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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

국가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살아있는 것은 불충,

호남의 자결순국지사
정두흠

 

글 독립기념관 독립운동가 자료발굴TF팀



독립기념관은 2018년부터 독립운동가를 발굴하여 국가보훈처에 유공자로 포상 추천하고 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희생한 분을 존중하고 기억하는 정부의 의지와 국민적 관심을 담은 것이다. 

2023년 매월 독립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를 소개한다.


정두흠 (鄭斗欽)

본적 및 주소 :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운월리 119

생몰 : 1832.10.28(음) ~ 1910.10.25(음)

자·호 : 응칠(應七)·운암(雲巖)

포상추천 : 2021년 12월

포상 : 2022년 11월 순국선열의 날 계기

훈격 : 건국훈장 애국장

운동방면 : 의열투쟁(경술국치 자결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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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흠 초상


‘상소에 미친’ 강직한 관리

정두흠은 1832년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운월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타고난 성품이 온후하고 충효와 학문이 세상의 모범이 될 만하다는 평을 받았다. 여러 차례 과거에 등과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고향에서 학문에 몰두했다. 48세에 이르러서야 집안의 권고로 관직에 나아가 가주서·성균관 전적·사간원 정언·부사과·사헌부 지평 등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출사는 늦었지만 13년간 주요 관직에 근무하며 고종을 모시는 신하로서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구한말 일제와 서구의 국권침탈이 가속화되면서 조정과 나라가 격랑 속에 휘말리자, 참된 정사를 주청하는 간언을 빈번하게 올렸다. 빈번한 상소에 스스로도 자신을 ‘상소에 미친 사람(疏狂)’이라고 할 정도였다. 외세의 국토침범을 우려한 반(反)개화·매관 폐단의 혁파·직언의 확대 등을 요청하며 만언소를 올리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여러 번 체직되기도 했다. 더 이상 자신의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1892년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대신 고향집 뒤에 망화대(望華臺)를 짓고 매일 여기에 올라 북쪽을 향해 네 번 절하며 망국의 현실을 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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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화대비 (전남 장흥군 유치면 운월리, 1920년 건립)


충절을 애도하고 시대를 개탄하다

정두흠이 낙향해 있던 시기는 한국근대사의 대 격변기였다. 동학혁명·갑오개혁·을미사변 등 큰 파란이 있을 때마다 그는 울분에 찬 심경을 시가로 남겼다. 일국의 국모가 시해된 을미사변의 경우에는 극심한 충격으로 침식하지 못해 크게 앓아누웠다.1904년 2월 한일의정서,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연이어 강제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은 사실상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을미년(1895년)에 이어 전국에서 또 다시 의병이 일어나자, 그는 거의를 독려하는 한편 자신이 노쇠하여 동참하지 못함을 한탄하기도 했다. 일제의 행태에 대한 분노는 순국투쟁으로 이어졌다. 1905년의 두 달도 채 남지 않은 기간 동안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10여 명의 애국지사가 자결로 일제에 항거했다. 그는 민영환·조병세·송병선·홍만식·김봉학 등의 자결 소식을 접하고 이들의 충절을 애도하는 만시를 지었다. 특히 민영환은 사헌부 재임 시 교유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 충격이 더욱 깊었다. 이듬해인 1906년에는 면암 최익현의 거의 소식에 “지금부터는 감히 우리나라에 사람이 없다고 기롱(欺弄)하지 못할 것”이라 하였는데 대마도에 끌려간 최익현이 순국하여 시신을 운구해 온다는 소식에 “황천길을 함께 가지 못함이 한스럽다”고 하며 오열했다.


