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광복을 눈앞에 두고 옥사 순국한
한인애국단원 유상근

광복을 눈앞에 두고 옥사 순국한<BR />한인애국단원 유상근
    


글 학예실


광복을 눈앞에 두고 옥사 순국한

한인애국단원 유상근


  

이봉창과 윤봉길이 그랬던 것처럼 유상근도 한인애국단원으로서 제 목숨을 바칠 거사를 준비했다. 그러나 계획했던 거사는 끝내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고, 광복을 하루 앞둔 날 옥중에서 순국했다. 유상근의 삶은 비극적이었지만, 그의 독립운동은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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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를 만나 한인애국단원이 되다

유상근은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나, 어려서 한학을 배우고 통천공립보통학교에서 4년간 수학하였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지며 만주 여러 곳으로 거처를 옮기는데, 화룡현 이모부 댁에 머물다가 상하이로 건너간 것으로 전해진다.

상하이 이주 후 취직을 도와줄 사람을 만나기 위해 인성학교를 찾게 되었다. 인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신기섭을 통해 대한교민단을 알게 되고 그 과정에서 김구를 만났다. 이후 김구가 취직을 도왔으나 형편이 나아지지 않자 홍콩 등지를 돌며 인삼장사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2년 1월 유상근은 김구의 지시를 받아 상하이로 돌아오고, 교민들의 치안을 담당하는 대한교민단 의경대 활동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같은 해 2월 27일 의경대 활동을 그만두는데, 이는 유상근이 2월 24일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거사를 준비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한인애국단 거사에 참여하다

1932년 일제의 만주 침략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중국 정부는 국제연맹에 소송을 제기하여 해결하려 하였고, 국제연맹은 같은 해 2월부터 만주로 조사단을 파견할 예정이었다. 김구는 조사단을 맞이하는 일본 고위 관료를 처단할 계획을 수립하고, 유상근과 최흥식을 다렌으로 보내 의거를 준비하였다. 하지만 거사 2일 전 최흥식이 김구에게 보낸 서신이 발각되는 바람에 유상근과 최흥식 모두 일제에 붙잡히고 말았다. 일제는 한인애국단이 국제연맹 조사단을 공격하려 한 것으로 왜곡 보도하였고, 이에 김구는 「한인애국단선언」을 발표하며 유상근을 비롯한 한인애국단의 목적이 국제연맹 조사단 공격이 아니라 일본 고위관료 처단에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 유상근은 다렌 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후 뤼순감옥으로 이감되었다. 그리고 광복을 하루 앞둔 1945년 8월 14일 순국하고 만다. 이에 정부는 유상근의 공적을 기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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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근 자필 이력서한인애국단에 입단하며 쓴 자필 이력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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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와 함께 찍은 한인애국단 입단 기념사진(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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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 韓民』에 실린 유상근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