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그날

어린이날에 깃든 독립희망
방정환이 일군 내일의 희망

INPUT SUBJECT

글 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

 

어린이날에 깃든 독립운동

방정환이 일군 내일의 희망

 


매월 대한민국의 광복과 관련된 핵심사건을 선정하여 그 치열했던 역사의 순간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이번 달에는 독립의 씨를 뿌리고 희망을 일구려 한 어린이날 이야기다. 독립운동가 방정환은 어째서 어린이운동에 헌신했을까?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말고 쳐다봐 주시오

1923년 5월 1일 서울 종로 천도교 교당으로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예정된 시간이 되자 상기된 표정의 스물다섯 청년, 방정환이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무대로 나아갔다. 아동들의 해맑은 환호성과 함께 교당 안으로 웃음꽃이 활짝 피어났다. 단상에 오른 그는 기뻐하며 이렇게 외쳤다.

 

“여러분! 오늘은 즐거운 날입니다. 지금부터 어린이날 잔치를 시작하겠습니다.”

 

방정환은 1920년에 발표한 동시 ‘어린이 노래 : 불 켜는 이’에서 처음 ‘어린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어리지만 엄연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아동들에게 인격을 부여하고자 했다. 그동안 아이들을 ‘애놈’, ‘새끼’라고 낮춰 부르면서 귀찮게 여기던 세태에 반기를 든 것이다. 이것이 최초의 어린이날 행사를 마련한 이유였다. 어린이날은 한 해 전인 1922년에 제정되었으나 그 취지를 알리기 위해 1년 뒤 잔치를 연 것이다.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말고 쳐다봐 주시오. 어린이에게 존댓말을 쓰고 늘 부드럽게 대해 주시오. 어린이를 꾸짖을 때는 성만 내지 말고 자세히 타일러 주시오.”

 

이 행사를 통해 방정환은 경술국치의 불행한 운명을 내일의 희망인 어린이를 길러내는 일로서 만이 극복해 낼 수 있다고 간절히 호소했다. 10년 뒤를 내다보며 독립의 씨앗을 뿌리고 싹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어린이를 인격적으로 대우하고, 아동들의 부당노동을 철폐하며, 마음껏 놀고 배울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최초의 행사 이후 그의 뜻은 차츰 공감을 얻어나갔다. 제3회 행사는 개별 참석자들뿐 아니라 학교에서 단체로 함께 참여하며 대성황을 이뤘다. 방정환이 작사한 어린이날 노래가 울려 퍼지자 행사장을 가득 메운 아이들은 목이 터져라 따라 불렀다.

 

“기쁘구나! 오늘날 5월 1일은 / 우리들 어린이의 명절날일세 / 복된 목숨 길이 품고 뛰어노는 날 / 오늘이 어린이날!”

 

행사가 끝나고, 방정환은 행사 참여자들과 함께 거리행진에 나섰다. 아이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전단을 돌렸다. 무려 12만 장의 전단이 경성 시내에 뿌려지며 열띤 분위기를 자아냈다. 행인들은 손뼉을 치면서 호응했다. 조선인의 마음에 ‘어린이’가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일제강점이라는 엄혹한 이 시기에 방정환은 왜 어린이운동을 펼치게 된 걸까? 1920년대에 우리나라는 한층 정교하고 악랄해진 일제의 강압통치로 인해 좌절감이 팽배하고 있었다. 독립운동가들은 나라 밖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무장투쟁의 길을 모색했다. 이 때문에 방정환의 어린이운동은 비판에 직면했다. 총칼 들고 맞서도 모자랄 판에 한가롭게 아이들과 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걸어온 길을 살펴보면 이 어린이운동이 철학과 비전을 갖춘 또 하나의 독립운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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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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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어린이날 행사 포스터(1923.05.01)