무슨 면목으로 저 하늘의 해와 달을 대할 것인가

1910년 경술국치의 소식을 들은 정두흠은 “하늘에 두 개의 해가 없으며 나라에 두 임금이 없다. 신하 된 사람이 국가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살아있으니 불충의 죄를 면할 수 없다. 무슨 면목으로 고개를 들어 저 하늘의 해를 볼 것인가. 살아서 설 곳은 없고 죽어서 갈 땅만 있다”고 통곡하며 식음을 전폐했다. 문을 걸어 닫고 하늘을 보지 않은 지 한 달여가 지났을 때 자식들을 불러 “조정의 일이 이 같은데 내가 어찌 하루라도 구차히 살겠는가. 내 마땅히 관을 수레에 싣고 대궐 문밖에서 통곡하며 죽을 것이다. 너희들은 속히 채비를 갖추라”고 했으나 자식들은 차마 시행할 수 없어 눈물만 흘렸다. 뜻대로 되지 않자, 그는 스스로 독약을 삼키고 뜰에 떨어져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가 음독한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한 자식들이 울부짖으며 백방으로 조치했으나 가망이 없었다. 시간이 흐른 뒤, 1911년 10월 그의 소기(小朞)를 마친 부인 한씨가 자식과 조카들에게 울면서 말하길, “당시 약을 드실 때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라고 하며 그제야 그가 음독 자결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부인 역시 음독 자결로써 그의 뒤를 따랐다.


손명사(損命詞)와 처변삼사(處變三事)

정두흠은 절명시인 「손명사」를 남겨 자신의 죽음이 대의를 지키기 위한 선택임을 밝혔다. 이는 당시 항일의병전쟁을 선도하던 화서학파의 행동강령이기도 했다. 그는 관직에 나가기 전, 화서 이항로의 문하에서 김평묵·유중교와 함께 수학했다. 화서학파는 개화정책과 외세 침탈에 대처하기 위해 1895년 제천의 장담이라는 곳에서 강습례와 향음례를 대규모로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유인석을 비롯한 수백 명의 유학자들이 숙고한 끝에 ‘거의소청(擧義掃淸)·거지수구(去之守舊)·자정치명(自靖致命)’의 ‘처변삼사’를 향후 행동방안으로 결의했다. 즉, 의병 거의[거의소청]·대의를 위한 망명[거지수구]·순절[자정치명]은 각각 처신은 달라 보이나 동일한 이치이므로 각자 자신에게 적합한 방안을 선택하기로 한 것이다. 후일 처변삼사는 항일의병전쟁의 준거이자 한말 선비들의 기본적 행동강령이 되었다. 그는 팔순을 바라보는 노쇠한 자신의 처지에 가장 치열하게 일제에 항거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객이 와서 전하길 나라가 없어졌다 하기에

미칠 듯한 심사에 눈물 흘리며 처참해지네

발꿈치 들고 어찌 청산의 흙을 밟으랴

문 걸어 닫고 대낮 하늘의 해를 보지 않네

황제를 업고 죽은 육수부의 정충에 부끄럽고 

진나라 물리친 제나라 노중련의 대의를 생각하네

나라가 망함은 용납이 어렵고 구제할 수 없는 죄이니

이 몸 죽어 선현을 따르는 것만 못하리라


「손명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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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흠의 절명시 「손명사」


경술국치에 항거한 호남의 자결순국 지사 3인 

“나라의 조정에서 임금을 가까이 모신 신하로 물러나 시골에서 늙어가다가 나라가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혹은 칼로 찔러, 혹은 약을 먹고, 혹은 단식하여 죽은 자가 호남에 세 사람이 있다. 장헌 정재건, 시랑 장태수, 한 사람은 공이다. … 나는 서산의 고사리를 캐고 동해의 물을 가져다 그의 묘에 올리고자 한다.” 호남의 대표적인 의병장 기우만은 1912년 정두흠 묘갈명 서언에 이렇게 남겼다. 1910년 한 해 동안 전국에서 40여 명에 달하는 지사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두흠의 자결을 전후하여 호남에서는 9월 4일 전남 곡성의 정재건이 칼로 자결했고, 11월 27일 전북 김제의 장태수가 단식으로 순절했다. 두 분은 1991년과 1962년에 각각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으나, 당대에는 고귀한 순절로 애도되었던 정두흠의 자결은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백 년의 세월 속에 묻혀버렸다. 천만다행으로 장흥문화원과 홍순석 교수가 그의 시문집 『운암집(雲巖集)』을 번역·출판하는 과정에서 행적과 결의가 다시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나 정두흠은 2022년 11월 순절 102주년 만에 드디어 자결순국지사로서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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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집(雲巖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