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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안중근’
영웅인가, 테러범인가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최근 영화 <영웅>이 개봉하였다. 이는 2009년 10월 26일 LG아트센터에서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을 기념해 초연한 국내 창작 뮤지컬 <영웅>을 영화화한 것이다. 

뮤지컬 <영웅>은 2022년 12월까지 9회 공연하였고, 2011년 8월 뉴욕과 2015년 2월 하얼빈 등 해외에서도 두 번이나 공연하였다.

 또한 공연 때마다 매진 행진을 이어갔고, 관객들에게 찬사를 받으며 최우수 작품상 등을 수상하였다.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영화 또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그런데 일본 우익 성향의 온라인에서는 안중근을 ‘테러리스트’, ‘살인자’로 간주하며, ‘911테러’를 예찬한 영화라는 악평을 쏟아졌다. 

이렇듯 한일 간에 안중근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데, 그 흐름을 역사 속에서 쫓아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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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선 화백의 안중근 의거 민족기록화 (1976)

줄곧 ‘영웅’으로 숭앙(崇仰)된 것은 아니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당시에 친일파들은 고종 황제에게 “일본으로 건너가 사죄해야 하고 주범·공모자를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주장을 서슴지 않았다. 실제 대한제국 황실과 정부는 일본에 조문단을 파견하였고, 일부는 ‘국민사죄단’을 보내기도 하였다. 당시 민중들이 안중근의 거사를 일제의 만행에 대한 보복으로 여겨 크게 환영하였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이토가 총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일본 내에서는 한국의 대은인인 이토를 사살한 것은 은혜를 원수로 갚은 행위라고 하거나, 여러 신문은 이토의 죽음에 ‘조난(遭難)’·‘춘사(椿事)’라고 하여 안타까움을 표시했지만, 안중근을 ‘흉도(凶徒)’·‘흉한(兇漢)’·‘흉행자(兇行者)’ 등이라 보도했다. 일제는 안중근을 살인마로 몰아갔다. 안중근은 재판 과정 내내 “나는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이토를 살해한 것이다”라고 강조했지만, 일제는 ‘살인자’로 몰아가기 위해 증거를 조작하는 한편 그를 끊임없이 회유하였다. 더욱이 일제는 ‘이토공 암살자 안중근’이라고 적힌 사진엽서를 발행하여 이를 기정사실로 하였다. 

당시 천주교계는 ‘살인’이라는 종교적 죄악과 애국적 헌신이란 두 가지 사실에 직면하여 신자였던 안중근에 대해 “안중근을 순교자로 볼 수 없다”라며 ‘살인자’로 낙인찍었다. 이에 안중근은 평신도 자격이 박탈되었고, 그로부터 83년이 흐른 1993년에서야 자격이 복권되었다. 의거 직후 일본인들의 가장 큰 관심은 ‘왜, 안중근이 이토를 죽였냐’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개인적인 원한’으로 신문에 보도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었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안중근의 입을 통해 “이토를 처단한 이유가 쓰러져 가는 대한제국을 위해, 동양평화를 위해 그랬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일부 신문에는 개인적 원한이 아닌 ‘대의(大義)’라는 표현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이는 안중근이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은 직후부터 3월 26일 순국할 때까지 뤼순 감옥의 헌병이나 간수들이 그에게 200여 점의 휘호를 받아 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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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엽서 사진

사진 맨 아래 ‘이토 공을 암살한 안중근. 한인은 예로부터 암살 맹약을 하고 무명지를 절단하는 풍습이 있는데 그 손을 촬영한 것’이라고 적혀있다.


민족운동이 본격화된 이후부터 칭송되다

비록 안중근이 이토를 처단하였지만, 일제에 국권을 빼앗겨 한반도는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이후 민족운동이 본격화하는데 이때 주목받은 인물이 안중근이었다. 국내뿐만 아니라 연해주·상하이·미주 등지에서 안중근 관련 전기가 쏟아졌으며, 그를 추도하는 행사가 열렸고 유족에게 국외 정착을 위한 모금 운동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또한 그를 기리고자 <안중근 의가(義歌)>가 불렸고, 1916년 사립학교 한영서원 교사들이 만든 『애국창가집』 에 안중근은 곽재우·이순신·최익현 등과 더불어 실려 영웅의 모범으로 칭송되었다. 이 노래를 가르친 교사가 체포되어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더욱이 1928년에는 상하이로 망명한 한인 영화인들이 안중근에 관한 <애국혼>이라는 무성영화를 제작·상영하기도 하였다. 1931년에는 출판사 삼중당을 설립한 서재수가 『하얼빈 역두의 총성』 을 펴내 큰 관심을 끌었다. 



광복 이후에는 어떻게 기억하고 기념했을까

첫 기념사업은 1945년 12월 11일 장충단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을 비롯하여 각계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추진하게 된 ‘안중근 동상 건립’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박문사(博文寺) 안(현 장충동 신라호텔 자리)의 이토 히로부미의 동상을 헐고 안중근 동상을 세우자는 것이었다. 이에 ‘의사안중근동상건립기성회’를 조직하였지만, 동상 건립은 광복 후 혼란 속에 차일피일 미뤄졌고, 6·25전쟁에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휴전 이후에는 기금 문제와 설치 장소를 두고 난항을 거듭하다가 1959년 5월 남산 기슭 왜성대 옛터(현 숭의학원)에 동상이 제막되었다.

