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의 함성 독립의 희망

이봉창과 윤봉길

일제의 심장을 저격하다

INPUT SUBJECT



글 박영규 작가


이봉창과 윤봉길

일제의 심장을 저격하다




1932년 두 차례의 굉음이 울렸다. 폭탄이었다.일본인들은 흩어지거나 다쳤다. 난데없는 폭탄에 놀란 것은 일제만이 아니었다. 전 세계가 일제의 심장을 향해 폭탄을 던지는두 한국인 청년에 주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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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왕을 처단하기 위해일본에 도착한 이봉창의사가 정세와 상황을김구에게 알린 편지 / 윤봉길 의사의홍커우공원 폭탄투척의거 『대판매일신문』 호외(1932.04.29.) / 법정으로 가는 이봉창



1932년, 일제를 뒤흔든 두 개의 폭탄

1932년 1월 8일 11시, 일제의 심장부인 도쿄 경시청 앞에서 폭탄이 터졌다. 폭탄은 만주 괴뢰국의 황제 푸이와 함께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일왕 히로히토를 향했다.그러나 안타깝게도 히로히토까지 미치지 못하고 궁내대신이 탄 마차 옆에 떨어졌다. 호위병들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왕 처단시도에 허겁지겁 범인을 색출하려 들었다.그리고 군중 속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부르짖는 청년을 발견했다. 그는 체포를 자처하며 자신이 한인애국단원 이봉창이라고 밝혔다.

사건은 일본 열도를 뒤흔들었다. 중국 언론에서는 대서특필로 다뤘다. 중국 국민당의 기관지 『민국일보』는 ‘한국인 이봉창이 일왕을 저격했으나 불행히도 명중시키지못했다’고 보도했다. 일제를 꽤나 자극하는 보도였다. 이에 일제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민국일보』를 습격, 파괴했다. 이어 중국 정부에 공식적으로 항의하였다. 그도성에 차지 않았던지 급기야 상하이를 공격하기에 이르렀고, 중국군 또한 적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상하이사변이 터졌다. 상하이사변은 훗날 중일전쟁을 촉발하게 된다. 그만큼 이봉창 의거가 불러온 파급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봉창 의거 직후 일본 경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주석이자 한인애국단을 운영하고 있는 ‘김구’를 잡는 데혈안이 되었다.

1932년 4월 29일, 이봉창의 도쿄 의거가 있은 지 4개월이 채 되지 않은 날에 다시금 폭음이 터져 나왔다. 이번에는 상하이였다. 그날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는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축하식(천장절)과 상하이사변 전승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11시에 시작된 행사가 끝나갈 무렵, 물통 모양의 폭탄이 행사장 안으로 날아들었다. 이미천장절 행사는 끝나고 상하이교민회가 준비한 축하연만남겨둔 시각이었으므로 다른 나라의 외교관이나 손님들은 빠져나간 뒤였다. 상하이사변 승리를 기념하는 식이거행되고 일본국가인 기미가요가 울려 퍼지는 순간 요란한 폭음과 함께 폭탄이 터졌다. 폭탄은 단상의 경축대 위에 명중하였다.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육군대장은 약 한 달 뒤 사망하였고 일본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쓰구는 다음날 사망하였다. 중국 총영사 무라이는 폭탄 파편에 중상을 입었다. 제3함대 사령관노무라 기치사부로 중장은 실명했다. 또 제9사단장 우에다 켄키치 중장은 다리를 절단해야 했고, 중국공사 시게마쓰 마모루도 이때 입은 중상으로 다리를 절었다.

폭탄을 던진 사람은 마찬가지로 한인애국단 소속 윤봉길이었다. 윤봉길 의거는 세계 신문들의 중대 뉴스로 보도됐다. 중국 국민정부 주석 장제스는 중국의 백만 군대가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가치와 역할을 인정하고 본격적인 지원에 나섰다. 중국에 얹혀살던 임시정부로서는천군만마를 얻은 격이었다. 의거 소식을 들은 한인 교민들의 지원도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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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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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과윤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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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기·윤봉길·이봉창 의사효창공원 유골안치(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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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이 쓴『농민독본』



김구가 만난 청년들

이봉창과 윤봉길은 일본으로부터 갖은 고문을 받은 뒤에가혹하게 처형됐다. 이봉창은 비밀재판을 통해 1932년9월 30일 사형 선고를 받고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는 재판정에서 자신을 심문하는 대심원에게 “나는 너희 임금을 상대하는 사람이거늘 어찌감히 나에게 무례하게 구느냐”고 호통을 치기도 했다.

