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찾은 오늘

충서(忠恕)의 도(道)

충서(忠恕)의 도(道)

글 이성주 역사칼럼니스트


충서(忠恕)의 도(道)




“그는 일본인을 거의 영국인만큼이나 싫어하였다. 그는 자신이 직접 상하이로 가서 '죽음의 화물' 선적을 감독하였다. 그는 돈 한 푼 받지 않고 오로지 동정심에 한국을 도와주었다. 한국인 테러리스트들은 몇 년 동안 그의 배로 돌아다녔으며, 위험할 때는 그의 집에 숨었다.”(독립운동가 김산의 회고록 『아리랑』 中)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수호자이자 숨은 조력자였던 그, 조지 루이스 쇼의 이야기다.





푸른 눈의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사업가 조지 루이스 쇼(George Lewis Shaw) ▲1880년 중국 푸젠성 푸저우(福州) 출생 ▲아버지의 뒤를 이어 무역업 종사 ▲1919년 조지 루이스 쇼의 이륭양행 건물 2층에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국 지부 설치. 본격적으로 한국 독립운동에 투신 ▲1919년 11월 의친왕의 망명 계획 지원 ▲1920년 7월 일본에 의해 체포. 4개월 만에 보석으로 석방 ▲1921년 1월 임시정부로부터 공로훈장(금색공로장) 수훈 ▲1943년 11월 사망


조지 루이스 쇼는 아일랜드계 영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내 역시 일본인이었다. 가족관계만 보자면 어째서 그가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한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쇼는 누구보다 독립운동에 열정적이었다. 자신의 회사 이륭양행(怡隆洋行) 2층을 기꺼이 임시정부 비밀 정보국으로 내주었고,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해 수많은 독립지사들의 탈출을 도왔다. 독립운동에 필요한 군자금과 폭탄, 정보 등을 전달하기도 했다. 우리에게 쇼는 푸른 눈의 독립지사였지만 일본에게는 달랐다. 그야말로 눈엣가시였다. 일본은 계략을 세워 쇼를 체포한다. 그러나 영국인이었던 그는 4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쇼는 상하이로 돌아와 조선의 독립을 위해 희생할 수 있어 자랑스럽다며 한국인 독립운동가 못지않은 포부를 보였다.

일본은 쇼의 독립운동에 갖은 방해 공작을 펼쳤다. 이륭양행의 경쟁사를 지원하거나 일본인인 쇼의 처남을 이용해 이륭양행의 인수를 시도한 적도 있었다. 이러한 압박에도 불구하고 쇼는 굴하지 않았다. 회사경영과 독립운동 지원도 계속되었다. 1938년 독립운동가이자 사업가로서 끝까지 이륭양행을 지키고자 했던 쇼의 노력은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회사의 매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1943년, 6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공자의 진리를 실천했던 이방인

한국과는 아무런 인연도 없었던 쇼가 한국의 독립을 위해 발 벗고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아일랜드계 영국인이라는 ‘출신’ 때문이었다. 12세기 아일랜드는 영국의 침략으로 속국이 되었고, 영국의 지배는 700년간 이어졌다. 1919년 시작된 독립전쟁은 1922년 남부 26개 주가 북아일랜드 공화국으로 독립하면서 끝을 맺었다. 쇼는 외세의 침탈과 지배가 주는 ‘아픔’을 알고 있었다. 동시에 그는 공자가 전하고자 했던 진리를 가장 잘 실천한 인물이기도 했다. 『논어』 이인(里人) 편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삼(參)아! 나의 도(道)는 한 가지 이치로 만 가지 일을 꿰뚫고 있다.” 이에 증자(曾子)는, “예”라고 대답을 한다. 공자가 나가자, 제자들이 증자에게 묻는다. “선생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신 겁니까?”증자가 대답하였다. “선생님의 도(道)는 충(忠)과 서(恕)일 뿐이다.”


여기서 충(忠)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충성의 개념이 아닌 ‘자기에게 진실을 다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서(恕)는 ‘헤아려 동정하다’는 의미다. 즉 공자가 말하는 ‘충과 서의 도’는 “자기가 싫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한 마디로 정리된다. 마찬가지로 『논어』에서 언급되는 ‘능근취비(能近取譬)’는 공자 사상의 핵심으로서 자신의 처지를 통해 타인의 처지를 유추해 낸다는 뜻과 일맥상통한다. 쇼는 제 나라의 처지를 통해 타국의 아픔에 공감했다. 고향에서 일어났던 일이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똑같이 일어나고 있는 형국을 보며 그는 자신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자신이 싫은 것은 남도 싫어할 것을 알고 있었다. 조국을 잃는 일은 누구에게나 절망적이었다.


때때로 현대사회에서 유교 문화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유교의 근간인 공자 사상은 되새겨볼 만 하다. 그것은 어렵고 딱딱한 학문이 아니다. 나의 처지를 생각해 다른 사람의 처지를 고민하고,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 이 단순하고도 당연한 ‘진리’를 말하고자 했을 뿐이다. 말로는 간단해 보이지만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90여 년 전, 푸른 눈동자를 가진 이방인은 공자의 진리를 제 삶으로서 실천해 보였다.




이성주

시나리오 작가 겸 역사칼럼니스트.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글쓰기를 목표로 『조선의 민낯』, 『왕들의 부부싸움』과 같은 역사서를 출간한 바 있다. 최근에는 국제정치와 관련된 연구 및 집필에 열중하고 있다.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시리즈 1, 2, 3권을 출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