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의 함성 독립의 희망

1920년대,
시대의 빛 독립투사들 ①

1920년대, <BR />시대의 빛 독립투사들 ①

글 박영규 작가


1920년대,

시대의 빛 독립투사들 ①




1920년대 혼란의 일제강점기.어디를 가도 어둠뿐이었던 조국의 현실에서의지할 단 하나의 빛은 독립운동가들이었다.그들은 각기 다른 자리에서 다른 방식으로독립운동을 했지만, 가슴에 품은독립의 염원만큼은 누구하나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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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침략을 다룬 역사서 『한국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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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통사』에 대응하기 위해 일제가 펴낸 역사서 『조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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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식 서거 보도기사(「중화보」, 1925.11.04.)



민족사를 정립한 독립운동의 큰 별, 박은식

1925년 11월 1일, 상하이에서 2대 대통령 박은식이 생을 마감했다. 사망원인은 인후염이었다. 학자이자 언론인이었고,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였으며, 계몽운동가이자 정치가였던 박은식.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큰 별이 저무는 순간이었다.

박은식은 1859년 황해도 황주군, 아버지 박용호와 어머니 노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땐 유학을 공부하면서 과거를 준비했다. 하지만 곧 회의를 느끼며 과거 준비를 포기하고는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그 과정에서 정약용의 제자 신기용과 정관섭을 찾아가 정약용의 학문을 접하게 된다.

1882년 한양으로 상경하여 임오군란을 경험하고 고종에게 시무책을 올리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실망한 나머지 낙향하여 성리학에 매진하였고, 어머니의 뜻에 따라 향시에 응시해서 특선으로 뽑힌 뒤 1888년부터 1894년까지 능참봉 생활을 했다. 당시 박은식은 비록 종9품 한직 능참봉에 불과했지만, 그의 학문적 명성은 황해도는 물론이고 한양에까지 알려졌다.그러나 독립협회의 사상을 접하면서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된다. 그전까지 고수하던 위정척사사상을 버리고 개화사상가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1898년에는 본격적으로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만민공동회 간부로 활동하기도 했다. 또한 장지연과 함께 「황성신문」의 공동주필을 맡아 활동했다. 독립협회 해산 후에는 한성사범학교의 교수를 지냈다.

박은식은 1907년 신민회에 가입했다. 당시 신민회는 항일 비밀결사였는데, 그는 신민회 서북지회의 중심인물로서 서북지회에서 발행하는 「서북학회월보」의 주필로 있었다. 그런 가운데 강제병합이 이루어지면서 그의 저서 『겸곡문고』·『학규신론』·『왕양명실기』 등은 모두 금서로 지정되었다. 「황성신문」과 「서북학회월보」도 폐간되었다.

결국 망명을 결심하게 된 박은식은 1911년 4월, 만주 환인현으로 탈출했다. 그곳에서 대종교 신도 윤세복의 집에 머물며 대종교의 사상을 받아들였고 본격적으로 역사서 집필에 매진했다. 이때 쓴 책이 『동명성왕일기』·『발해태조건국기』·『몽배금태조』·『명림답부전』·『천개소문전』·『대동고대사론』 등이다.

1912년에는 상하이로 가서 신규식 등과 함께 동제사를조직한 후 박달학원 설립에 참여했다. 또 1914년 홍콩에서 중국어잡지 「향강」의 주간으로 있었다. 하지만 「향강」은 당시 중국의 권력자였던 위안스카이의 정치를 비판하다가 폐간당하고 말았다. 다시 상하이로 돌아온 박은식은 그의 역작으로 알려진 『한국통사』를 집필하였고, 이후 『안중근전』과 『이순신전』을 연달아 저술했다. 무엇보다 『한국통사』는 중국은 물론 미국과 러시아 등지에 흩어져 있던 동포들에게 널리 읽혔으며, 국내에도 비밀리에 보급되어 당대 지식인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일제는 『한국통사』에 대응하기 위해 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조선사』 37권을 펴내기도 했다.

