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그날

독립운동을 소생시킨
임시정부의 승부수

독립운동을 소생시킨<BR />임시정부의 승부수
    


글 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


독립운동을 소생시킨

임시정부의 승부수


  

매월 대한민국의 광복과 관련된핵심사건을 선정해 그 치열했던역사의 순간을 재구성하고자 한다.다시 만난 그날, 이번 달에는의로운 목숨을 바쳐 위기에 빠진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구하고한국인의 독립정신과 저항 의식을전 세계에 알린 ‘한인애국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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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앞에 선 이봉창(1931.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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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의거 이후 일본 동경 경시청 앞에서 의거현장을 검증하는 일본 경찰



김구, 임시정부 문지기에서 독립운동 간판으로


“몸뚱이와 그림자만 벗하는 신세로 잠은 정청에서 자고 식사는 직업을 가진 동포들의 집에 다니며 걸식하고 지내니 거지도 상거지였다.” (백범일지)


1930년대 초, 상하이 임시정부는 문을 닫을 판국이었다. 1920년대 극심한 좌우 갈등을 겪으며 몇몇 인사들이 나가버렸고, 살림 또한 어려워져 청사 월세도 내지 못했다. 당시 임시정부 국무위원이었던 김구는 텅 빈 보경리 청사에서 어떻게 해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되살릴 수 있을지 고민을 거듭했다.

1931년 임시정부 국무회의는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특무공작’에 나서기로 결의했다. 일제의 만행에 맞서 그 원흉을 암살하고 침략 기지를 파괴하는 방법으로 독립정신 및 저항 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한 것이다. 특무공작의 전권은 김구가 맡았다.

어떤 일이든 자금이 있어야 굴러가는 법. 백범은 우선 미국·하와이·멕시코·쿠바 등지의 동포들에게 편지를 써서 성금을 요청했다. 미주 동포들은 임시정부가 미덥지 않았으나 김구가 끈질기게 편지를 보내며 어려운 사정을 알리자 마음을 열고 돈을 모아주었다.

김구는 모인 성금을 가지고 ‘한인애국단’을 조직했다.1931년 12월 13일 김구는 단원 이봉창과 함께 안공근의 집에서 선서식을 가졌다. 이는 한인애국단의 실질적 출범이나 다름없었다. 이봉창에게 중국 측 병기창에서 구한 폭탄 2개와 약간의 돈을 주었다. 이윽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봉창을 바라보는 김구의 표정이 처연했다. 이봉창이 웃으며 말했다.


“저는 영원한 쾌락을 향유하러 떠나는 터이니 우리 기쁜 얼굴로 이 사진을 찍읍시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은 도쿄 한복판에서 일왕에게 폭탄을 투척했다. 계획했던 폭살에는 실패했지만 세상을 놀라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4월 29일에는 윤봉길이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열린 일왕 탄생 기념식 단상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 시라카와 요시노리 일본 해군대장을 포함해 침략의 원흉들이 쓰러졌다. 잇따른 폭탄투척에 일제는 간담이 서늘했다.

한인애국단 수장 김구는 일본 외무성·일본군·사령부·조선총독부의 공동현상금 60만 원이 걸린 귀한 몸이 되었다. 임시정부 문지기를 자처했던 그는 한인애국단을 계기로 우리 독립운동의 간판으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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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애국단의 활동을 기록한 『도왜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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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의 도시락 폭탄



중국인의 마음을 돌린 한인애국단

백범 김구와 임시정부가 한인애국단을 조직한 데는 일제의 이간질로 한중 간 민족감정이 악화한 사정도 크게 작용했다.

1931년 5월 중국 지린성 창춘 만보산에서 수로개설 문제를 둘러싸고 한인들과 중국 농민들 사이에 분규가 일어났다. 7월 1일 중국 농민 수백 명이 한인이 개설한 수로를 파괴하자 일본 영사 경찰은 신민을 보호한다며 출동해 발포했다. 이른바 ‘만보산 사건’이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만주 침략의 구실을 찾던 일제는 마치 한인들이 큰 피해를 입은 양 허위보도 했다. 중국 당국이 만주에 사는 한인들을 박해하고 쫓아낸다는 헛소문까지 퍼뜨렸다. 일제의 이간질에 국내에서도 소요가 일어났다. 전국 방방곡곡 불이 났다. 한국에 있는 수많은 중국인 상점과 가옥들이 습격당하고 불에 탔다. 이 과정에서 100여 명이 넘는 화교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특이한 점은 평양에서만 94명이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일제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이 벌인 짓이었다.

