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인터뷰
1930년대 공장 노동자로서
노동운동에 매진한 독립운동가, 고수복
광복의 기쁨을 맞이하지 못한 채 차가운 옥중에서 생을 마감한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어두운 철창 속에서도 독립을 향한 뜻을 굽히지 않았던 우리의 영웅들.
만약 시간을 거슬러 그들과 마주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나누게 될까?

고수복은 1930년대 공장 노동자로서 노동운동에 매진한 인물이다. 10월 18일 적위대 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붙잡힌 후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으며, 1933년 7월 19일 병보석으로 출옥하였다.
하지만 옥고의 여독으로 병세가 급격히 악화하여 1933년 7월 28일, 23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이미지 출처: ‘처음 입는 광복’ 캠페인(빙그레)
  • 적위대 사건 보도 (『동아일보』 1932.10.20.)
  • 고수복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Q. 어떻게 독립운동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고향인 함경남도에서 서울로 올라와 1931년 9월 종연방직회사 경성제사공장의 직공, 1932년 4월 경성부영버스의 차장으로 일을 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노동조합운동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게 제 독립운동의 시초가 되었죠. 이후에는 좌익노동조합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준비위원회의 총책임자에 권오경(權五敬), 조직부 책임에 정길성(丁吉成), 재정부 책임에 김응룡 (金應龍), 선전부 책임에서는 제가 분담하여 서울 시내 각 공장에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Q. 체포되었을 당시 상황을 들려주실 수 있나요?

당시 서울에서는 좌익노동조합준비위원회뿐만 아니라 경성적색노동조합건설협의회·불·샛별 등과 같은 혁명적 노동운동 조직들도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었어요. 이 조직들을 총괄 지도하는 조직으로 1932년 8월 중순경 공원회(孔元檜)·문태화(文泰和)·이만규(異晩圭) 등이 중심으로 적위대 (赤衛隊)라는 비밀결사가 결성되었어요. 이후 제가 속한 좌익노동조합조직준비위원회도 그 산하 조직으로 들어가게 되었죠.

그해 9월 16일, 체포되던 날도 여느 때처럼 노동운동을 이어가고 있었어요. 부영버스 차고지에서 적색노동조합조직준비위원회 격문을 살포하던 중 저희 적위대를 예의주시하고 있던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었고, 결국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습니다. 동대문경찰서에서 취조받은 후 같은 해 10월 18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습니다.

Q. 옥중 생활에도 독립을 향한 신념을 굽히지 않으셨어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이후 입에 담을 수도 없을 만큼 가혹한 취조와 고문들을 당했어요. 하지만 이 고통이 대한의 독립을 되찾는 과정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죠. 또 함께 싸우던 동지들을 떠올리면 제 신념이 더욱 굳건해졌어요. 옥고의 여독으로 복막염이 급격히 악화되었지만, 제가 했던 투쟁에 후회는 없습니다.

Q. 후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요?

저는 나라를 빼앗긴 암울한 시기에 태어나 조국을 위해 싸우며 수많은 아픔을 겪었어요. 하지만 후손들이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에서 살아갈 수 있다면 제가 겪은 고난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피와 눈물로 지켜 낸 이 나라가 더 이상 자유와 행복, 또 정의를 잃지 않도록 잘 이어 나가 주시길 바랍니다. 대한독립만세!

해당 가상 인터뷰는 공훈전자사료관 및 독립운동인명사전에서 발췌한 역사적 사실을 기반하여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