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 숨은 역사

성곽의 꽃 건축의 백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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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김초록 여행칼럼니스트


성곽의 꽃 건축의 백미 

-수원 화성-




1797년 정조는 완공된 수원성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참으로 아름답고 장대하다. 다만 사치스러워 보일까 두려워한다. 미려한 아름다움은 적에게 위엄을 보여준다.” 수원 화성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정조와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이 아름답고 수려한 성곽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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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고함이 엿보이는 팔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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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사태를 알리는 역할을 하던 봉수대. 일종의 통신 시설이다



과학과 실학이 녹아든 화성

화성은 수원 도심 한복판에 솟아난 팔달산을 중심으로 5.7㎞에 걸쳐있다. 대개 위압감과 단절, 부조화를 보여주는 여타 성들과는 달리 화성은 어디서 보나 주변 지형과 조화로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화성을 한 바퀴 돌아보는 데는 3시간 남짓이 걸린다. 출입구인 4개 성문, 팔달문·화서문·장안문·창룡문이 있고 포루와 돈대·노대·수문·암문·적대·치성·공심돈·봉돈·장대 등 다양한 구조물이 적절히 배치돼 있다. 과학적으로 지어진 이들 구조물은 적의 공격을 효율적으로 방어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성곽길에 있는 포루(동일포루, 동포루 등)는 적의 공격에 대비해 화포를 감추고 위와 아래에서 한꺼번에 쏘도록 설계됐다. 성안을 이동하는 아군의 동향을 적이 알지 못하도록 하는 대기시설이다. 화성에는 모두 6개의 포루가 있으며 역할은 거의 같다.

봉돈은 봉화를 올리는 통신 시설이다. 성벽 일부를 밖으로 빼내고 성벽보다 더 높게 다섯 개의 커다란 화두(굴뚝)를 두었다. 화성 봉돈은 현존하는 봉화 시설 중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낮에는 연기를 피우고 밤에는 불빛으로 급한 일을 전했다. 5개 화두 중 평소에는 1개만 사용하다가 적이 나타나면 2개, 경계에 접근하면 3개, 경계를 침범하면 4개, 적과 접전 시에는 5개의 봉화를 올려 비상사태를 알렸다고 한다.

출입구인 창룡문은 화성의 동쪽 문으로 규모와 형식이 화성의 서쪽 문인 화서문과 거의 비슷하다. 구조는 안과 밖이 이중인 무지개문(일명 옹성)으로 구축돼 있다. 옹성은 성문에 접근한 적군을 뒤쪽에서 공격하기 위해 성문 앞에 한 겹 더 성문을 쌓아 이중으로 지킬 수 있도록 한 시설이다.

팔달문(보물 제402호)은 화성의 남쪽, 장안문의 반대쪽에 있는 문이다. 가지런히 쌓은 축대 위에 날아갈 듯한 2층 지붕의 누각을 올려서 만들었다. 나지막한 단층 지붕들이 맞닿은 곳, 높은 석축 위에 세운 누각은 웅장한 자태로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팔달문을 둘러본 다음 야트막한 성곽길을 따라 서북쪽으로 가면 수원 화성의 하이라이트와도 같은 서장대(화성장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서장대는 동쪽의 동장재(연무대)와 함께 그 당시 군사들을 지휘하던 곳이다. 정조대왕이 사도세자의 능인 화산릉에 참배하러 왔다 이곳에서 직접 군사훈련과 불꽃놀이를 참관했다고 전해진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누각은 사방을 조망할 수 있도록 벽을 설치하지 않았으며 뒤쪽에는 기와를 써서 조형미를 살렸다.

서장대에서 서북각루를 지나면 이내 화서문(보물 제403호)에 이른다. 석축으로 된 무지개 모양의 문 위에 단층 문루가 세워져 있다. 팔달문이나 장안문과는 달리 문 전면에 벽돌로 쌓은 반월형 옹성이 터진 모양으로 설치돼 있다. 문루 안 중앙에는 마루를 깔았으며 팔작지붕을 더해 우아한 멋을 더했다. 장안문은 위풍당당한 장수의 모습을 닮았다. 화성의 북쪽 문으로 사실상 화성의 정문이나 다름없다. 서울의 숭례문보다 크고 형태는 팔달문과 흡사하다. 장안문 한가운데 나 있는 옹성에 구멍 다섯 개가 뚫린 일종의 물탱크를 설치해 적이 성문에 불을 놓는 것을 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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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연 위로 보이는 화성 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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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3·1운동이 시작되었던 방화수류정



수원 독립운동의 뿌리

화성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개천, 수원천이 그 안을 관통하고 있다. 개천의 북쪽 수문인 화홍문은 동쪽 언덕 위에 있는 정자(방화수류정)와 어우러져 근사한 경관을 만들어낸다. 화홍문은 7개의 홍예문을 내고 그 위에 2층 누각을 올린 형태다. 수문 위로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통로를 만들어 두었으며, 화홍문 좌우 팔각기둥에는 해태상이 앉아 있다.

방화수류정(訪華隨柳亭). 꽃을 찾고 버드나무를 따라 노닌다는 뜻이다. 당대 명문장가였던 척제 이서구 선생이 상량문을 쓰고, 송하 조윤형 선생이 현판을 썼다. 정자 안 북쪽에는 국왕과 군신들의 자리를 배치하고, 남쪽으로는 일반 사람들의 술상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게 했다. 방화수류정의 아름다움은 화성 건축 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곳에 이르면 산과 들이 만나고 물이 돌아 흘러 대천에 이르니 여기야말로 동북 모퉁이의 요해처”


방화수류정을 표현한 말이다. 이곳에 올라서면 멀리 팔달산이 한눈에 들어오고, ‘용연(龍淵)’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연못이 내려다보인다.

