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인 함경남도에서 서울로 올라와 1931년 9월 종연방직회사 경성제사공장의 직공, 1932년 4월 경성부영버스의 차장으로 일을 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노동조합운동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게 제 독립운동의 시초가 되었죠. 이후에는 좌익노동조합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준비위원회의 총책임자에 권오경(權五敬), 조직부 책임에 정길성(丁吉成), 재정부 책임에 김응룡 (金應龍), 선전부 책임에서는 제가 분담하여 서울 시내 각 공장에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당시 서울에서는 좌익노동조합준비위원회뿐만 아니라 경성적색노동조합건설협의회·불·샛별 등과 같은 혁명적 노동운동 조직들도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었어요. 이 조직들을 총괄 지도하는 조직으로 1932년 8월 중순경 공원회(孔元檜)·문태화(文泰和)·이만규(異晩圭) 등이 중심으로 적위대 (赤衛隊)라는 비밀결사가 결성되었어요. 이후 제가 속한 좌익노동조합조직준비위원회도 그 산하 조직으로 들어가게 되었죠.
그해 9월 16일, 체포되던 날도 여느 때처럼 노동운동을 이어가고 있었어요. 부영버스 차고지에서 적색노동조합조직준비위원회 격문을 살포하던 중 저희 적위대를 예의주시하고 있던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었고, 결국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습니다. 동대문경찰서에서 취조받은 후 같은 해 10월 18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습니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이후 입에 담을 수도 없을 만큼 가혹한 취조와 고문들을 당했어요. 하지만 이 고통이 대한의 독립을 되찾는 과정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죠. 또 함께 싸우던 동지들을 떠올리면 제 신념이 더욱 굳건해졌어요. 옥고의 여독으로 복막염이 급격히 악화되었지만, 제가 했던 투쟁에 후회는 없습니다.
저는 나라를 빼앗긴 암울한 시기에 태어나 조국을 위해 싸우며 수많은 아픔을 겪었어요. 하지만 후손들이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에서 살아갈 수 있다면 제가 겪은 고난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피와 눈물로 지켜 낸 이 나라가 더 이상 자유와 행복, 또 정의를 잃지 않도록 잘 이어 나가 주시길 바랍니다. 대한독립만세!
해당 가상 인터뷰는 공훈전자사료관 및 독립운동인명사전에서 발췌한 역사적 사실을 기반하여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