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돌아오지 못한 독립운동가들

돌아오지 못한 독립운동가들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특임교수


돌아오지 못한 독립운동가들


  

1945년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았지만, 독립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미완으로 남은 사건, 해결되지 못한 문제, 기억해야만하는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은 독립운동사를 과거에 머문 역사가 아닌 현재의 문제로 다루며, 오늘도 신문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독립운동 및 일제강점 이슈를 소개한다.




alt

계봉우, 황운정 지사의 유해 봉환(2019.04.22, 국가보훈처 제공)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독립운동가들

독립운동가라 함은 통상 1895년부터 1945년 8월 해방 이전까지 일제의 식민통치에 맞서 한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분들을 말한다. 2019년 4월 현재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15,454명의 독립운동가가 훈·포장을 받았다. 하지만 이 가운데는 중국·일본·미주 등 국외에서 활동하다가 미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시고 이국에서 숨을 거둔 분들이 적지 않다. 그렇다면 이분들의 유해는 해방 후 고국으로 봉환되었을까?

이분들 중에는 해방되기 전 고국으로 유해를 모셔온 경우도 있고, 타국의 공동묘지 등에 묻히거나 돌아가신 분의 유언대로 화장하여 그곳에 뿌려지기도 하였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던 경우에는 해방 이후 민간단체, 국가보훈처, 유족 등에 의해 유해가 고국에 모셔졌다. 그렇지만 유해 소재가 파악되었어도 여러 이유로 모셔오지 못하거나 자료가 발굴되지 않아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해 봉환하지 못하는 일도 있다. 가장 안타까운 경우는 유해 봉환이 너무 늦어져 소재를 파악할 수 없거나, 도시개발로 묘지가 유실되어 도저히 모셔오지 못하는 분들일 것이다.

김좌진은 1930년 1월 공산주의자 박상실에게 암살당한 후 임시로 흑룡강성 해림에 안치되었다. 이후 1933년 부인 오숙근이 일제의 감시를 피해 유해를 수습하여 고향인 충청남도 홍성에 안장하였다. 1936년 2월 다롄의 뤼순감옥에서 순국한 신채호는 “생전에 조국광복을 못 볼진대 왜놈들의 발끝에 채이지 않게 유골을 화장하여 바다에 띄워 달라”고 유언했지만, 그를 기리고자 했던 유족들의 뜻에 따라 어릴 적 살았던 고드미마을에 안장되었다. 1917년 3월 러시아 우수리스크에서 순국한 이상설은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는 유언에 따라 화장한 뒤에 수이푼강에 뿌려졌다.


독립운동가 유해 봉환 현황과 어려움

국외에서 활동하다 미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순국하신 분들의 유해는 모두 485위에 달한다(2017년 12월 기준). 그 가운데 해방 이후 국외에 묻혔던 독립운동가들 유해가 봉환된 것은 2019년 4월 현재 139위 정도로 28.7%에 불과하다.

독립운동가의 첫 유해 봉환은 김구의 주도로 민간분야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결성된 유해봉환추진위원회가 1946년 6월 일본에서 순국한 윤봉길·이봉창·백정기 등 유해 3위를 수습, 효창원에 안장한 것이 시작이다. 그로부터 2년 뒤 1948년 8월 중국으로부터 이동녕·차리석·민병길 등과 곽낙원·김준례·김인 등 여섯 유해가 봉환되었다. 1963년에는 네덜란드에서 이준의 유해가 56년 만에 돌아와 수유리에 안장되었다.

이후 이렇다 할 유해 봉환이 없다가 1975년부터 원호처(국가보훈처 전신)가 유족을 중심으로 독립운동가 유해 봉환 사업을 담당하면서 꾸준히 사업이 이어지고 있다. 이로써 1975년 미국에서 장인환·현순, 일본에서 서상한 등이 봉환되었고, 1980년대 후반에는 중국의 개방화 이후 독립운동가들의 유해 귀환 운동이 활발해졌다. 1990년 10월 중국 동북지방에 안장되었던 이상룡·이승화·이봉희·이광민 등의 유해가 봉환되었다. 1987년 제9차 개헌 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이 천명된 이후, 1993년 8월 국가보훈처는 상하이 만국공묘에 안장되어 있던 박은식·신규식·노백린·김인전·안태국 등 5위의 유해를 봉환하였다. 이후 지금까지도 국외의 독립운동가 유해 봉환 사업은 계속되고 있는데, 2019년 4월 22일, 문재인 대통령의 카자흐스탄 방문을 계기로 그곳에 묻힌 계봉우와 황운정의 유해가 국내로 돌아왔다.