방화수류정은 수원 3·1운동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1919년 3월 1일 오후 8시경, 이곳에서 700m 정도 떨어진 봉수대로 수원면 사람들이 모였다. 횃불을 밝히고 독립만세를 외치기 위함이었다. 횃불 함성은 방화수류정 일대를 뜨겁게 달구었다. 기록에 의하면 바로 옆 용연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불빛들로 인해 마치 용이 꿈틀거리듯 일렁거렸다고 한다. 이 횃불 행렬은 3·1운동 최초로 등장한 야간 ‘불꽃 시위’였다. 원래는 수원면 삼일학당(현 삼일공업고등학교) 교정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방화수류정-북문(장안문)-종로 네거리-남문(팔달문)의 순서로 거리 행진을 펼칠 예정이었지만 일본에 발각되는 바람에 급히 횃불 시위로 바뀐 것이라는 기록도 있다. 방화수류정 횃불 시위는 수원 지역 학교 교사와 소작농, 20세 안팎의 청년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네들은 팔달산 서장대와 연무대로 몰려가 만세를 불렀다. 운동을 주도한 교사와 학생들은 일본 경찰에게 붙들려갔고 취조 과정에서 수원 만세운동을 처음부터 계획한 인물이 민족대표 48인 중 한 명인 김세환(1889~1945)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원면 삼일여학교 학감이었던 김세환은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준 남다른 교육운동가였다.

한편 수원 독립운동사에서 삼일학당은 산 역사나 다름없다. 1903년 5월 7일 삼일학당은 수원 보시동(현 북수동) 작은 초가집 교회로 시작했다. 일제로부터 교과서를 빼앗기고, 3·1운동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학교 이름을 ‘삼일(三一)’로 바꾸라고 탄압받았다. 폐교 위기까지 겪은 우여곡절 많은 근대 교육기관이다. 삼일학교를 설립한 수원 출신 독립운동가 임면수(1874~1930)는 말했다.


“삼일학원이 어서어서 알아야 한다. 우리가 너무도 모른다. 어서 배워서 알아야 한다. 국가 독립을 위한 일꾼이 되어야 한다.” (삼일학교 80년사)


임면수 선생은 1907년 수원 지역 국채보상운동을 이끈 주인공이다. 그는 구한말 국권을 되찾으려는 일념으로 독립협회·상동청년학원·신민회 등 애국 단체와 교류했다. 또한 여성교육을 위해 자신의 집터와 토지, 과수원을 삼일여학교(현 매향여중고)에 내놓기도 했다. 이후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 분교인 양성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며 독립군을 양성하고, 부민단 결사대 대원으로 활약하는 등 평생을 항일투쟁에 바쳤다. 수원시청 앞 올림픽 공원에는 한 손에 책을 든 모습의 임면수 선생 동상이 있다. 수원박물관 정원에 그의 묘비가 있으며 묘소는 대전 현충원에 있다.

방화수류정을 지나면 군사 훈련을 지휘하던 팔작지붕 형태의 동장대(연무대)가 나타나고 이어서 화성에서 가장 독특한 건물로 꼽히는 공심돈(空心墩)이 모습을 드러낸다. 연무대는 군사들이 무예를 연마하고 훈련했던 곳이다. 돈(墩)은 적의 동태를 감시하거나 공격할 때 이용하는 망루, 또는 초소 같은 곳인데 안엔 나선형 계단이 설치돼 있다. 멀리서 보면 꼭 벌집통 같은 요새다. 외벽에는 여러 개의 총구멍을 뚫어서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했다. 건물 내부 한쪽엔 온돌방을 만들어 군사들의 숙소로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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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자혜의원의 전신인 봉수당



화성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행궁

수원 화성 안에 있는 행궁(사적 제478호)은 임금이 전란을 피해 잠시 머무르거나 지방을 순시할 때 임시로 묵던 거처다. 화성을 축적할 당시 함께 지은 건물로, 정조는 아버지의 능을 참배하러 가는 길에 이곳에 잠시 머무르며 앞날을 걱정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이곳에는 총 33동 577칸에 이르는 규모의 건물이 있었지만,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훼손되고 말았다. 복원을 마친 행궁에는 정조의 어진을 모신 화령전,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베풀었던 봉수당, 정조가 노후를 꿈꾸며 지은 노래당 등이 있다. 이밖에도 장락당·낙남헌·복내당·득중정·유여택·외정리소 등이 남아 옛 자취를 더듬어 보게 한다.

이중 봉수당(奉壽堂)은 화성 행궁의 정전으로 일제강점기에 기생들의 위생 검사를 실시했던 자혜의원(慈惠醫院)의 전신이 된 곳이다. 기생들은 일제의 위생 검사에 항거하는 뜻으로 이곳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1910년 일본은 조선인에게 자애로운 은혜를 베푼다는 미명 아래 전국 주요 지역에 자혜의원을 설치했다. 그러나 급하게 설치한 탓에 의원은 인력과 약품의 부족으로 난항을 겪었다. 수원 지역 자혜의원 자리는 본래 화성의 연무대였다. 그러나 읍내에서 거리가 멀고 난방시설 및 공간 협소 등의 이유를 들며 화령전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화령전 정전의 오른쪽 어정 앞의 전사청(典祀廳)과 그 부속 건물, 좌측의 풍화당(風化堂)등 3동을 병원 건물로 활용했다. 이후 자혜의원은 다시 봉수당으로 이전되었다. 일제는 화성 행궁의 정전이던 봉수당을 병원 본관으로 활용함으로써 조선의 몰락을 상징적으로 알리고자 하였다.이처럼 일제강점기 아픈 역사와 함께해온 화성행궁은 규모와 건축구조, 기능 면에서 특출한 면모를 보이는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