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의 함성 독립의 희망

봉오동과 청산리에서의 대승,
그리고 경신참변

INPUT SUBJECT

글 박영규

 

봉오동과 청산리에서의 대승,

그리고 경신참변

 


국난에서 벗어나고자 온 국민이 나섰던 감격의 그 날 1919년 3월 1일. 3·1운동이 어언 100주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를 기념하여 월간 『독립기념관』은 2019년 3월까지 ‘겨레의 함성, 독립의 희망’을 통해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를 다루고자 한다.


독립군의 첫 번째 대승, 봉오동전투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이후, 중국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은 간도 일대를 기준으로 무장투쟁을 위한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1910년대 말에 이르러 이 지역에는 50개가 넘는 무장 독립단체가 조직되었고, 3·1운동을 기점으로 그 역량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자 독립단체들은 국내진입작전을 계획하고 본격적인 무장 투쟁을 전개하여, 함경도와 평안북도에 위치한 일본 헌병감시소·주재소 등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에 일제는 1920년 5월부터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전에 나섰다. 이를 간파한 홍범도는 자신이 사령관으로 있던 대한북로독군부군과 이흥수가 이끌던 신민단 부대를 연합하여 일본군 공략 계획을 수립했다.

당시 대한북로독군부군에는 홍범도가 조직한 대한독립군과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그리고 안무가 이끌고 있던 대한국민회군 등이 결합해 있었다. 여기에 신민단 부대까지 더해졌으니, 독립군의 군세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독립군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던 월강추격대대는 자신들이 호랑이 아가리 속에 들어온 것도 모른 채 일거에 소탕할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이내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봉오동의 한 가운데로 진입했고, 독립군은 일본군을 에워싼 채 공격을 개시했다. 기습공격에 당황한 야스카와 소좌와 그의 부하들은 이리저리 날뛰며 도주하기에 바빴고, 결국 완패를 당하고 말았다. 3시간의 전투가 끝난 후, 월강추격대대 병력 중 절반이 넘는 157명이 전사했고, 나머지 대원들도 모두 부상을 입었다. 이에 비해 독립군 전사자는 4명에 불과했고, 부상자도 2명뿐이었다. 일본군 최정예부대와의 첫 대결은 독립군의 대승으로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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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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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전투 보도기사 (<동아일보> 1920.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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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연이은 청산리전투에서의 승리

대패 소식을 접한 일본 군부는 1920년 8월에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화계획’을 수립하고 1만 8,000여 명의 군대를 간도로 파견했다. 그러자 독립군은 백두산 일대로 근거지를 이동하여 간도 화룡현 지역에 집결했다. 이곳에는 대한독립군을 비롯해 군무도독부·의군부·신민단·의민단·국민회군·한민회·광복단·북로군정서 등이 여러 독립군 단체가 망라해 있었다. 이 소식을 접한 일본군은 독립군을 일시에 토벌하기 위해 5,000여명의 전투부대를 급파하여 공격해왔다. 하지만 일본군의 움직임은 이미 포착된 상황이었다. 첩보를 접한 북로군정서 사령관 김좌진은 홍범도와 함께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일본군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선봉대는 봉오동에서 대패했던 야스카와 소좌의 부대였다. 그는 보병 1개 중대를 지휘하며 청산리 골짜기의 백운평으로 진입해왔지만 매복해있던 북로군정서의 공격을 받아 불과 20여 분만에 전멸하고 말았다.이후 10여 회에 걸친 전투에서도 독립군은 대승을 거뒀다.하지만 일본군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패전에 대한 앙갚음으로 간도 지역의 한인들을 무차별로 학살한 경신참변을 일으켰다. 그 피해 상황은 참담했다. 1920년 10월과 11월에 걸쳐 일어난 이 사건으로 희생자는 무려 3,693명에 달했고, 이밖에도 가옥 3,288채와 학교 41개교, 교회 16곳이 소실되었다. 또 지역 범위도 혼춘·왕청·화룡·연길·유하·흥경·관천·영안 등 일대 8개현에 걸쳐 있었다. 일본군은 그야말로 간도 지역을 초토화시켜 독립군의 뿌리를 뽑고자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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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마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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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전적비