순국하신 곳에 묻혀 소재 파악이 되는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는 러시아의 이위종(상트페테르부르크 우즈벤스크 묘지), 카자흐스탄의 홍범도(크즐오르다), 중국 만주의 나철·김교헌·서일(화룡현 청호대), 고향 용정에 묻힌 윤동주·송몽규(용정 동쪽 외곽의 ‘영국더기’ 동산) 등이다. 이런 경우 현지 한인 동포들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거나 그분들의 이름을 딴 거리가 만들어져 그분들의 뜻을 기리기도 한다.

유해를 찾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 다오.”라고 유언을 남긴 안중근의 유해는 지금까지도 찾지 못하고 있다. 가장 안타까운 경우 중에 하나이다. 그가 순국한 지 120주년이 다 되어 가고 국권이 회복된 지도 70여 년이 지났는데도 말이다. 그렇다고 유해 봉환 노력에 소홀했던 것은 아니었다. 1946년에 이봉창 등의 유해를 모시고 와 효창공원에 안장할 당시, 그의 유해 봉환은 순탄하게 추진되지 못하였다.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는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유해 발굴에 호의적이었다. 그렇지만 국공내전에서 패한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6·25전쟁, 냉전 등으로 중국과의 원만한 교류가 어려워지면서 유해 봉환마저 막히고 말았다. 그나마 1970년대에 중국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던 북한의 주도로 유해 발굴을 벌였고, 1986년에는 대규모 유해 발굴단이 꾸려져 조사가 이뤄졌지만 허사였다.

그 뒤 2006년 남북공동조사단이 안중근 유해 매장지로 유력한 둥산포·원보산·뤼순감옥 박물관 부지 등을 조사하고, 2008년 두 번째로 남북 공동으로 발굴 사업을 진행하였지만 끝내 유해를 찾지 못했다. 남북관계가 다시 해빙무드로 들어선 2018년 8월,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과 공동으로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을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밝혔지만 중국의 협조 등 여러 여건이 아직은 충분치 못하다.

이처럼 정부가 적극 나서서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유해도 찾고 있지만 여의치 않다. 유해의 소재지를 찾지 못하거나 도시개발로 유실된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 상하이에 묻혔던 오영선이나 안중근의 모친과 동생 안정근, 항저우의 공동묘지에 묻힌 김철, 충칭 화상산에 묻힌 송병조·이달, 연해주의 최시형 등은 그 흔적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사회주의자’로 낙인 되어 뒤늦은 1995년에서야 서훈을 받은 이동휘도 그러한 경우이다. 그는 1935년 1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순국한 뒤 그곳의 프토라야 레초카 공원묘지에 묻혔지만 도시개발로 공원묘지와 함께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1950년 6·25전쟁 당시 납북된 김규식·조소앙·유동열 등 독립운동가의 묘소 15위는 다행히 북한에 남아 있다.


독립운동가의 유해 봉환 사업은 단기간에 끝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흔적을 찾을 수 없이 완전히 사라진 경우는 어쩔 수 없다 할지라도 소재 파악이 제대로 안 되었다면 끝까지 파헤쳐야 할 것이다. 독립운동가와 가족들이 지금도 여전히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상 어느 곳에 흩어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 동북지방과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치열한 항일무장투쟁 속에서 숨져간 독립군들의 유해도 찾아 위령지라도 세워야 할 것이다.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유해를 봉환해 올지라도 그곳에 표석이나 기념시설 등을 설치해야 하며, 모셔오지 못하는 경우에는 유실되지 않도록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독립운동의 완성이며 독립운동가들이 꿈꾸었던 근대적 국민국가의 이상과 의미를 현재의 시점에서 다시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 민족의 자존심과 정체성은 더욱 빛날 것이며, 미래지향적 역사 인식과 가치관이 창조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