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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史)적인 여행

저마다 품고 있는 옛이야기,
성북동에서 만난 사람들

 

글·사진 박광일 (역사여행작가·여행이야기 대표)



서울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한양도성 안쪽만큼은 아니더라도, 성북동은 오랜 내력을 가진 동네답게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곳이다. 

그 이야기 중심에는 여러 사람이 있고, 그 흔적 또한 많이 남아있다. 

저마다 품고 있는 옛이야기를 따라 성북동을 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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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산방

오래된 마을, 성북동의 내력

한양도성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 ‘성북’은 동네 이름이었지만 지금은 지역 이름이기도 하다. 서울의 성북구란 이름이 성북동에서 비롯되었다. 오래된 마을, 성북동의 내력은 조금 특이하다. 경치는 아름답지만 논과 밭이 없으니 사람이 터를 잡고 살기는 어려운 곳이었는데, 조선시대 영조 때 한양을 지키기 위해 지금의 성북동 일대에 군사들을 주둔하도록 했다. 나라에서는 군인과 가족들이 살아갈 방안을 만들어 주었으니 맑은 개울(성북천)에 면포를 빨아 널어 하얗게 만드는 일, 그리고 궁궐에서 필요로 하는 메주를 쑤는 일을 맡겼다. 이렇게 최소한의 생존 기반이 생겨나자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수입을 늘리기 위해 좁은 땅에 과실나무를 심었다. 복숭아며, 자두를 심었으니 봄이면 울긋불긋한 꽃으로 계곡 전체가 빛이 났을 것이다. 그러자 한양 사람들은 성북동에 놀러와 경치를 즐겼고 그 명성은 널리 퍼져나갔다. 서울, 곧 한양에 살며 성북동에 별장을 짓는 사람도 있었고, 서울에 살기 어려웠던 사람이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성북동으로 오기도 했다. 이러한 성북동은 근대 이후 영역을 확장한 서울로 편입되기도 했고, 또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기도가 되기도 했으며, 지금은 서울의 성북구 성북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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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성곽 야경

한국의 미·한국의 멋,최순우 옛집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을 나오면 곧 성북동으로 가는 큰 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조금만 걸어가면 왼쪽 골목 안에 고즈넉한 한옥 한 채가 수리를 위해 분주하다. 성북동에서 처음 살펴볼 곳이니, 바로 ‘최순우 옛집’이다. 집의 주인이었던 최순우(1916~1984)는 미술사학자로서 한국의 미를 널리 알린 것으로 유명하다. 요즘에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란 책으로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최순우는 개성 출신의 미술사학자로 한국전쟁 당시 문화재를 부산으로 피난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으며, 우리나라 문화재의 국외 전시인 <국외 한국미술 5천 년>을 기획하기도 했다. 이 집은 최순우가 1976년부터 84년까지 살던 집으로, 이 일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도시형 한옥이다. 원래 이 집은 1930년대에 지은 한옥으로, 최순우가 이 집을 사들인 뒤 건축가의 도움으로 조금 모양을 바꾸었다고 한다. 전체 구조가 ㅁ자로 된 집 안채에는 사랑방·안방 등이 있고 일자형의 바깥채는 사무실로 썼다고 한다. 사랑채에 걸린 ‘두문즉시심산’이 적힌 현판은 ‘문을 닫으면 곧 이곳이 깊은 산이다’라는 뜻으로, 집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오수당’이라고 붙은 현판은 ‘낮잠 자는 집’이라는 뜻으로, 집이란 그 사람에게 가장 편안한 공간이 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최순우가 이곳, 성북동으로 옮겨 온 계기는 성북동에 있는 간송미술관의 전형필과의 인연 때문이다. 평소 전형필을 존경하며 따르던 최순우는 종로의 집을 허물게 되자 성북동으로 이사했다고 한다. 그런데 작고 후 1990년 재개발되며 이 집이 헐리게 되자 가족들이 보존에 대한 의사를 밝혀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참여하면서 2004년부터 <혜곡 최순우 기념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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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우 옛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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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산방전경(좌), 수연산방(우)

소설가 이태준의 집, 수연산방

최순우 기념관에서 성북동 안쪽으로 조금 더 걸어가면 고풍스러운 한옥, ‘수연산방’이 나온다. 지금은 전통찻집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이곳은 원래 문학가 이태준의 집이다. 이태준 작가는 철원에서 태어난 뒤 연해주와 도쿄 등을 다녀온 뒤 귀국해서 잡지사인 개벽사, 그리고 신문사인 『조선중앙일보』 기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처럼 서울 생활이 이어지자 1932년에 현재 위치에 땅도 사고 집도 지었다. 당시 이태준이 남긴 기록을 보면 전차가 다니던 동소문 역에서 20분 정도 걸어오면 성북동에 도착했다고 한다. 성북동 주변에는 복숭아밭과 포도밭이 있어서 분위기도 좋았다고 하니 그런 모습을 상상하며 집과 그 주변을 살펴보면 좋을 것 같다. 이태준은 수연산방에 머물며 ‘9인회’를 결성하고 작품활동을 했으며 장편소설 중에는 <황진이>, <왕자 호동> 등이 있다. 