조선총독부는 기다렸다는 듯 한국에 거주하는 중국인의 피해 상황을 상세히 밝혔다. 이에 따라 중국에서도 반한(反韓) 감정이 들끓었다. 상하이 전차 및 버스의 한국인 검표원들이 중국 노동자들에게 폭행을 당했다. 일본이 의도했던 대로 한일 양국의 민족감정은 극악으로 치달았다.

만주는 상황이 더 나빴다. 일본 관동군은 조선인 보호를 명분으로 군사행동에 나섰다. 우선 9월 18일 봉천(현재 선양) 교외의 유조구에서 남만주 철도 일부를 폭파하고 중국군의 소행인 것처럼 일을 꾸몄다. 일본은 대대적인 공세를 벌인 끝에 결국 만주 전역을 장악했다. 만주사변이었다.

일제가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를 내세워 만주국을 건설하는 동안 동북 군벌 장학량의 군대는 뿔뿔이 흩어져 산적이 되거나 유격전을 펼쳤다. 그들은 만주 일대 조선인들에게 분풀이를 했다. 이듬해 초까지 400여 명을 사살하고 곳곳에서 방화와 약탈을 저질렀다. 일본은 한국인 피해 상황을 선전하며 계속해서 이간질에 열을 올렸다.한국과 중국 간의 관계가 나빠지자 중국에서 활동하는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곤경에 빠졌다. 중국 당국의 협조 없이는 무장투쟁도, 대중조직도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을 지속하려면 일제의 야욕을 응징하는 한편 중국인들을 동지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김구와 임시정부가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암살과 파괴 등의 특무공작을 펼친 이유다. 1932년 이봉창 의거가 일어나자 과연 중국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일제의 만주침략에 분노하고 있던 중국인들은 의거에 흥분했다. 국민당 기관지인 『민국일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한국인 이봉창이 일왕을 저격했으나 불행히도 적중하지 못했다.”


불행부중(不幸不中). 불행히도 적중하지 못했다는 제목은 유행처럼 번져나가 여러 신문사에서 사용했다. 용감한 한국인의 의거가 흐뭇하면서도 성공하지 못해 애석한 중국인의 심중을 대변한 말이었다. 한국과 한국인을 바라보는 중국인의 눈길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 아니겠는가.

반면 일제는 분노했다. ‘천황폐하’에 위해를 가하는 것도 모자라 공개적으로 모욕하다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상하이 주둔 일본군이 움직였다. 『민국일보』를 비롯해 ‘불행부중’의 제목을 쓴 신문사들을 습격했다. 중국의 장제스 정부도 이들 신문에 폐쇄조치를 내렸다. 당시 그는 공산당 척결이 급선무라고 생각했으므로 일본과는 가급적 잘 지내려고 했다. 그럼에도 일본군은 기어이 군사행동에 나섰다. 일본 해군은 만주를 손에 넣은 육군과의 경쟁에서 밀린다고 여겼다. 그들은 상하이 침공을 계획하고 억지 명분을 만들었다. 중국 신문의 이봉창 의거 보도를 트집 잡는 것에 더해 일본인 승려 피살 사건까지 조작했다. 그리고 1월 28일, 10만 병력과 비행대를 동원해 상하이로 갔다. 이것이 바로 ‘상하이사변’이다. 일본군은 민간인 거주지를 무차별적으로 폭격하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중국군 30만 명이 약 1개월간 맞서 싸웠으나 버티지 못하고 물러났다. 상하이가 일본군에 점령당한 상태에서 서구 국가들의 중재로 협상이 이뤄졌다. 일왕 탄생 기념일인 4월 29일에 정전협정을 조인했다.

이날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열린 행사는 승전 축하 잔치이기도 했다. 일본인들은 주최 측의 지시로 도시락과 물통, 국기를 준비하여 행사에 참석했다. 중국인들로서는 자존심이 무척 상했을 터였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윤봉길이 물통 폭탄을 터뜨려 침략의 원흉을 응징한 것이다. 얼마나 통쾌했겠는가.

