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그날

대륙에서 조국으로!
한국광복군의 진군

대륙에서 조국으로!<BR />한국광복군의 진군

글 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


대륙에서 조국으로!

한국광복군의 진군




매월 대한민국의 광복과 관련된 핵심사건을 선정하여그 치열했던 역사의 순간을 재구성하고자 한다.다시 만난 그날, 이번 달의 주제는 ‘한국광복군’이다.그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군대로서 조국을 되찾기 위해중국에서 고군분투했다. 일본군으로 끌려갔던 학도병들 또한광복군으로 거듭나며 또 다른 투쟁의 시작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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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의 개회를 선포하는 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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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식 기념사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숙원

1940년 9월 17일. 가릉빈관은 이른 아침부터 뜨거운 열기에 휩싸였다. 중국 국민당정부의 전시 수도 충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을 거행하는 날이었다. 식은 일본군의 공습을 피해 오전 7시에 열렸는데,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대성황을 이루었다. 임시정부 인사들은 물론 중국기관 요인들·각국 외교 사절들·언론사 취재진을 포함해 약 200여 명이 참석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원년에 정부가 공포한 군사조직법에 의거하여 중화민국 총통 장개석 원수의 특별 허락으로 중화민국 영토 내에서 광복군을 조직하고 대한민국 22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총사령부를 창립함을 선언한다.”


이틀 전인 9월 15일, 김구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겸 한국광복군창설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위와 같은 내용의 ‘광복군 선언문’을 발표했다. 임시정부의 숙원이었던 국군 창설의 기치를 본격적으로 든 것이다. 전례식은 한국광복군의 공식 출범을 뜻했다. ‘광복조국(光復祖國)’의 네 글자가 새겨진 광복군 기가 식장에 등장했다. 단상에 올라선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이 말했다.


“중국 곳곳에 산재한 우리 열혈청년들이 광복군이 성립된다는 소식을 듣고 바람에 구름 밀리듯이 일제히 몰려들고 있소. 조국과 민족의 해방 여부가 광복군이 목적을 관철하는 데 달렸으니 동지 동포는 인력·정력·물력을 군으로 집중하여 주시오.”


지청천은 일제강점기 독립전쟁의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일본육군사관학교를 나와 1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 복무했으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서간도로 탈출해 독립전쟁을 이끌었다. 1920년대 서로군정서, 1930년대에는 한국독립군을 지휘했으며, 북만주 대전자령 등지에서 중국 항일군과 연합해 일본군에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지청천은 한국광복군 창설에도 크게 기여했다. 1939년 10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장에 선출되면서 광복군 조직을 위한 계획 수립에 나섰고, 계획서는 중국 총통인 장개석에게 전달됐다. 광복군이 대륙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중국 정부의 승인과 협조가 필수적이었다. 장개석은 중국군의 대일 항전에 동참한다는 조건을 내걸며 한국광복군을 승인했다.

이후 한국광복군 창설에 속도가 붙었다. 1940년 8월엔 총사령부도 구성되었다. 총사령관 지청천·참모장 이범석·부관처장 황학수·참모 김학규 등 독립전쟁의 주역들이 망라되었다. 그러나 전례식 당일 단상에 선 지청천의 마음은 무거웠다. 한국광복군의 조직이라고는 달랑 총사령부뿐이었고, 먼 길을 가는데 앞서 중국이 발목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중국군사위원회는 각지 군사 장관들에게 광복군 활동을 단속하란 지시를 내렸다. 중국 국민당 군부는 한국광복군을 자신들의 지휘 아래 두려고 했다.

이 문제를 풀고 독자적인 작전권을 인정받고자 임시정부 주석 김구와 지청천은 교섭에 나섰다. 지청천은 장개석의 일본육사 1년 후배로서 친분이 있었다. 하지만 1914년 봄, 김원봉 휘하의 조선의용대 주력부대가 화북으로 건너가 중국 공산당 팔로군에 합류하면서 상황은 악화되었다. 그간 조선의용대와 함께 한중연합 작전을 펼쳐온 중국 국민당 본부는 충격을 받았고, 한국광복군에게 그 불똥이 튀었다. 장개석은 한국광복군을 중국군사위원회에 귀속시켰다. 여기에 9개 행동규칙이 설정됨에 따라 자체 군사 활동 및 작전지휘가 어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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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 배지(왼쪽부터 총사령부·제2지대·제3지대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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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광복군에 합류하면서 편성된 제5지대(1941.01.)



