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찾은 오늘

여자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
자립할 수 있는 방법은?

여자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BR />자립할 수 있는 방법은?

글 이성주 역사칼럼니스트

 

여자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

자립할 수 있는 방법은?

 


미투운동·펜스룰 등의 여성주의 운동과 관련된 사건이 광풍처럼 휘몰아치며 대한민국이 들끓었다. 차별과 억압에 눌려왔던 여성들의 눈물과 분노가 봇물 터지듯 쏟아진 얼마간이었다. 역사는 개혁과 반동의 끊임없는 협주다. 여성들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남성들의 볼멘소리가 튀어나왔고, 두 목소리는 이제 불협화음을 넘어 파열음을 내고 있다. 이 파열음이 잘못됐다는 건 아니다. 역사는 언제나 충돌과 파열음을 배경으로 움직인다. 다만, 우리가 기억해야할 한 명의 여성이 있었음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성적인 자유를 외친 진정한 페미니스트

▲독립운동가·페미니스트·언론인 정칠성 ▲1897년 대구 출생 ▲7살에 기녀가 되어 한남권번에서 금죽(錦竹)이라는 기명으로 활동 ▲3·1운동에 참여한 이후 총독부의 눈을 피해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가 사회주의 사상을 접함 ▲귀국 후 나혜석 등과 함께 <신여자지>의 필진으로 활동 ▲1923년 물산장려운동 참여 ▲1925년 일본에서 여성해방을 목적으로 조선여성단체인 ‘삼월회’ 결성 ▲1926년 남편 신철과 이혼 ▲1927년 ‘근우회’ 창설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연루되어 투옥 이후 각종 파업과 시위에 참여했다는 명목으로 체포와 석방을 반복

 

정칠성의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라 말해도 손색없다. 유년시절 기녀로 키워졌으며, 책을 좋아해 일본 유학까지 갔다왔다. 이후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해 여성이라는 이유로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했던 ‘억압’을 타파하겠다고 결심한 후 온몸으로 이를 실천했다. 압권은 알렉산드라 콜론타이(Aleksandra Mikhailovna Kollontai)의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여 실천했다는 대목이다. 소련의 정치인이자 페미니스트 운동가이며, 소설가였던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사랑과 섹스는 무관하며 사랑 없이도 섹스가 가능하다’라고 주장하며 성욕 자유론·성욕 존중론을 전면에 내세웠다. 정칠성은 이러한 사상을 조선에 소개했다. 아직도 성리학의 뿌리가 남아있던 당시 사회에 파문을 일으켰다.
더 충격적인 건 남편 신철과의 관계이다. 당시 신철은 정칠성의 동지였던 정종명과 동거를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정칠성은 신철과의 동지적 관계를 유지했다. 결국에는 이혼을 하며 남녀관계는 끝냈지만, 사상적으로 뜻이 잘 맞는 친구이자 동지로서의 관계는 이어갔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계약 결혼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각각 프랑스 철학자와 페미니즘의 대모인 두 사람은 무려 50년간 계약 결혼을 유지했는데, 계약 조건 중에는 서로 사랑하고 관계를 지키는 동시에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을 서로 허락한다는 항목이 있었다. 1920년대 이런 관계를 생각하고 실천했다는 것 자체가 파격이다. 한마디로 정칠성은 시대의 이단아였다.


엄혹한 시대에 온몸을 내던졌던 신여성

그녀의 인생철학과 사상을 단 하나로 정리할 수 있는 게 바로 근우회(槿友會)다. 당시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갈라져 있던 독립운동의 주체들이 서로 힘을 합치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으면서 여성운동가들 역시 좌우를 초월해 한자리에 모이게 된다. 그렇게 설립된 단체가 바로 근우회다. 정칠성은 주요 멤버로 활동하며 조선 여성의 지위 향상을 도모하기 위해 애썼다. 당시 사회주의 계열 여성운동을 전개하던 이들은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이는 정칠성이 주장한 신여성의 정의와도 맞닿아 있다.

 

“남성과 사회로부터 여자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 자립하기 위해선, 여자의 자립심, 자립 의지, 그리고 경제적 독립이 있어야 한다.”

 

정칠성은 남성우월주의가 당연했던 20세기 초의 조선 땅에서 여성도 한 사람의 인간임을 부르짖고, 그 독립을 위해 해야 할 일을 외쳤으며, 몸소 이를 실천했다. 단순히 성적인 자유를 일탈로 바라보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무시하고 이에서 비롯되는 정치적인 힘을 바탕으로 남녀평등을 넘어서 결혼과 가정 그리고 가족에게서의 해방까지 생각했다. 그래야만 독립적인 여성으로 완성될 수 있다고 믿었다.

 

지금 우리 사회에 부는 페미니즘 운동과 여성을 둘러싼 억압과 차별에 대한 개선 움직임은 어쩌면, 1920년대부터 시작된 독립운동가들의 유산을 이어받은 결과일 수도 있다. 지금의 페미니즘이 어떤 식으로 변해갈지 모른다. 다만, 페미니즘이 진정한 양성평등을 목표로 하는 것이라면 정칠성이 말했듯이 여성의 자립심·자립 의지 그리고 경제적 독립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걸 말하고 싶다. 여성이 한 명의 주체로서,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건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이성주

시나리오 작가 겸 역사칼럼니스트.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글쓰기를 목표로 『조선의 민낯』, 『왕들의 부부싸움』과 같은 역사서를 출간한 바 있다.

최근에는 국제정치와 관련된 연구 및 집필에 열중하고 있다.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시리즈 1, 2, 3권을 출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