최순우 옛집 주소 & 문의

서울 성북구 성북로15길 9  |  02-3675-3402

* 3월까지 보수공사로 휴관 중



도심 속 사찰,길상사

성북동에서 가장 유명한 곳으로 꼽히는 곳이 아마 ‘길상사’일 것이다. 그 내력이며, 절의 모습은 다른 절과 비교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고 있다. 성북동 길을 따라 선잠단지를 지나 약간 숨이 차다고 생각할 때쯤 길상사에 도착한다. 한성대입구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바로 올 수도 있다.길상사의 독특함은 들어가는 순간 절 경내의 전각 배치에서 느낄 수 있다. 극락전은 대체로 다른 절의 모습과 비슷한데 뒤쪽에 있는 요사채며 스님들이 수행하는 전각은 다른 절과 다른 모습이다. 일정한 가람배치에 따라 있어야 하는 천왕문이나 불이문 등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때 관심을 가지고 살펴볼 곳이 있으니 그 가운데 한 곳이 바로 ‘사당’이라고 한자로 쓴 건물이다. 건물의 이름도 독특한 편이니 다른 절이라면 ‘○○사’라고 붙였을 것이다. 이 사당에서 기리는 인물은 사당 앞 조그마한 공적비의 주인공인 김영한(법명 길상화)이다. 김영한은 원래 이 길상사 공간의 주인이었으니 그때는 절이 아닌 요정이었다. 당시 이름은 ‘대원각’이었다. 대원각의 주인인 김영한은 성공한 기생이었고 기명은 ‘진향’이었다고 한다. 그런 김영한이 문득 ‘무소유’를 실천하던 법정스님의 설법을 듣게 되면서 대원각을 스님에게 시주할 생각을 하게 되었고 또 실현된 것이다. 이렇게 요정 대원각은 깨달음을 구하는 절인 ‘길상사’가 되었다. 그런데 김영한이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자신의 독특한 경험이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젊은 시절 시인 백석과 인연이 있던 김영한은 ‘대원각의 값어치를 백석의 시 한 줄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표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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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좌), 길상사 공덕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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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 관음보살상

성모상을 닮은 관음보살상

관음보살은 불교에서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존재이다. 중성적인 존재였는데 중국 송나라 이후 여성적인 모습으로 많이 묘사되었다. 길상사 관음보살상을 살펴보면 천주교 성당의 성모상을 닮았다. 실제로 혜화동성당의 성모상과 닮았다. 두 작품을 만든 조각가 최종태 교수는 천주교 신자로 알려져 있는데, 젊은 시절 성당에 세울 성모상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에서 불교의 반가사유상을 보며 새로운 방향을 찾았다고 한다. 그러한 가운데 평소 김수환 추기경과 교류하던 법정스님의 요청으로 길상사에 관음보살상 조각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평소 최종태 교수는 ‘땅에는 나라도 종교도 따로따로 있지만, 하늘로 가면 경계가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길상사 주소 & 문의

서울 성북구 선잠로5길 68  |  02-3672-5945



만해 한용운의 거처, 심우장

길상사를 떠나 한양도성 성벽 가까운 곳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누군가 앉아있는 모습의 조각을 만날 수 있다. 바로 만해 한용운의 동상이다. 그 동상 옆으로 난 골목으로 올라가면 한용운이 만년을 보낸 집, ‘심우장’이 있다. 원래 심우, 곧 소를 찾는다는 것은 불교의 수행 방법 가운데 하나로 자신의 본성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절에 가면 건물에 심우의 모습을 10개의 그림으로 그린 ‘십우도’도 볼 수 있다.한용운은 「님의 침묵」을 지은 시인으로,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으며 신간회·불교 청년 비밀결사를 이끌었던 독립운동가이다. 한용운이 성북동으로 옮겨온 시기는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던 시기였다. ‘수양동우회’ 사건을 비롯해 여러 사건을 조작해 종교인을 탄압하던 1933년, 성북동으로 옮겨온 것이다. 원래 이 집은 다른 스님이 초당을 지으려고 마련한 공간이었는데, 여기에 그는 가지고 있던 돈과 지인에게 빌린 돈으로 집을 지었다고 한다. 한편, 이곳은 조선총독부를 뒤로 둔 북향집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심우장은 한용운의 거처이자 사무실이었으며, 1937년에는 일송 김동삼의 장례를 치러주기도 했다. 그는 여기서 1944년 입적할 때까지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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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우장 전경(좌), 심우장 내부(우)

심우장 주소

서울 성북구 성북로29길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