일본군 학도병, 한국광복군이 되다

광복군의 선결과제는 초모(招募), 즉 병력을 모집하는 일이었다. 1940년 11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는 섬서성 시안으로 옮겨갔는데, 이곳은 화북의 일본군과 대치하는 최전방 기지였다. 당시 화북 지역에 거주하는 한국인은 약 20만 명. 시안 총사령부는 이들을 대상으로 모집 활동을 펼치기로 했다.

지청천은 중국과의 교섭을 위해 중경에 남아있었으므로 황학수가 시안에서 총사령관 대리를 맡았다. 그는 대한제국 군인 출신의 노장이었다. 이미 전년부터 군사특파원으로 파견되어 시안에 거점을 마련한 상태였다. 황학수는 광복군 제1지대·제2지대·제3지대를 편성하고 초모활동에 주력했다. 각지에 징모분처(徵募分處)를 운영하며 병력을 채워갔다. 기존에 있던 한국인 군사단체를 설득하여 광복군으로 끌어들이는 일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1941년 1월 무정부주의 계열의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합류하였다. 이들 200여 명의 인원이 들어오면서 한국광복군에는 제5지대가 새로 편성되었다. 1942년 5월에는 조선의용대 본부병력이 제1지대로 편입됐다. 조선의용대의 좌익 주력부대는 화북으로 갔지만 일부 인원은 남아있었던 것이다.

시안 총사령부는 1942년 9월에 충칭으로 돌아왔다. 맨주먹으로 시작했으나 금세 완전한 군대 조직을 갖춰나갔다. 이제 전황의 변화를 반영해 광복군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하면서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다. 미국의 참전에 따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2월 10일 대일선전포고를 했다.


“한국 전체 인민은 이미 반침략 전선에 참가하여 1개 전투 단위가 되어있으며 축심국(軸心國 : 일본·독일·이탈리아 등)에 대하여 선전(宣戰)한다. 왜구를 한국과 중국, 서태평양에서 완전 구축(驅逐)하기 위하여 최후 승리까지 혈전한다.”


미국 태평양 함대를 궤멸시킨 일제는 아시아태평양 전역을 파죽지세로 공격했다. 그러나 미국은 1942년 6월 미드웨이해전에서 일본 항공모함과 공습부대를 격파하며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전세역전에 고무된 임시정부도 공세로 전환하였다.

한국광복군은 일본군을 흔드는 공격적인 초모에 들어갔다. 중국에 파견된 일본 군대와 그 점령지에는 한국인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을 회유하여 광복군에 가담하도록 하면 적군의 사기가 떨어짐은 물론 아군의 전력도 증강시킬 수 있었다. 특히 1943년부터는 안휘성 부양에서 징모분처를 운영한 제3지대 김학규 장군의 활약이 눈부셨다. 일제는 전황이 불리해지자 1944년 1월과 2월, 약 두 달에 걸쳐 한국인 학도병 수천 명을 강제 징집해 전선으로 내몰았다. 국내와 일본에서 공부를 하다 끌려온 학도병들은 전선에서 탈출을 시도했고, 김학규는 이들에게 광복군이 되는 길을 열어주었다. 당시 안후이성 린취안에는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분교가 있었는데 그는 여기에 ‘한국광복군간부훈련반’을 개설하고 일본군에서 빠져나온 한국인 학도병들을 모아 군사훈련과 정신무장을 시켰다.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난 학도병들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태극기를 우러러보며 애국가를 불렀다고 한다. 간부훈련반에서 3~5개월 교육을 받은 후 희망하는 임무에 따라 한국광복군에 배치되었다. 이 가운데는 위험한 임무를 맡아 적지에 잠입하는 공작대원도 있었고, 파수꾼을 자임하며 충칭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병력도 있었다.

한성수 대원은 초모공작대에 지원해 1944년 가을, 적의 소굴인 상하이로 밀파되었다. 조장인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한국인 10여 명을 포섭했으나 누군가의 밀고로 일본 특무기관에 붙잡혔다. 한성수는 일본 군법회의장에서 사형선고를 받으며 말했다.


