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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락호 김용환의 진실

파락호 김용환의 진실
    


글 임영대 역사작가


파락호 김용환의 진실


  

김용환은 경상북도 안동에서 제일가는 명가 중 하나인 의성 김씨, 김성일 가문의 종손이다. 명문대가의 후예로 막대한 부와 사회적 지위를 누렸지만, 도박에 빠져 ‘파락호’라는 비난을 샀다. 그러나 이는 배후에서 진행하던 독립운동을 감추기 위한 위장 수단에 불과했다. 김용환은 해방 후 종갓집을 말아먹은 종손으로 쓸쓸하게 숨을 거뒀다. 대한민국은 1995년, 그의 딸 김후웅에게 아버지의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며 그 공을 기렸다




새벽 몽둥이야!

밤새 진행되는 도박판에서 한참 열기가 올랐다. 문전옥답이, 대대로 내려온 가문의 저택이 노름 밑천이 되어 순식간에 사라지기 일쑤였다. 패를 돌릴 때 으뜸패가 손에 들어오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승패가 갈렸다. 오늘은 그에게 운이 없는 날이었다. 기껏 쥔 패는 모조리 최하급이었고, 앞에 쌓아두고 있던 밑천은 전부 다른 사람들 앞으로 옮겨갔다. 마침내 손에 한 푼도 남지 않은 빈털터리가 되자 그는 시원스레 냉수를 들이켠 뒤 호기롭게 외쳤다.


"새벽 몽둥이야!"


다음 순간 손에 몽둥이를 움켜쥔 건장한 사내 20여 명이 방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왔다. 둘러앉아 있던 노름꾼들이 혼비백산한 사이 사내들은 널려 있는 판돈을 모조리 보자기에 쓸어 담아 줄행랑을 쳤다. 패거리를 불러들인 장본인은 느긋하게 자리를 떠나 사라졌다.


"집안 망신이나 시키는 저 난봉꾼 놈!"


판돈을 빼앗긴 노름꾼들이 뒤에서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밤낮으로 노름에 빠져 살면서 대대로 내려온 재산과 사돈댁에서 보내온 딸의 혼수비용까지 말아먹은 저 상대가 바로 학봉 김성일 가문의 종손, 김용환이었기 때문이다.


"집안에 ‘학봉(김성일)’과 ‘난봉’이라는 두 봉황이 나왔으니, 그만하면 충분한 게 아닌가?"


김용환은 한때 의병에도 참가하고 독립자금을 모아 만주로 보내는 활동도 했다. 하지만 일본 경찰에 3번이나 체포된 후로는 활동을 접었다. 그리고 노름에 빠졌다.


당사자가 죽고 나서야 밝혀진 진실

김용환은 유서 깊은 종갓집의 종손으로서 큰 집과 막대한 전답을 물려받았다. 안동 일대에서 열리는 노름판에는 김용환이 빠지지 않았다. 전 재산이 노름판에서 사라지는 일이 수시로 벌어졌다. 차마 종가가 망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던 일가친척들은 몇 차례나 돈을 모아 집과 논밭을 다시 사주었다. 하지만 결과는 매번 같았다. 땅문서는 노름판에서 사라졌고, 심지어 외동딸을 시집보낼 혼수 비용도 남아 있질 않았다. 사돈댁이 장롱을 사라고 보내준 돈조차 그의 손에서 사라졌다. 외동딸은 할머니가 쓰던 낡은 장롱을 가지고 울면서 시집을 갔다. 노름에 빠진 아버지는 딸이 시집가는 날에도 어디론가 사라져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이런 지경이었으니 김용환이 집안을 말아먹은 파락호 소리를 듣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엄청난 반전이 있었다. 도박은 도박 자금으로 위장해 만주에 돈을 보내기 위한 김용환의 술책이었다. 일제를 속이기 위해 연기한 것이다. 독립운동에 나선 것은 사실상 김용환의 가문 전체였다. 김용환의 재종조부(할아버지의 사촌) 김희락은 을미의병으로 싸우다 1896년에 일본군에게 총살당했고, 사촌 동생의 죽음을 눈앞에서 본 김용환의 조부 김흥락은 모든 제자와 일가친척을 데리고 떨쳐 일어섰다. 김흥락의 제자 7백 명 중 독립운동으로 훈장을 받은 사람은 60명. 의성 김씨 문중 전체에서 독립운동가 훈장을 받은 사람은 27명이나 되고, 이중 김흥락이 속한 김성일 직계 혈통에서만 11명이 나왔다. 이런 가문의 후예인 김용환이 진짜 도박에 빠진 난봉꾼일 리 없었다.

김용환의 처가 역시 뒤지지 않았다. 장인 이중업은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가다가 죽었고, 장모 김락은 3·1운동 때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시력을 잃었다. 딸의 장롱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처분할 수 있는 재산이라면 모두 처분해서 만주로 보내고 있던 김용환은 사돈댁이 보낸 딸의 혼수비용도 만주로 보냈다. 딸의 결혼식 날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도 첩보를 입수한 일본 경찰에 구금되어 갇혀 있던 탓이었다.


"자네, 이제는 만주에 돈 보낸 사실을 밝혀도 되지 않겠나?"

"선비로서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 무엇을 드러낸단 말인가."


끝내 그 많던 재산은 사라지고, 하나뿐인 딸에게도 미움을 받았다. 해방이 왔을 때 김용환은 이미 주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당하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해방 이듬해, 모든 진실을 알고 있던 독립운동 동지 하중환(河中煥)이 찾아와 사실을 밝히라고 설득했으나 김용환은 임종의 자리에서조차 굳게 입을 다물었다. 선비로서 살아가야 하는 삶을 살았을 뿐인 노인의 당당한 마지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