청산리전투의 영웅 백야 김좌진

1930년 1월 24일, 고려공산청년회 소속 청년 두 사람이 한족총연합회 주석에게 총격을 가해 사망케 한 사건이 발생했다. 피격된 이는 놀랍게도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군의 영웅, 백야 김좌진이었다. 당시 간도의 한인 사회에는 김좌진이 일제와 타협하여 간첩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공금을 유용하여 사익을 챙기고 있다는 헛소문이 돌았다. 또한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로 나뉘어 갈등이 심화되었던 상황에서 이들 양 진영을 하나로 규합하는데 주력했던 그가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들 입장에서는 배신자로 비쳤는지도 모른다.
김좌진이 40대의 창창한 나이로 망명지에서 허망하게 죽자, 만주의 한인 사회는 위대한 지도자를 잃은 슬픔에 잠겼다. 그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장례에 참석한 중국인들은 고려의 왕이 죽었다고 애도했다고 한다.
한인 사회는 물론 중국인의 가슴에도 영웅으로 남은 김좌진은 어릴 때부터 남다른 데가 있었다. 그가 17살이던 1905년, 자신의 집 노비들을 모두 해방시켜 재산을 떼어주는 혁신적인 면모를 보였고 2년 뒤인 1907년에는 90여 칸으로 된 자신의 집을 개조하여 호명학교를 세웠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21살 때인 1909년에 기호흥학회라는 장학재단을 마련하였으며 안창호 등과 서북학회를 세우고 오성학교를 설립하여 교감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911년엔 북간도에 독립군 사관학교 설치를 위해 모금 활동을 벌이다 일제에 발각되어, 2년 반 동안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출소 뒤에는 대한광복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이 모든 일이 김좌진이 20대까지 한 일들이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조숙한 행동들이었다. 그러나 30대의 그 또한 대단했다.
31살이 되던 1919년 김좌진은 북로군정서 사단장과 사관연성소 소장을 겸했다. 북로군정서는 서일을 총재로 김좌진·이장녕·김규식·이범석 등이 주축이 되어 형성된 북간도 최대 무장독립단체였다. 이 북로군정서와 함께 33세의 김좌진은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이후 벌어진 경신참변으로 인해 러시아 지역으로 피신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다른 무장독립단체들과 결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기도 하지만 자유시참변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게다가 그동안 그를 이끌어 주고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던 서일마저 목숨을 끊었다.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김좌진은 한동안 후유증에 시달렸지만, 다시 일어나 독립군 재건에 나섰다. 1925년, 신민부 창설에 가담하여 군사위원장과 사령관을 겸하였고, 김혁 등과 성동사관학교를 열어 부교장에 취임했다. 그 무렵,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김좌진를 국무위원으로 임명했지만, 그는 오로지 독립군 양성에만 몰두했다. 그리고 마흔이 되던 1928년엔 조소앙·조봉암·홍진·장건상 등과 함께 한국유일독립당 조직에 가담했으며, 이어 한족총연합회 주석이 되었다.
이렇듯 김좌진은 10대에서 30대까지, 오직 독립운동에 투신하며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왔다. 하지만 1920년대 후반의 독립운동 세력은 좌익과 우익의 치열한 사상투쟁이 전개되고 있었고, 김좌진은 그들을 하나로 규합하여 결집하는데 주력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오해와 갈등이 지속되었고, 이는 결국 그를 죽음으로 이끌고 말았다.

 

“김좌진 장군은 칠 척 거구에 만인을 위압하는 태산과 같은 위엄과 형형한 안광, 그리고 도도한 웅변력을 가진 진정한 영웅호걸이었다.” (이범석)
 
“당신도 총에 맞고, 나도 총에 맞았는데, 왜 나 혼자 살아서 오늘날 이 꼴을 본단 말이오. 당신은 영혼이 되시어 동포를 이끌어가는 나를 보호해주시오. 그리고 땅 밑에서 당신과 만날 때, 우리 둘이서 그 옛날 서대문감옥에서 하던 말을 다시 말해봅시다.” (김구)

 

김좌진의 사망 소식은 서울에 남아있던 아내 오숙근에게 전해졌다. 그녀는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은밀히 간도로 가서 남편의 유해를 수습하였다. 김좌진은 7척 장신이라고 할 정도로 키가 크고 거구였다고 알려져 있으며, 또한 대단한 대식가였다고 한다. 그에 대한 기록은 이범석의 회고록과 김구의 추도사를 통해 찾아볼 수 있다. 김좌진, 그는 대한민국의 독립에 모든 걸 바친 겨레의 영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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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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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의 사회장 모습(1930년)

 

 


박영규

1996년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내면서 저술활동을 시작하여. 1998년 중편소설 『식물도감 만드는 시간』으로 문예중앙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문학, 철학, 역사 분야에 걸쳐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역사서로는 『한 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한 권으로 읽는 일제강점실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