“나는 한국인이다. 너희는 일본어를 국어라 하지만 나에게는 국어가 아니고 원수의 말이다. 나의 국어는 오직 한국말뿐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찾아간 병력은 70일 동안 6천 리를 걸어 1945년 1월 31일 충칭에 도착했다. 김구는 엄동설한에 고생한 학도병 출신 젊은이들을 직접 맞이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학도병들의 극적인 탈출과 귀환은 국제적 뉴스가 되었고 임시정부의 위상을 드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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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OSS 책임자 도노반 장군을 만나 한미연합작전을 협의한 김구 주석과 지청천 총사령관

(1945. 08. 07.)(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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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잠입 특공작전을 함께 준비한 광복군 제2지대 간부들과미국 OSS 요원들 (앞줄 가운데가 이범석 장군)



한국광복군 국내잠입작전의 ‘만약’

1944년 가을 태평양전쟁은 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미군은 일본 본토를 향해 나아갔다. 일본군은 사이판·이오지마·오키나와 등지에서 옥쇄를 감행하며 본토 방어에 안간힘을 썼지만 패배를 직감하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미국·영국·중국 등과 함께 연합국의 일원으로 인정받아 한국의 독립을 주도하는 한편 미래 수권세력이 되고자 했다. 1944년 9월 중국군사위원회의 9개 행동규칙이 폐지되면서 제약을 벗은 광복군은 적극적으로 군사작전을 모색했다.

1944년 10월 미국 OSS(전략첩보기구)가 윈난성 쿤밍에 본부를 설치했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당시 2지대장을 맡고 있던 이범석 장군이 움직였다. 한국광복군이 OSS의 특공훈련을 받고 잠수함으로 국내에 잠입해 연합군의 진주를 지원하는, 일명 ‘독수리작전’이 세워진 것이다. 1945년 5월 시안의 제2지대가 먼저 훈련에 돌입했다. 침투·암살·파괴·정보수집 등 미국 특공대의 훈련과목을 속성으로 익혀야 했으므로 결코 쉽지 않은 작전이었다. 훈련생 대부분은 국내 실정에 밝은 학도병 출신들이었는데, 그들은 불과 석 달 만에 숙련된 모습을 보이며 미국 교관들을 놀라게 했다.

8월 4일, 제2지대의 훈련이 완료되자 김구 주석은 시안으로 갔다. 그는 8월 7일 OSS의 도노반 소장과 만나 한미연합 작전을 협의하고 이튿날 대원들의 특공훈련을 참관했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김구는 그리운 조국에 광복군을 투입할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기대도 잠시, 8월 10일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수락했다는 급보가 날아들었다. 결국 작전은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김구는 절망했다. ‘독립(獨立)’은 스스로 일어서는 것이다. 만약 우리 힘으로 조국을 되찾지 못한다면 새 나라의 앞날 또한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광복군의 특공작전 무산은 애석한 일이었다. 일제의 항복에 모두가 기쁨의 만세를 외칠 때 그가 홀로 통곡한 이유다.

그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1945년 말 임시정부 요인들이 미군 수송기를 타고 환국할 당시 지청천 총사령관은 중국에 남는 것을 선택했다. 대신 확군(擴軍)에 열중했다.

일본군 포로를 포함한 대륙의 한국인들을 끌어모아 10만 대군을 만들어 조국으로 진군하겠다는 것. 실제로 수만 명이 결집했지만, 지청천의 계획은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남한에 진주한 미군정 당국이 한국광복군의 공식입국을 거부하며 개인 자격으로의 입국만을 허가했기 때문이다. 1946년 5월 16일, 결국 지청천은 한국광복군의 해산을 선언했다.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개별 귀국과 함께 한반도는 혼란에 빠졌다. 극심한 이념 대립 속에서 일제의 잔재도 청산하지 못한 채 분단으로 치달았다. 새 정부 수립과 건군(建軍)의 주체를 바로 세우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었다.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만약 김구의 바람대로 한국광복군이 국내잠입 작전에 성공했다면, 그래서 임시정부가 연합군의 일원으로 개선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 서강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칼럼 ‘사극 속 역사인물’을 연재하고 팟캐스트 ‘역사채널 권경률’을 진행한다. 저서로는 『조선을 새롭게 하라』,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 등을 출간했으며, 영상물 『시시콜콜 한국사 어워즈』도 선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