사실 의거에 쓰인 물통 폭탄은 중국 측 병기창에서 만든 것이었다. 김구는 행사 준비물 공고를 보고 물통 폭탄과 도시락 폭탄을 고안했다. 제작은 지난번처럼 병기창에 의뢰했다. 중국 측은 이봉창 의거 당시 폭탄의 위력이 약해 실패한 전례를 떠올렸다. 그들은 상하이 패전의 치욕을 갚기 위해서라도 이번에는 강력한 폭탄을 만들어 한국인의 거사를 돕고자 했다. 폭탄 제작을 마친 병기창에서는 폭탄 실험에 김구를 초빙해 참관토록 했다. 실험은 만족스러웠다.

윤봉길 의거로 일본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등이 죽자 중국 지도자 장제스도 기뻐했다. 그는 중국 군관학교 순회강연에서 윤봉길을 이렇게 격찬했다.


“중국군 30만 명이 못한 일을 한국 젊은이가 혼자 해냈다.”


장제스는 본래 한국의 독립운동에 관심이 없었으나 목숨까지 던지는 한인애국단의 활동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그렇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국외 독립운동은 바야흐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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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인애국단 이봉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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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애국단 윤봉길                                                        



활기를 되찾은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한인애국단 활동은 중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우리나라의 존재감을 떨쳤다. 한국인들에게는 독립정신과 저항의식을 일깨웠고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승리에 대한 열정과 자신감을 키워주었다. 미주 동포사회는 흥분의 도가니였다. 해외에서 임시정부로 성금이 답지했다. 중국 민간단체들도 도움을 보탰다. 청사 월세도 못내 독촉에 시달리던 임시정부로선 숨통이 트인 셈이다.

한인애국단 활동은 중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우리나라의 존재감을 떨쳤다. 한국인들에게는 독립정신과 저항의식을 일깨웠고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승리에 대한 열정과 자신감을 키워주었다. 미주 동포사회는 흥분의 도가니였다. 해외에서 임시정부로 성금이 답지했다. 중국 민간단체들도 도움을 보탰다. 청사 월세도 못내 독촉에 시달리던 임시정부로선 숨통이 트인 셈이다.

일제는 중국 내 점령지에서 독립운동가 색출에 혈안이 되었다. 도산 안창호를 비롯해 많은 독립운동가가 붙잡혀 국내로 송환되었다. 임시정부도 쫓기듯 상하이를 떠나 대장정에 돌입했다. 항저우·난징·우한·창사·광저우·류저우·치장을 거쳐 1940년 충칭에 안착할 때까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이 이어졌다.

장제스는 국민당 정부에 김구를 보호하라는 특별지시를 내렸다. 이후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이 근거지를 옮길 때마다 중국 국민당 정부에서 차량과 숙식을 제공했다. 1933년 5월 김구는 난징에서 장제스를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일제의 대륙 침략 교량을 (우리가) 파괴할 테니 충분한 자금을 대달라”고 요청했다. 일본은 한중 공동의 적이므로 한인애국단을 활용할 수 있는 돈줄이 돼달라는 것이었다. 장제스는 특무공작도 좋지만 앞으로 군인이 필요할 것이라며 한국인 군관 양성을 제안했다. 김구는 그의 제안을 수락하고 중국중앙군관학교 뤄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을 만들기로 합의했다. 임시정부는 만주에 사람을 파견해 옛 독립군들과 접촉했다. 지청천·이범석·오광선·김창환 등이 부하들을 이끌고 합류했다. 중국 관내의 조선 청년들도 끌어 모았다. 독립운동의 차세대 주역들에게 배움과 훈련 기회를 마련해준 것이다.

임시정부는 인재를 양성하고 통합을 일구며 다음 시대를 열어갔다. 한인애국단이 목숨 바쳐 한국 독립운동을 소생시키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양손에 폭탄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이봉창 의사. 태극기를 배경으로 앞을 지긋이 바라보는 윤봉길 의사. 빛바랜 사진 속의 그 웃음, 그 눈빛이 시리도록 눈에 밟히는 이유다.




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 서강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칼럼 ‘사극 속 역사인물’을 연재하고 팟캐스트 ‘역사채널 권경률’을 진행한다. 저서로는 『조선을 새롭게 하라』,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 등을 출간했으며, 영상물 『시시콜콜 한국사 어워즈』도 선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