어린이 인권이 담긴 사랑의 선물, 어린이날
1899년 서울에서 태어난 방정환은 신식교육을 받고 자라났다. 그러던 중 사업실패로 집안이  망하는 바람에 학교를 중퇴하고 돈벌이에 나서기도 했지만, 토론 연설 모임인 ‘소년입지회’를 조직하며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반듯한 젊은이로 성장했다.
이후 ‘천도교청년회’에 가입한 방정환은 1917년 천도교 교주 손병희의 딸 손용화와 결혼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는 나라를 걱정하는 뜻있는 젊은이들을 모아 ‘청년구락부’를 결성했다. 일본 경찰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취미활동을 하는 구락부, 즉 클럽으로 위장한 것이다. 실제로는 산에서 밤을 따고 연극을 공연한다는 핑계로 모여 시국에 대해 의논했다.
1919년, 손병희가 민족대표 33인의 주축이 되어 독립선언을 준비하자 방정환은 장인의 곁에서 거사를 도왔다. 3월 1일 독립선언과 만세시위로 민족대표들이 잡혀 들어가고 청년구락부 회장단이 고문으로 목숨을 잃는 가운데 그 또한 3·1운동의 실상을 널리 알리는 데 매진했다. 집에서 등사기로 <조선독립신문>을 인쇄해 청년구락부 회원들과 함께 밤새 배달했다.
낌새를 챈 일본 경찰은 방정환의 집을 포위하여 수색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는 민첩하게 대응했다. 등사기와 신문을 마당에 있는 우물에 넣어 증거를 없앤 것이다. 경찰은 그러나 방정환을 잡아들이고 일주일간 온갖 고문을 가하였다. 이를 악문 채 그는 자백을 거부했다. 석방된 후에도 일본 경찰은 방정환을 요주의 인물로 찍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이즈음의 일제는 한 손에는 채찍과 다른 손엔 당근을 들고 독립운동 와해 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잔혹한 탄압과 교묘한 회유가 이어지면서 국내에서의 저항은 날이 갈수록 힘겨워졌다. 방정환은 고민했다. 이런 현실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내가 할 일은 무엇일까? 마침내 그는 어린이를 떠올렸다. 독립의 씨앗을 뿌리고 싹을 건강하게 키우는 어린이운동 말이다.
어린이운동은 원래 천도교와 관련이 깊었다. 천도교의 전신인 동학은 사회적 약자의 종교였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은 여성과 빈자 등 억압당하고 천대받는 사람들을 보듬었다. 그 연장선상에 아이들이 있었다.

 

“아이를 때리는 것은 하느님을 때리는 것이다.”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이 교도들에게 내린 지침이었다. 뒤이어 천도교에서도 아이들을 어른과 달리 순결한 영혼을 지닌 존재로 바라봤다. 이러한 관점은 서구의 자유주의 사조와 만나며 어린이의 인권 개념으로 발전했다. 김기전·이돈화 등 천도교 이론가들은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실행에 옮긴 것이 바로 방정환이다.
1920년 그는 일본 도요대학에 입학해 아동문학과 아동심리를 공부했다. 이후 방정환은 경성과 도쿄를 바삐 오가면서 활동했다. 1921년에는 ‘천도교소년회’를 설치하고 운동회와 소풍 등 어린이를 위한 프로그램들을 풍부하게 제공했다. 또 마땅한 읽을거리가 없는 아이들을 안타깝게 여긴 나머지 세계명작동화집을 번안해서 출판하기도 했다.

 

“학대받고 짓밟히고, 차갑고 어두운 가운데 자라는 불쌍한 어린 영을 위하여 그윽이 동정하고 아끼는 사랑의 첫 선물로 나는 이 책을 짰습니다.”

 

