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삼일절을 맞아 그려보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의 내일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글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1908년 10월 문을 연 서대문형무소는 1987년 11월 폐쇄될 때까지 80년간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과거의 역사를 교훈으로 삼고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가의 신념을 기리기 위해 1998년 11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그 존재만으로도 가치가 충분하지만, 삼일절을 맞아 과거와 현재를 되짚어보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항일의 역사를 몸소 겪은 장소

서대문형무소는 1908년 경성감옥, 1912년 서대문감옥, 1923년 서대문형무소, 1945년 서울형무소, 1961년 서울교도소, 1967년 서울구치소로 이름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1987년 11월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한 뒤 역사성과 보존 가치를 고려하여 보안과 청사, 제9~12옥사, 공작사, 한센병사, 사형장 등만 남겨두고 나머지 시설은 모두 철거되었다. 바로 다음 해인 1988년 2월 국가사적으로 지정(제324호)되었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98년 11월 지금의 역사관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서대문형무소는 일제강점기 당시 동양 최대 감옥이라는 불명예스러운 타이틀에 걸맞게 94,000여 명을 수용하였다. 한 연구에 따르면, 남아 있는 4,800여 명의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카드를 분석한 결과 87.73%가 소위 사상범으로 분류되어 치안유지법, 보안법, 소요, 출판법 위반 등의 혐의로 수감되었다고 한다. 수형기록카드가 남아있지 않은 독립운동가를 제외하고도 4,200여 명에 달하는 독립운동가의 숫자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실로 엄청나다. 이들의 형량은 1~4년 사이가 52.65%였고, 10년 이상의 장기수들과 치안유지법으로 인한 사형수도 적지 않았다. 서대문형무소의 사형수만 별도로 보면, 1908년부터 1945년까지 관보를 통해 확인한 숫자가 모두 493명이었다. 이 수치는 전국 형무소 가운데 이곳에서 가장 많은 사형집행이 이루어졌음을 말해준다. 그중에는 의병, 의열투쟁, 무장 항쟁 등의 활동을 펼치다 순국한 독립운동가도 포함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은 인물이 92명(18,7%)인데, 서훈을 받지 못한 독립운동가들까지 합하면 130여 명에 달한다는 연구 논문도 있다.   

3·1운동에 국한하면 1919~1920년 사이에만 1,013명이 수감되었다. 이들은 학생, 종교인, 교사 등 지식층은 물론이고 상인, 자영업자, 노동자 등 70여 종에 이를 정도로 직업이 다양하고  연령대도 고른 분포를 보였다. 이를 통해 3·1운동이 전 계층이 참여한 민족운동이었음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3·1운동 수감자들은 일제로부터 정치사상범으로 취급당하여 99% 이상이 6개월 이상의 형량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에 따라 삼일절 하면 떠오르는 곳이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 되었고, 개관을 앞둔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이 역사관 인근에 건립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 근현대사의 산교육장

일제에 맞선 투쟁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서대문형무소는 국가 사적지임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지정한 항일·독립운동 등록문화재 가운데 유일하게 역사관으로 재탄생한 장소이다. 이후 한국 근현대사의 산교육장으로 활용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현재는 외국인과 국외 거주하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 꼭 들리는 장소로 자리 잡았다. 또한 정치인들의 발길도 꾸준히 이어지는데, 2019년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후 첫 삼일절 경축식을 이곳에서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이곳은 일본 정치인들이 과거에 대한 반성과 사죄의 의미로 찾는 장소이기도 하다. 2001년 10월 15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방문하였고, 2015년 8월 광복 70주년을 앞두고 하토야마 전 총리가 역사관 내 추모비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였다. 2017년 8월에는 일본 공명당 중·참의원들이 추모비를 찾아 헌화하였고, ‘독립운동가의 고통에 공감하고, 역사를 직시하겠다’는 말을 남겼다. 한편 2019년 7월에는 역사관에서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에 규탄대회를 열고 일본제품 불매 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실내뿐만 아니라 야외전시장을 활용하여 다양한 행사나 특별전시를 열고 있다. 또한 4개 국어 도슨트 서비스, 근현대사 및 독립운동사 강좌, 청소년 대상 강좌 및 체험학습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관람객을 맞는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개관한 이래 내·외국인을 합하여 한 해 평균 70만 명을 웃돌던 관람객 수가 2019년에만 100만 명을 넘었다. 2021년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한국 관광 100선’에 포함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의 위상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아쉬운 부분도 있다. 1945년 8월 광복 이래로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수많은 사람들이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 수감되었고 사형을 당한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에만 치우친 면이 없지 않아 절반의 역사만 보존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그렇다고 민주화운동에 관련된 전시가 전연 없는 것은 아니다. 2020년부터 매년 5·18민주화운동 서울기념식이 치러졌고, 장준하 선생 탄생 100주년(2018.8), 부마민주항쟁 40주년(2019.7) 등의 행사가 개최되는가 하면 매년 8월에는 8·15서대문독립민주축제가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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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서대문형무소 배치도이며, 표시한 부분이 현재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부지이다.

독립재단으로 격상해야 할 역사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 발전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을 같이 기리는 역사의 장소로 거듭나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몇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먼저 지금의 소규모 조직으로는 박물관의 순수 기능인 전시와 연구를 병행하기 힘들기 때문에 이를 확충하는 것이 우선이다. 무엇보다 많은 관람객을 수용하고 민주화운동까지 전시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과거 서대문형무소를 복원해야 한다. 현재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의 대지면적은 28,112㎡로 본래 면적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복원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원형복원의 명분인 최초 도면이 없다는 이유로 부근 주민들이 경제적 이익 보호과 개발 논리를 내세웠다. 그러던 차에 2009년 1월 국가기록원에서 서대문형무소 1936년대 도면을 우연히 발견하면서 복원에 대한 주장이 탄력을 받았다. 2009년 1월 말 문화재위원회가 서대문구청의 종합복원계획을 조건부로 가결하였고, 서대문구청은 전체 3단계 복원정비안을 다듬었다. 그러나 복원 비용 마련을 두고 뾰족한 대안이 없어 차일피일 미뤄졌고, 2021년 이후에서야 구치감과 부속창고 등이 선별적으로 복원이 추진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독립재단으로 격상되어야 한다. 현재 역사관은 서대문구도시관리공단에서 운영하고 있는데, 역사적 가치나 위상에 맞지 않을뿐더러 막대한 재정을 충당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등재하고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민주화운동까지 아우르는 손색없는 박물관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통 큰 결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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