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로 보는 세계사

왕권신수설과 청교도 혁명

왕권신수설과 청교도 혁명
    


글 고종환 아주대학교 외래교수


왕권신수설과 청교도 혁명


  

왕권신수설이란 국왕의 권한은 인간이 아닌 신(神)으로부터 나온다는 정치이론으로유럽 절대주의 시대를 뒷받침해 온 정치사상이다. 영국 스튜어트 왕가의 찰스 1세도 바로이 왕권신수설의 신봉자였다. 신의 권한을 부여받은 그는 마치 자신이 신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했다.의회와 소통하지 않았으며 모든 것을 독단적으로 결정했다.


alt

          사냥 나온 찰스 1세1635, 안토니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루브르 박물관

alt

말 조련사와 함께한 찰스 1세1633, 안토니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루브르 박물관



동물도 인정한 왕권신수설?

왕권신수설에 의하면 군주는 오로지 신에게만 책임이 있으므로 백성이나 신하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책임도 질 필요가 없었다. 또한 왕권은 신이 내린 것으로서 언제나 법 위에 있으니, 왕은 법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찰스 1세가 의회를 무시하고 오만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신’의 권한을 가진 자신이 평범한 일반인들과 구태여 의논을 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인간은 물론 길거리에 지나가는 동물조차도 자신을 신으로 모시며 고개 숙이고 경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루벤스의 제자, 화가 안토니 반 다이크는 이러한 찰스 1세의 오만함과 불통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반 다이크는 찰스 1세를 그리면서 흔히 국왕의 권력을 상징하는 왕관이나 망토 등의 화려한 장식 대신 특이하게 백마를 그려 넣었다. 두 그림 모두 찰스 1세와 함께 나란히 백마가 등장한다. 찰스 1세는 그림의 중심을 차지하며 기세등등하고 호방한 모습으로 표현된다. 백마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마부는 찰스 1세를 올려다본다. 마부와 백마 모두 찰스 1세를 경배하고 있는 것이다. 대개 군주의 초상화에 등장하는 말이나 사냥개는 그 주인의 뛰어난 혈통과 신분을 암시하는데, 그중에서도 백마는 최고의 혈통을 상징한다. 반 다이크는 좋은 혈통의 백마마저도 고개를 숙인 그림을 통해 모든 인간과 동물들이 자신을 경배해야 한다는 찰스 1세의 그릇된 믿음을 풍자하고자 했다.

청교도 혁명의 원인으로 전쟁과 세금 증세, 의회와의 대립 등 다양한 요인이 꼽히지만, 왕권신수설을 신봉한 군주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음을 부인할 순 없다. 물론 근본적 원인을 따지자면 찰스 1세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대영제국의 토대를 마련한 엘리자베스 1세가 왕위를 이을 후손 없이 죽자 스코틀랜드 왕가 출신이 대를 잇는다. 그가 찰스 1세의 아버지인 제임스 1세다. 당시 영국은 의회가 권력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의회 승인 없이 국왕이 독단적으로 입법과 증세를 결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제임스 1세 또한 왕권신수설을 믿으며 의회를 무시했다.그리고 찰스 1세는 부친보다 더 깊게 왕권신수설에 빠져들며 독재의 길을 걸었다.


청교도 혁명을 촉발한 세금

찰스 1세의 독단적인 정치활동에 맞서던 반대파는 1649년 1월 30일 마침내 런던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찰스 1세를 공개 처형했다. 이를 청교도 혁명이라고 한다. 찰스 1세와 대립한 의회파가 영국의 칼뱅파인 청교도였기 때문에 청교도 혁명이라 불리게 됐다. 처형장에서 찰스 1세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나는 이제 부패한 나라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나라로 간다. 이 세상의 어지러움이여, 안녕히.”


그는 마지막까지 왕권신수설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청교도 혁명은 왜 일어났을까? 1628년, 찰스 1세는 에스파냐 등 주변 나라와 전쟁을 지속하면서 전쟁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많은 세금을 부과했다. 의회는 강제 과세에 대항하고 국민 권리를 수호하고자 하원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강제 과세 제한과 국민의 각종 자유권 보장을 요구하는 ‘권리청원’을 국왕에게 제출했다. 권리청원은 주권을 다시 의회로 옮겨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찰스 1세는 일단 동의의 제스처를 취했지만 다음 해인 1629년에 갑자기 의회를 해산하고 9명의 의원을 체포했다.

당시 영국은 중산층 계급의 성장과 함께 절대 왕정을 공격하는 청교도들이 하원에서 큰 세력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찰스 1세의 독재에 대한 불만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찰스 1세와 의회의 관계는 점점 파국으로 치달았다. 결국 1642년 8월, 국왕을 따르는 왕당파와 반대파인 의회파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초기 왕당파가 우세를 보였으나 젠트리 출신 올리버 크롬웰의 철기군이 맹활약하면서 의회파가 승리를 거머쥐었다. 의회파는 찰스 1세를 생포한다. 여기까지가 1차 전쟁이다. 그러나 전쟁 후 의회파는 국왕과의 화해를 원하는 장로파와 끝까지 항전을 주장하는 독립파로 나뉘어 갈등했다. 이 사이 감금되어 있던 왕은 탈출을 시도, 스코틀랜드와 조약을 맺고 1648년 2차 전쟁을 일으켰지만 결과는 전과 다르지 않았다. 다시 체포된 찰스 1세는 1649년 처형당했다.




고종환

한국 프랑스문화학회의 재무이사이자, 아주대학교와 경상대학교 외래교수. 프랑스 문화와 예술, 서양연극사, 광고이미지 등을 강의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는 『한권으로 읽는 연극의 역사』와 『오페라로 배우는 역사와 문화』, 『글로벌 다문화교육』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