동화집 머리말에 방정환이 밝힌 출간의 변이다. 제목도 『사랑의 선물』이라고 지었는데 안에는 <신데렐라>,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등이 수록되었다. 개벽사에서 펴낸 이 번안 동화집은 1920년대 내내 큰 인기를 끌었다.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쉽고 재미나게 쓴 덕분이었다. 그는 또 동시 <형제별>, 소년소설 <만년셔츠>, 탐정소설 <칠칠단의 비밀> 등 다양한 작품들을 발표하며 아동문학가로서 입지를 다졌다.
또한 방정환은 탁월한 동화구연가이기도 했다. 그가 천도교 교당에서 동화구연회를 열면 입장권 1,000매를 발행해도 늘 2,000명 이상 몰려와 돌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고 한다. 어린이운동 행사도 선전포스터에 ‘방정환씨 참석’이라는 문구가 들어가기만 하면 어김없이 만석이 되었다.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방정환의 동화구연에 매료되었다. 잡지 <개벽>의 주간이었던 이돈화는 그를 자기 방에 불러 못 나가게 문을 잠가 놓고 동화구연에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방정환의 어린이운동이 각계각층의 호응을 얻으면서 동참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주위로 모여들었다. 1923년 3월 손진태·정순철·고한승·진장섭·정병기 등 일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아동문예연구회 ‘색동회’가 결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방정환의 제안에 따라 어린이날 잔치를 준비하기로 했다. 어린이 인권을 널리 알리자는 취지였다.
방정환은 천도교소년회, 불교소년회, 조선소년군 등 40여 개 소년단체와 협의하여 1923년 4월 ‘조선소년운동협회’를 조직했고 이들은 5월 1일에 열린 최초의 어린이날 행사를 주관했다. 1925년 제3회 어린이날 행사에는 전국에서 30여만 명이 참석했다. 소년단체 수도 무려 220개에 이르렀다. 일제 강점기의 어린이운동은 그렇게 절정으로 치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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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제작된 <조선독립신문>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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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환이 펴낸 『사랑의 선물』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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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 행사를 구상한 방정환과 색동회 회원들

 

총칼 들고 싸우는 것만 독립운동이 아니다

어린이날의 성공적인 개최에 만족하지 않고 방정환은 그 활동 영역을 넓혀나갔다. 1923년에 창간한 <어린이>는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애정과 심혈을 쏟은 소년소녀잡지였다. 이 잡지를 통해 어린이들에게 민족혼을 일깨워주고자 했다. 뿐만 아니라 기라성 같은 아동문학가들을 발굴하여 거장으로 육성하기도 했다.

윤극영이 작사, 작곡한 동요 ‘반달’은 1924년 <어린이>에 발표된 작품이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으로 시작한 노랫말은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로 끝맺는다. 나라를 빼앗긴 어린이들에게 꿈과 용기를 심어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이밖에도 동요 ‘퐁당퐁당’, ‘옹달샘’, ‘기찻길 옆 오막살이’ 등으로 유명한 윤석중을 비롯해 아동문학의 거장 이원수도 <어린이>가 배출한 인물이었다. 창간 초기 <어린이>는 거저 준다고 해도 보지 않던 잡지였다. 하지만 192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독자가 10만여 명에 육박했는데, 당시 경성 인구가 30만 명 수준이었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발행 부수가 5만 부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놀라운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이는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헌신한 방정환의 노력 덕분이었다.그의 열정은 끝이 없었다. 1928년에는 20여개 국가에서 그림·사진·동요·동화·아동극 등의 작품을 받아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잡지 출간과 병행하여 무려 4년 간 준비한 행사였다. 자신의 몸을 혹사하는 바람에 방정환의 건강은 점점 나빠졌다. 병이 악화되어 얼굴이 붓고 코피도 자주 흘렸다. 결국 1931년 7월 23일 방정환은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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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소녀잡지 <어린이>의 모습(19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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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아동예술전람회 특집호로 간행된 타블로이드 신문 <어린이세상>

 

살아생전 그는 입버릇처럼 “10년 후의 조선을 생각하자”고 말했다. 일제의 폭압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어린이를 잘 키우면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이었다. 독립은 본질적으로 나라와 민족이 스스로 일어나는 일이다. 총칼 들고 싸우는 것만이 해답은 아니다. 각계각층에서 씨를 뿌리고 싹을 틔워야 만이 이뤄진다. 5월 5일 어린이날은 방정환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독립운동이었다.

        


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 서강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칼럼 ‘사극 속 역사인물’을 연재하고 팟캐스트 ‘역사채널 권경률’을 진행한다. 저서로는 『조선을 새롭게 하라』·『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 등을 출간했으며, 영상물 <시시콜콜 한국사 어워즈>도 선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