한편 윤봉길은 1932년 5월 25일 상하이 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뒤 1932년 12월 18일 가나자와 육군구금소로 이송되었다가 다음날 아침 7시 27분에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미쓰고우시야마 서북 골짜기에서 형틀에 묶인 채로 총살당했다. 윤봉길은 사형 직전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없느냐는 질문에 “사형은 이미 각오했으므로 하등 말할 바가 없다”며 담담한 태도를 보였다.두 의사는 봉분도 없이 매장되었다가 김구·이광훈·박열 등 독립투사들과 재일동포들의 노력으로 1946년에야 환국할 수 있었다. 그들은 효창공원 삼의사 묘소에 백정기 의사와 함께 안장됐다.

목숨을 던져 스스로 독립운동의 불씨가 되었던 이봉창과 윤봉길의 삶을 간략하게나마 정리하고자 한다.먼저 이봉창은 1900년 지금의 서울 용산에 해당하는 한성부 용산방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이진규는 건축업과 운수업을 했다. 아버지의 사업이 그런대로 잘 됐기 때문에 이봉창의 어린 시절은 순탄했다. 서당을 다닌 후에는 용산 문창소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아버지가 첩을 얻어 생활하는 바람에 나중에는 학비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과자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19살이 되던 해에는 남만철도회사 용산정차장 고용원으로 취직했다. 3·1운동 이후 친형 용태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막노동을 하며 생계를 이었다. 이봉창은 고된 막노동 생활에서 각기병에 걸려 고생했다. 병 때문에 일을 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고 다행히 친구의 도움을 받아 1년 동안 쉬면서 요양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즈음 이봉창은 독서에 빠져있었는데, 이를 통해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를 키웠다. 그는 여비가 마련되자마자 상하이로 갔다. 그곳에서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의 주선으로 김구를 만났다. 김구는 여러 차례 이봉창을 시험한 끝에 그를 한인애국단 단원으로 받아들이고 히로히토 처단 계획의 실행자로 선택했다. 그렇게 이봉창은 거사를 위해 다시 일본으로 갔다.

이봉창 의거가 실패하고 김구가 선택한 또 다른 사람이 바로 윤봉길이었다. 윤봉길은 1908년 충청남도 덕산군 현내면 시량리에서 윤황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11살이던 1918년에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듬해 3·1운동이 일어나자 식민지 노예교육을 받지 않겠다며 학교를 자퇴하고 한학을 공부했다. 1921년에는 유학자 성주록이 세운 서당 오치서숙에 들어가 8년간 수학하고 졸업했다. 윤봉길은 오치서숙 시절에 『오추』·『옥수』·『임추』 등의 시집을 발간할 정도로 문학에 열정을 쏟았다.오치서숙 졸업 후 윤봉길은 농촌운동에 뛰어들었다. 농촌계몽운동·농촌부흥운동·야학·독서회 등에 투신하며 『농민독본』 등 3권의 책을 저술했다. 『농민독본』은 농민구제와 농촌부흥을 위해 자주·자립정신을 일깨우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30년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는 글귀를 남기고 중국으로 갔다. 그 뒤를 따라붙은 일본 경찰에 붙잡혀 45일간 투옥되는 일도 있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윤봉길은 만주로 망명한 후 다시 상하이로 향했다. 그는 상하이에서 채소 장사를 하며 기회를 엿보다 마침내 1931년 겨울, 김구를 만나 한인애국단에 가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 윤봉길 의거가 일어났다.




박영규

1996년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내면서 저술활동을 시작하여, 1998년 중편소설 『식물도감 만드는 시간』으로 문예중앙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문학, 철학, 역사 분야에 걸쳐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역사서로는 『한 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 『한 권으로 읽는 일제강점실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