박은식은 저술 활동뿐만 아니라 정치 활동도 활발히 전개했다. 이상설·신규식 등과 신한혁명을 조직하고, 신규식과는 대동보국단을 조직해 단장으로 활약했다. 3·1운동 소식을 접하고는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을 결성하여 지도자가 되었으며, 강우규를 국내로 잠입시켜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투척하도록 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당시에는 원로로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집필·간행함으로써 또 하나의 역작을 남겼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갑신정변이 있던 1884년부터 책이 간행된 1920년까지의 항일무쟁투쟁사를 정리한다. 특히 3·1운동이 중점적으로 서술되어있다. 박은식은 책을 통해 3·1운동이 1884년 이후 지속된 독립운동의 총체적 봉기라 정의하며, 이는 결국 일제 패망과 한국 독립 쟁취의 밑거름이 될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독립운동은 희망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독립운동계 전체를 뒤덮은 극도의 혼란 속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또한 갈등과 분열에 시달렸다. 박은식은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사장을 지냈고, 1924년에는 임시정부 의정원이 이승만 대통령의 유고안을 통과시킴에 따라 임시정부 국무총리 겸 대통령 대리를 맡게 되었다. 이후 대통령제 폐지와 함께 국무령 중심의 내각책임제 개헌을 실시하면서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이 무렵 박은식은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죽음을 앞둔 순간, 그는 독립 쟁취의 목적 달성을 위해 모든 동포가 단결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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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백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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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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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우드 비행학교 훈련생과 교관들 사진(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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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한국인 비행사 6인




공군 독립군단 양성의 꿈을 꾼 노백린

1926년 1월 22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장이 치러졌다. 임시정부 참모총장으로 있으며 독립군 육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노백린의 장례였다. 그는 대한제국의 군인으로, 계몽사상가로, 그리고 다시 비행사로 활동하며 우리 독립운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대개 노백린이 지병으로 사망했다고 알고 있으나, 일각에서는 임시정부의 처참한 현실을 비관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말도 있었다.

1875년 황해도에서 유학자 노병균의 3남으로 태어난 노백린은 1895년 관비 유학생으로 뽑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1900년 일본군 소위로 임관한 뒤 한국무관학교 보병과 교관을 지냈고, 육군연성학교에서도 교관으로 있었다. 러일전쟁 때는 일본군으로 종군하기도 했다. 하지만 1907년 정미7조약이 체결된 후 일본이 군대해산을 감행하자 이를 반대하며 신민회에 가담했다.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시작한 것이다. 1910년 미국으로 건너가 박용만과 함께 국민군단을 창설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고, 강제병합 이후에는 고향에서 계몽운동을 하며 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금광 및 피혁 등의 사업에 뛰어든 적도 있었으나 실패했다. 1914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 노백린은 항공 학교를 설립하고 하와이 국민군단의 비행사 훈련을 담당했다.

3·1운동은 노백린을 크게 고무시켰다. 상하이로 간 노백린은 임시정부 창설에 참여하고 군무부 총장이 되었다. 또 미국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 등지에서 공군 독립군 양성에 투신하며 한인 최초의 비행사 양성소를 설립했다. 1923년까지 양성소의 졸업생은 77명에 달하였다.

반면 1920년대 임시정부의 상황은 점점 나빠졌다. 상하이 내부 독립운동 단체는 좌우익 및 아나키스트로 분열되어 싸웠으며, 이승만과 안창호 등의 지도부도 갈등을 겪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노백린은 국무총리로 추대되었다. 1923년 1월의 일이었다. 이듬해 박은식 내각에서는 군무총장과 교통총장을 겸하기도 했다. 재정 형편도 엉망이었다. 요원들의 한 끼 식사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였고, 싸구려 중국 호떡으로 곯은 배를 달래는 날들이늘었다. 노백린은 임시정부의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미국으로 갔다. 그곳에서 구미위원회 외교 위원을 활동하며 소련에서 돌파구를 찾고자 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1926년 1월 22일, 노백린은 상하이의 허름한 골방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박영규

1996년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내면서 저술활동을 시작하여, 1998년 중편소설 『식물도감 만드는 시간』으로 문예중앙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문학, 철학, 역사 분야에 걸쳐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역사서로는 『한 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 『한 권으로 읽는 일제강점실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