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일제가 금지한 놀이
석전

일제가 금지한 놀이 <BR />석전
    


글 신현배 역사칼럼니스트


일제가 금지한 놀이 석전


  

석전(石戰)은 한자 풀이 그대로 돌싸움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의 전통놀이로 대개 음력 정월 대보름이나단오를 전후해 마을 대항 석전이 치러졌다. 개천이나 고개, 큰길을 사이에 두고 두 편으로 나누어 돌을던지면서 승부를 겨루는 것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일본에게는 석전만큼 두려운 놀이가 없었다.




석전, 싸움인가 놀이인가

구한말 언더우드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그가 친구를 만나기 위해 집을나섰는데 공터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무슨 일이지?’언더우드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사람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커다란 함성과 함께 갑자기 반대편에서 돌이 비 오듯 날아들었다. 언더우드는 기절할 듯이 놀랐다. 그리고는 돌을 피해 부리나케 달아나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돌이 머리 위에 떨어질 것 같아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언더우드가 그날 목격한 것은 석전(石戰), 즉 돌싸움 현장이었다. 당시 돌싸움에는 수백 명의 장정이 참여했는데, 서로 돌을 던져 싸우는 투석전과 몽둥이를 들고 싸우는 육박전으로 나뉘었다. 맨 앞줄에 투석꾼이 서고,그 뒤에 육박전을 하는 이들이 섰다. 싸움이 시작되면함성과 함께 상대편을 향해 돌을 던지며 전진했다. 양쪽 진영을 향해 돌이 쏟아지고, 날아오는 돌에 맞은 사람들의 비명이 사방에서 터지곤 했다. 싸움은 꽤 치열했다. 돌에 맞아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지는 부상자가속출했다. 심지어 머리를 정통으로 맞아 죽는 경우도적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이 죽더라도 살인죄로 처벌받지 않았다. 수백 명, 수천 명이 한꺼번에 던지는 돌에 맞아 죽은 것이니 어느 돌에 맞아 죽었는지 알 수 없었기때문이다.

석전에는 어른들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참여했다. 아이들의 돌싸움이 시작되면 “개똥아!”, “덕재야!”하며 제 자식을 찾는 어머니들의 애타는 절규가 들려왔다.

석전은 쉽게 끝나는 법이 없었다. 돌과 몽둥이 들고 맞붙어 다들 악착같이 싸웠다. 몇 시간이나 계속되는 긴싸움 끝에 한쪽이 달아나면 그것으로 승부가 끝났다. 싸움이 길어질 양이면 씨름이나 택견으로 승부를 가렸다.예부터 석전은 서울 만리재 고개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것이 가장 유명했다. 참여하는 인원만 9천여 명에 달했고 구경꾼은 수만 명이었다.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이 석전은 서울의 흥인문(동대문)·돈의문(서대문)·숭례문(남대문) 등 삼문(三門) 밖에거주하는 사람들과 애오개(아현) 일대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두 패로 나누어 행해졌다고 한다. 싸움은 좀처럼끝나지 않았는데, 양편에서 사생결단으로 싸운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삼문 밖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이기면 그해 경기도에 풍년이 들고, 애오개 일대에 거주하는사람들이 이기면 다른 지방에 풍년이 든다는 속설이 있었던 것. 그래서 애오개 사람들을 이기게 하려고 용산·마포 등 이웃 동네 사람들이 합세하기도 했다.


일본은 왜 석전을 무서워했을까?

우리나라 석전의 기원은 고구려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중국 문헌 『수서』의 ‘동이전’, 「고구려조」에 의하면 석전은 고구려의 정초 풍습이었다고 한다. 해마다 고구려왕은 패수에 가서 석전을 구경했다. 옷을 입은 채로 강물에들어가 신하들을 두 패로 나눈 뒤, 그들이 벌이는 돌싸움을 지켜보았다. 당시 고구려에서 석전이 얼마나 성행했는지 알 수 있다. 실제로 고구려 명장 을지문덕이 살수(청천강)에서 수나라 대군을 무찔렀을 때, 돌팔매질이 화살만큼 큰 위력을 발휘했다.

고려시대에 와서도 석전은 군사 분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고려 군대에는 돌을 주무기로 삼아 적군을공격하는 ‘석투군’또는 ‘척석군’이 있었다. 이 부대의 병사들은 돌팔매질로 왜구들을 소탕했다.

조선시대 와서도 석전은 전투수단으로 널리 쓰였다. 태조 이성계는 척석전(돌싸움) 부대를 만들었고, 태종 이방원 역시 석전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이질을심하게 앓았을 때도 아픈 몸을 이끌고 병사들의 돌싸움훈련을 지켜봤을 정도였다.

석전은 전쟁에서 쓸모가 많았다. 1510년(중종 5년) 삼포왜란 때 석전군으로 난동을 부리는 왜인들을 제압했으며, 1593년(선조 26년) 임진왜란 때는 석전군을 동원해행주산성에서 왜군을 무찔렀다.

석전은 우리 민족의 오래된 전통놀이였지만, 일제강점기 일본이 보기에 이는 매우 위험하고 위협적이었다. 집단 놀이로서 참여 규모가 큰데다 전투의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1909년 평안도 순천에서 일본 경찰과 주민들의 충돌로 7명의 일본인이 조선인이 던진 돌에 맞아죽은 사건이 있었다. 이런 사건까지 겪고 나니 일제는 더이상 석전을 전통 놀이로 가벼이 여길 수 없었다. 그리하여 1912년 3월, 일제는 ‘경찰범 처벌 규칙’을 제정해 석전을 금지했다. 항일 투쟁을 조직화하려는 이들에 대한 처벌 규정을 만들면서 ‘돌싸움, 기타 위험한 놀이를 하거나하게 한 자, 또는 가로에서 공기총·새총 따위를 가지고놀거나 놀게 한 자’를 처벌 대상에 넣었던 것이다.

일제는 조선인이 언제고 돌로 자신들을 공격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단순한 놀이가 항일로 이어질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전통 놀이 석전은자취를 감추었다.




신현배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역사칼럼니스트. 저서로는 역사 이야기 『엉뚱 별난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전통문화이야기 『소중한 우리 문화 지식 여행』 시리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