여 명이 한겨울 삭풍을 뚫고 만주로 망명했다. 이때 이회영의 형제들은 오늘날로 치면 약 600억 원에 달하는 재산을 처분해 독립운동 기지 건설 자금을 마련했다. 이회영은 한인의 자치결사체인 경학사를 조직했고 독립군 양성을 위한 신흥강습소를 세웠다. 신흥강습소는 신흥무관학교로 이름을 바꿔 1920년까지 독립군을 양성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날 무렵 이회영은 중국 관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참여하지 않았다. 6형제 중 막내인 이시영만이 임시정부에 참여해 초대 법무총장에 선출되었다. 이회영은 임시정부가 아니라 독립운동본부를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을규, 이정규, 유자명과 등과 함께 아나키즘운동에 뛰어들었다. 중국 후난성에 이상마을을 건립하는 실험에 참여했고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했다. 또한 중국 아나키스트들과 연대해 상하이에 노동대학을 설립했다. 의열투쟁에도 나섰는데, 신흥무관학교 출신들로 다물단을 조직해 밀정 암살 등의 활동을 펼쳤다. 1930년에는 상하이에서 아나키스트 조직인 남화한인청년연맹을 결성했다.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 일본의 아나키스트들과는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고 산하에 의열투쟁단체인 흑색공포단을 조직했다. 흑색공포단은 톈진에서 군수물자를 적재한 일본 기선을 폭파하고 일본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했다.
중국 대륙을 누비던 이회영의 삶은 마지막까지 치열했다. 그는 만주로 가 일본의 괴뢰정부 ‘만주국’의 전권대사인 무토 노부요시 관동군사령관을 암살해 새로운 독립운동의 기운을 일으키고자 했다. 하지만 밀정의 밀고로 다롄에 도착하자마자 검거되었다. 결국 66세의 ‘청년’ 이회영은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1932년 11월 17일 숨을 거두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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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자금 제공처였던 백산상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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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제



안희제, 민족을 위해 필요한 돈이라면 기꺼이!

안희제는 1885년 경상남도 의령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한제국이 흥망의 기로에 설 무렵인 20대에 상경해 보성전문학교 경제과와 양정의숙 경제과를 다녔다. 재학 중 영남지방 유지들과 교남교육회를 조직해 사립학교 설립에 힘썼다. 동래에 구명학교, 의령에 의산학교와 창남학교를 설립했다.

안희제는 대한제국이 망하자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그는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다시 귀국해 부산에 백산상회를 설립했다. 곧이어 서울, 대구, 안동, 원산은 물론 만주의 펑톈 등지에 지점을 설치했다. 백산상회와 그 지점들은 독립운동의 거점이자 자금 제공처였다.

3·1운동 이후 안희제는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보냈다. 언론 활동에도 뛰어들었다. 『동아일보』의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부산지국장으로도 활동했다. 1926년에는 최남선이 창간한 『시대일보』를 인수, 『중외일보』로 명의를 변경해 발행했다. 부산에서도 유지로서 부산상업회의소 부회장 등을 맡으며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부산고등보통학교의 설립을 추진했고 부산청년회 간부로 활동했다.

1930년대에 들어와 안희제는 만주로 눈을 돌렸다. 그는 사업을 정리하고 만주 동경성 일대에 토지를 구입했다. 그곳에 발해농장을 설립하고 수로를 개설한 후 농가 3백여 호를 유치했다. 1934년 대종교 3세 교주 윤세복을 비롯한 간부들과 대종교 총본사가 동경성으로 옮겨왔다. 안희제는 1911년에 입교한 대종교 지도자였다. 1942년 11월 경찰은 윤세복을 비롯한 21명의 국내외 대종교 지도자들을 일제히 검거했다. 이때 안희제는 고향에 돌아와 있었는데, 곧 경찰에 체포되어 만주 목단강성 경무청으로 이송되었다. 1943년 8월 3일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이 심각해 병보석으로 출감하였으나, 출감 3시간 만에 병원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명문가의 후예 혹은 성공한 사업가로 평생을 안온하게 살 수 있었던 최재형, 이회영, 안희제.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재산을 민족과 독립의 대의를 위해 아낌없이 내놓았다. 하나 밖에 없는 자신의 목숨도 기꺼이 내놓았다. 그들의 치열한 삶은 민족을 위한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그들은 대한사람으로서 한 치의 부끄럼 없는 품격 있는 삶을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