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터전:미주 편

통합과 새 진로를 위한
1908년의 미주 한인사회

통합과 새 진로를 위한<BR />1908년의 미주 한인사회
    


글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


통합과 새 진로를 위한

1908년의 미주 한인사회


  

1908년 미주 한인사회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일이 있었다. 하나는 해외 최초의 의열투쟁인 장인환·전명운의 스티븐스 처단의거이고, 또 하나는 독립운동의 방향과 방략을 논의한 북미애국동지대표회다. 이들 사건은 일본의 통감 정치로 풍전등화의 대한제국을 직시한 미주 한인들의 위기의식 속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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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스를 처단한 장인환(오른쪽)과 전명운(왼쪽)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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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애국동지대표회를 보도한 덴버 『데일리 뉴스』(1908.07.13.)



장인환·전명운 의사의 스티븐스 처단의거

대한제국을 병합할 목적으로 일본 정부의 특별 사절로 워싱턴에 파견된 대한제국 외교고문 스티븐스(D. W. Stevens)는 1908년 3월 20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직후 신문기자들과 회견을 가졌다. 회견 요지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보호한 후로 한국에 유익한 일이 많아졌고, 농민들과 백성들이 대한제국 정부의 학대를 받지 않아 일본의 조치를 환영한다는 것이다. 회견 내용은 3월 21일자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에 크게 보도되었다.

일본의 보호국화를 정당화하고 일본의 대한정책을 미화한 스티븐스의 망언 소식에 샌프란시스코 한인들은 분노했다. 3월 22일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는 합동으로 즉각 임시공동회를 개최하고 대책을 논의해 대동보국회에서 이학현·문양목을, 공립협회에서 정재관·최유섭(최정익의 이명)을 한인 대표로 선정했다. 그리고 스티븐스가 투숙한 페어몬트호텔로 찾아가 신문에 보도된 망언의 해명과 정정을 요구했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오히려 대한제국 정부의 잘못된 정책들을 거론하며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화 하지 않았더라면 러시아가 그 자리를 대신했을 것이라고 극언했다. 4인 대표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호텔 로비 구석에서 그를 집단 구타하고 돌아와 회원들에게 전말을 알렸다.

모든 사실을 지켜보고 있었던 장인환과 전명운은 그 다음 날인 3월 23일 오전 9시 30분경 워싱턴DC행 대륙 횡단 철도를 타기 위해 일본총영사 고이케 초조(小池張造)와 함께 샌프란시스코의 페리부두 앞에 도착한 스티븐스를 처단했다. 두 사람이 사전에 약속하고 나간 것은 아니었지만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각에 페리부두에서 스티븐스를 기다리다 거의 동시에 행동하였다. 먼저 전명운이 숨겨놓은 권총을 꺼내 발사했으나 불발하자 달려들어 격투가 일어났다. 그 뒤를 이어 장인환이 권총을 쏘아 첫발은 스티븐스와 엉켜져 있던 전명운의 어깨를 관통했고 다음 2발은 스티븐스의 오른편 어깨뼈와 복부를 명중시켰다. 두 사람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샌프란시스코 경찰법원에 기소되었고 스티븐스는 긴급 후송되었으나 3월 25일 사망했다.

의거 소식을 전해 들은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는 3월 23일 밤 9시 30분 한인교회에서 제2차 임시공동회를 개최했다. 회의 결과 법정투쟁을 대비한 재판후원회를 결성하기로 하고 재판정권위원으로 최유섭·김명일·정재관·이일(이상 공립협회), 문양목·이용하·백일규(이상 대동보국회) 등 7인을 선정했다. 재무로는 문양목과 김명일이 선임되었다. 그리고 재판을 돕기 위한 대대적인 의연금 모금 활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했다.

두 의사의 희생적인 의거의 영향력은 전 미주는 물론 일본과 중국까지 미쳤다. 1908년 3월부터 9월까지 상항 한인 임시공동회가 보고한 재정결산서를 보면 북미 3,919달러, 하와이 1,961달러, 중국 103달러, 일본 47달러 등 의연금 수입이 총 6,052달러였다. 재정 지출은 변호사비 2,000달러 등을 포함해 총 3,347달러였는데 이는 총수입의 55%였다. 당시 공립협회나 대동보국회의 1년 예산이 약 1,600∼2,000달러인 것과 비교할 때 의연금 모금 운동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짐작된다. 다음으로 대동보국회와 공립협회가 임시공동회를 개최해 통일된 활동에 자극받아 두 단체의 여성들이 합동으로 한국부인회를 설립해 후원 활동을 전개했다.

장인환·전명운 의거는 풍전등화의 국권을 지키는데 너와 내가 따로 없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이러한 강렬한 민족의식은 미주 한인사회의 통합을 촉진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두 의사에 대한 재판은 아일랜드계 미국인 변호사 코그란(Nathan C. Coghlan), 바렛(John J. Barret), 페랄(Robert Ferral)이 맡았다. 이들의 적극적인 변호에 힘입어 전명운은 1908년 6월 27일 증거불충분으로 가석방되었다. 장인환은 동년 12월 23일 사형을 면한 대신 ‘애국적 환상에 의한 2급 살인죄’로 25년 금고형을 받아 샌쿠엔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10년 동안 모범수로 생활한 데다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의 적극적인 가석방운동에 힘입어 1919년 1월 출옥했다.


북미애국동지대표회의 개최

장인환·전명운 의거의 재판이 한창 진행될 때인 1908년 7월 11일부터 15일까지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북미애국동지대표회가 개최되었다. 원래 이 대회는 의거가 있기 전, 1908년 1월 박용만과 이관수 등 덴버의 한인들이 계획한 것으로 당초 그해 6월 10일에 예정되어 있었다. 6월 10일은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가 덴버에서 개최되는 날이었다. 민주당 전당대회를 기회로 한국 독립문제를 만방에 알리고 한국 독립을 지키기 위한 한인 단체들의 규합과 향후 방략을 논의할 목적으로 대회를 준비한 것이다.

그런데 대회 개최는 순조롭지 않았다. 무엇보다 참석해야 할 한인들의 참가가 여의치 않았다. 그리하여 일시 중단되었으나, 마침내 7월 11일부터 5일간 8차에 걸쳐 회의를 개최하게 되었다. 대회의 주 의제는 각 지방의 한인 단체들의 통합과 조국 독립운동을 위한 방략 수립이었다. 주요 참석자는 박용만, 이관용, 윤병구, 이승만, 김헌식 등 36명이다. 한인들뿐만 아니라 콜로라도주 하원의원 크랜스톤(Earl M. Cranston)과 와론 등 저명 미국인들도 참석해 연설하였다.

북미애국동지대표회는 먼저 미주 한인사회에 통합의 기운을 불러일으켜 안 그래도 두 의사의 의거로 확산된 통합 열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이는 그 이듬해 최초의 통합단체인 국민회 출범으로 이어졌다. 다음으로 1909년 6월 박용만의 주도로 네브래스카에 해외 한인 최초의 군사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 설립에 영향을 주었다. 이 같은 군사학교 설립은 전 미주 한인사회뿐만 아니라 만주와 연해주의 해외 한인사회에 강력한 항일 무장투쟁 의식을 고조시킨 매우 의미 있는 성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