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아주 오래된 사진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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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신현배 역사칼럼니스트


아주 오래된 사진의 기억



  

1860년경 사신 이의익은 베이징에 있는사진관을 방문했다. 러시아 사람이 운영하는 사진관이었는데,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초상사진을 찍은 뒤 사진을 가지고조선으로 돌아왔다. 우리나라 최초의초상사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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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큰 인기를 끈 안중근 사진 엽서에는 하얼빈 의거 직후 붙잡힌 안중근의 사진이 많이 쓰였다    





조선을 찍기 시작하다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사진 기술이 들어와 보급되기 시작한 때는 1880년대다. 그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이의익의 경우처럼 사신과 역관 해외 시찰단 등이 외국을 갔다가 찍어온 초상사진이 대부분이었다. 1871년 신미양요가 있을 당시 미국 해병대와 종군 사진반이 강화도에 상륙해 전투 장면을 찍은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사진이었다.

1880년대 이후가 되어서야 개화기 선구자들에 의해 조선에 사진관이 들어섰다. 그 시기 사진관은 ‘촬영국’이란 이름으로 불렸는데 1884년 2월 14일 자 「한성순보」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지난 여름 저동에 사는 우후(도병마사 밑의 무관직)를 지낸 김용원이 일본인 사진사 혼다 슈노스케를 초빙해서 촬영국을 설치했다. 금년 봄에는 마동에 사는 외무아문 주사를 지낸 지운영 또한 촬영국을 설치했다. 그는 일본에 가서 사진술을 배워 왔으며 그 기술이 정교했다.


황철이란 사람 또한 이 시기 사진사로 활동했다. 황철은 기사에 언급된 김용원·지운영과 함께 초상사진의 시대를 열었다. 그는 중국에서 사진술을 배우고 돌아와 1883년 서울 대안동 자신의 집 사랑채 겸 서재에 촬영국을 차리고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사진관은 1884년 갑신정변 이후 모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수구 세력들이 사진관을 없애고 사진 촬영을 금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들은 사진과 관련해 터무니없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를테면 ‘사진기는 영혼을 뺏는 기계다’, ‘부부가 사진을 찍으면 반드시 사별한다’, ‘어린아이를 납치하여 삶아 먹은 뒤, 그 눈알을 뽑아 사진기에 박아 쓴다’ 따위의 괴담이었다.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우리나라에 다시 하나둘씩 사진관이 생겨나기 시작했으나 대다수가 일본인이 운영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처음에 일본인만을 대상으로 하다가 곧 우리나라 왕실이나 귀족 등으로 고객층을 넓혀갔다.


대한제국 사진사 김규진

1900년대 들어 우리나라 사람도 사진관을 열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김규진이다. 김규진은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서화 스승으로, 궁내부 시종원 시종장을 지냈던 인물이다. 그는 일본에서 사진술을 배운 뒤, 대한제국 황실의 전속 사진사가 되었다. 그리고 1907년 8월 17일 석정동(현 서울 소공동) 자신의 집 사랑채에 ‘천연당’이라는 사진관을 차렸다. 1907년 8월 20일에는 「대한매일신보」에 ‘석정동에 사진관을 개업하여 크고 작은 각종 사진을 싼값에 촬영해 주니 많은 이용 바란다’는 내용의 광고도 실었다. 천연당은 문을 열자마자 큰 인기를 끌었다. 개업 이듬해 설을 전후해서는 1,000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갔다.

김규진은 아이디어가 풍부한 사람이었다. 여성 손님들을 끌고자 최초로 여성 전용 촬영장을 만들었고, 촬영도 여성 사진사에게 맡겼다. 그래서 천연당은 기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사진관이기도 했다. 1913년에는 인공조명 시설을 만들어 밤낮, 또는 날씨를 가리지 않고 언제든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했다. 또 새로운 인화법을 도입해 보다 높은 품질의 사진을 뽑아냈다. 무엇보다 김규진은 사진사로서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사진을 대지에 붙여 고객에게 줄 때마다 ‘대한제국 사진사 김규진’이란 문구를 반드시 적어 주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연당은 경영난을 겪었다. 고객들이 외상으로 사진을 찍고 그 값을 치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규진은 「대한매일신보」에 ‘제발 사진 대금을 보내 달라’는 광고를 내기도 했다. 결국 천연당은 경영난을 이겨내지 못하고 문을 닫아야만 했다.

천연당을 시작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운영하는 사진관이 많이 생겨났다. 사진관을 이용하는 고객도 늘어났고, 사진사는 잘 나가는 신종직업으로 인기를 끌었다. 사람들에게 사진은 더 이상 영혼을 빼앗는 기계가 아니었다.


사진엽서 속 ‘충신 안중근’

사진이 대중화됨에 따라 사진엽서도 불티나게 팔렸다. 그 중 가장 인기가 많았던 것이 ‘충신 안중근’의 사진엽서다. 엽서에는 안중근 의사가 쇠줄에 묶인 채 여순 감옥의 문 앞에 서 있거나 앉아 있는 사진이 실려 있었다. 안중근 사진엽서는 안중근을 숭모하는 우리나라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져갔다. 얼마나 인기가 많았는지 일제가 ‘치안 방해죄’를 이유로 안중근 사진엽서의 판매를 금지할 정도였다.

사실 안중근 사진엽서를 처음 만들어 판 건 일본인 사진사들이었다. 이들은 안중근이 일본의 거물 정치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이후, 한국인과 일본인 모두 안중근의 얼굴을 궁금해 하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리하여 안중근의 사진이 담긴 엽서를 판다면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하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인 사진사들의 상술에 의해 ‘이토 암살자 안중근’이란 문구와 함께 판매되던 사진엽서는 ‘충신 안중근’이란 이름으로 바꿔 제작되어 국내외 한국인들에게 닿았고, 오히려 안중근에 대한 존경과 독립의지를 불어 넣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안중근의 사진엽서 한 장은 사람들의 마음을 뜨겁게 울렸다.




신현배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역사칼럼니스트. 저서로는 역사 이야기 『엉뚱 별난 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전통문화 이야기 『소중한 우리 문화 지식 여행』 시리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