와 함께 안중근 관련한 많은 책이 출판되었는가 하면, 1946년 1월 수도극장에서 <안중근 사기(김춘광, 청춘극장)> 연극이 첫 공연하였고, 그해 5월에는 이를 이구영 감독이 35mm 무성영화 <의사 안중근>으로 제작·상영하였다. 이를 광고하는 어구 중에서 “이 영화를 통하여 우리 겨레는 무엇을 찾을 것인가?”라고 되물었다. 이외에도 연극단체는 <안중근의 최후>, <윤봉길 의사> 등을 공연하였다. 1959년 4월에는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이 두 번째 영화로 만들어져 큰 인기를 끌었다. 이후 1972년 2월 <의사 안중근> 영화가 상영되었고, 그해 10월에는 안중근 유묵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외에도 여러 방송국에서 특별기획으로 안중근 관련 프로그램을 제작·편성하였다. 특히 1998년 9월 SBS가 북한에서 1979년 제작한 ‘안중근 이등박문 쏘다’라는 극영화를 방송하기도 하였다.추도 열기도 뜨거웠다. 의거일인 10월 26일과 순국일인 3월 26일로 기념식이 행해졌고, 1946년 3월 안중근선생기념사업협회가 결성되었고 이후 이를 주관하였다. 이때 광복 후 첫 추도회가 서울운동장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치러졌는데 이날 ‘안중근의사추념가’도 불렸다. 추도 관련 기사에는 “대의(大義)는 영생한다”, “이등박문을 저격하여 세계에 백의민족의 기개와 울분 용맹과 담력을 보여주신 선생”이라는 글귀가 달렸다. 1947년 3월 명동성당에서는, 한국천주교 전체의 입장은 아니었지만, 추도 미사가 열렸고 이는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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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 포스터 (1959년)


일본은 안중근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봤을까

패망 직후 일본 교과서에는 안중근 관련한 내용이 없었는데, 얼마 뒤부터 이토가 조선인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기술하여,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안중근을 ‘암살자’로 규정하였다. 이를 계기로 일본이 한국을 합병했다는 식으로 역사를 왜곡하였다. ‘한일병합조약’은 이토의 죽음과 상관없이 예정대로 진행됐음에도 말이다. 이는 1970년대까지도 이어졌고 더욱 확대되었다. 1980년대 초, 재일 한인 교포들이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에 들렸을 때 “안중근이 우리 민족에 박해를 가한 이토를 저격한 애국지사”라고 설명하자, 한 교포가 “나쁜 사람 아닌가”라고 소리쳤다는 우스갯소리도 그냥 나온 게 아니다. 1982년 일본 교과서 파동 이후에도 여전히 안중근을 거론하지 않거나, ‘암살자’로 표기하였다. 또는 ‘이를 계기로’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였다는 식으로 기술하였다. 1990년대 이후, ‘계기로’라는 용어는 사라졌고 간혹 안중근을 ‘민족운동가’로 언급하였지만 ‘암살’ 혹은 ‘사살’이라는 단어가 혼용되었다. 

그런데 일본 우익의 망언은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강화되었다. 1982년 마쓰노 유끼야스(松野幸泰) 일본 국토청 장관은 “한국 교과서에 이토를 ‘원흉’이라고 부르고 암살자인 안중근을 ‘영웅’시한다”라고 비난하였고, 1995년 3월 종전50주년국민위원회 회장 오쿠보(奧野誠亮)는 “이토를 암살한 안중근은 한국에서 독립투사로 신격화되고 있지만, 일본 측면에서 보면 살인자에 불과하다”라는 망언을 일삼았다. 더욱이 2000년대 일본 내 우익이 기세를 부리면서는 그러한 경향이 더 두드러졌다. 2005년 출판된 만화 『혐한류』에는 ‘한국을 이해했던 이토 히로부미를 멍청한 테러로 죽게 했다’는 궤변을 내놓거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를 ‘어리석은 테러리스트’라고 묘사해 반일 감정을 자극하였다. 

일본 전 총리를 지낸 스가 요시히데는 2014년 중국에 안중근기념관이 개관하자, 안중근을 “일본의 초대 총리를 살해, 사형판결을 받은 테러리스트”라고 말해 일본 우익 세력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는 아주 상반된 삶을 살았다. 이토를 언급하지 않고 일본의 근대사를 설명할 수 없듯이, 한국의 안중근을 빼놓고 1900년대 후반의 민족운동을 언급하는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안중근을 ‘영웅’시 하기보다는 안중근이라는 개인을 통해 당시의 사회와 국제관계 속에서 반제국주의운동을 부각하고, 아울러 그의 의거가 ‘동양평화’를 위한 ‘인류 보편의 가치’를 구현하고자 하였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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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만화 『혐한류』 표지

일본에서 2005년 발매되어 시리즈 누계 100만 부의 판매고를 올린 만화 『혐한류』 표지다. 

이 만화는 ‘한국을 이해했던 이토 히로부미를 멍청한 테러로 죽게 했다’고 궤변을 내놓거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를 ‘어리석은 테러리스트’라고 묘사해 반일 감정을 자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