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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황포탄에서

일제 침략의 거두를 응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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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장세윤(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1922년 3월 28일, 김익상은 의열단의 일원으로 일본군 육군대장이자 남작인 다나카 기이치 사살을 결행하였다. 중국 상하이 황포탄에서 동지 오성륜, 이종암과 함께 순차적으로 다나카를 저격하였으나 결과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황포탄의거는 성패 여부를 떠나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항일정신’ 그 자체에 의의가 있다. 지금부터 100년 전 독립의지가 담긴 총성이 울려 퍼진 장소, 황포탄으로 들어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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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상


치밀한 거사 계획의 시작

김익상(金益相)은 1920년 중국 베이징에서 인생의 큰 분수령이 된 의열단 단장 김원봉(金元鳳)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1919년 11월 창단한 의열투쟁 독립운동 조직인 의열단은 이 시기 본격적으로 ‘암살·파괴’투쟁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후 김익상은 1921년 9월 11일 국내로 잠입하였고, 다음 날 12일 오전 10시 20분경 전기시설 수리를 하러 온 것처럼 가장하고 남산 기슭에 있는 조선총독부 청사로 들어갔다. 전광석화처럼 빠른 동작으로 먼저 2층에 있는 비서과(秘書課)에 폭탄을 던지고, 이어 회계과에 폭탄을 던졌다. 비서과에 던진 폭탄은 폭발하지 않았지만, 회계과에 던진 폭탄은 큰소리와 함께 폭발하여 여러 명의 일본 헌병들이 놀라 뛰어올라왔다. 김익상은 이들에게 “2층으로 올라가면 위험하다”라는 말을 남기고 태연하게 조선총독부 청사를 빠져나왔다.

이후 베이징으로 돌아간 김익상은 1922년 2월 3일 상하이로 가서 김원봉을 만나 다시 거사 계획을 협의하였다. 이때 김원봉의 소개로 동지 오성륜(吳成崙)을 만났다. 그때 마침 ‘일본군 육군대장이자 남작(男爵)인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가 필리핀을 방문한 뒤 3월 28일 상하이에 도착한다’는 보도가 났다. 정보를 입수한 의열단은 다나카를 사살하여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온 천하에 알릴 것을 결정하고 치밀한 거사 계획을 세웠다. 다나카는 1920년 10월 일본 당국이 조작한 ‘훈춘(琿春)사건’과 한인 무장세력 탄압을 이유로 중국 연변(북간도) 지방에 침공하여 수많은 한인 동포들을 학살한 ‘간도 대학살(일명 경신참변, 혹은 간도참변)’ 당시 육군대신(육군상)을 맡고 있었다. 또한 1919년 3·1운동의 무력탄압과 이른바 ‘간도지방 불령선인(不逞鮮人) 초토(剿討)계획’의 수립과 실현을 통해 독립운동을 탄압하고 많은 한인들의 학살에 관여하여 책임이 있는 인물이었다.             

의열단원들은 ‘다나카를 누가 처단할 것인가’를 의논하였고, 김익상은 물론 의열단 동지인 오성륜, 이종암(李鍾巖) 등이 ‘다나카를 처단하겠다’고 나섰다. 논의 끝에 결국 ‘명사수’로 알려진 오성륜이 제1선에서, 김익상이 제2선에서, 이종암이 제3선에서 권총과 폭탄(수류탄)을 준비하여 차례대로 다나카를 저격하기로 계획하였다. 특히 김익상은 이미 ‘조선총독부청사 투탄의거’라는 큰일을 결행했기에 김원봉은 이번 거사 기회를 오성륜에게 먼저 주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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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상의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좌) / 육군 중장 시절의 다나카 기이치(임경석 제공)(우)


황포탄에 울려 퍼진 총성

김익상·오성륜·이종암 이 세 사람은 거사를 실행하기 위하여 1922년 3월 27일 아침 6시 상하이 황포탄(黃浦灘) 부두에 나가 현장을 점검하며 기회를 엿보았다. 하루를 기다린 끝에 3월 28일 오후 3시 30분, 다나카 일행이 탄 고급 여객선이 황포탄 세관부두로 접안하였다. 여러 여객과 함께 걸어 나오는 다나카를 본 오성륜이 먼저 권총으로 2발의 총탄을 발사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다나카를 앞서 걷던 미국인 스나이더 부인이 총탄에 맞고 말았다. 놀란 다나카가 황급히 대기 중인 자동차로 도망치자 두 번째로 김익상이 권총으로 2발을 쏘았지만, 모자만 꿰뚫고 지나가 버렸다. 김익상은 이어서 다나카에게 폭탄(수류탄)을 던졌으나 폭발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뒤에 있던 이종암이 다나카가 탄 자동차에 폭탄을 던졌지만, 그것을 본 영국 경찰이 폭탄을 강물 속으로 차버리는 바람에 거사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의거 직후 세 사람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힘껏 도주하였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서 오성륜은 현장 부근 쓰촨로(四川路)에서 체포되었고, 김익상 역시 추격하던 영국 경찰이 쏜 총탄에 손과 발을 맞아 중국 순경에 붙잡혔다. 이종암만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다. 김익상은 피신 중에 중국 순경이 달려들자 하늘을 향해 총을 쏴서, 무고한 희생을 막겠다는 의열투쟁의 정신과 자세를 보여주었다.


법정투쟁 그 이후

경찰에 붙잡힌 김익상과 오성륜은 일본총영사관에 구금된 뒤 가혹한 심문을 받았다. 김익상과 오성륜은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감옥에 분리되어 수감되었다. 그러나 5월 2일 새벽 2시경 오성륜은 함께 있던 일본인 죄수 다무라 주이치(田村忠一)의 도움을 받아 기적적으로 감옥을 탈출하여 상하이 외곽으로 피신하였다. 이에 당황한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은 ‘5만 원’이라는 그 당시 기준으로 거액의 현상금을 걸고 오성륜 체포에 혈안이 되었지만, 끝내 오성륜을 잡지 못하였다. 일본 당국은 김익상을 곧바로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압송하였는데, 오성륜의 탈옥에 놀라고 사건의 파장을 염려하여 서두른 것이었다.           

김익상은 나가사키지방재판소에서 무기징역을, 나가사키공소원(長崎控訴院)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1924년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다시 여러 번 징역이 감형되어 1936년 8월 2일 가고시마감옥에서 출옥하였다. 출옥 후 얼마 지나지않아 일제 경찰에 연행된 김익상은 현재까지 종적이 묘연하다. 또한 탈옥한 오성륜은 러시아 유학을 한 뒤 1926년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중국혁명운동과 한국독립운동에 참가하여 항일투쟁을 지속하였다. 그러나 만주지역에서 동북항일연군의 고위 간부로 활동하다가 1941년 1월 말 만주국 토벌대에 체포되어 투항, 변절하고 말았다. 반면 이종암은 중국과 고향인 대구 일대를 왕래하면서 계속해서 의열단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종암은 1925년 11월 5일 경북 달성군 달성면(현 대구시 달성) 소재 이기양(李起陽)의 산장에서 일제 경찰에 잡히고 말았다. 결국 그는 1926년 12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3년형을 선도받고 이후 감형되어 1930년 5월 28일 대구형무소에서 출옥하였지만 병고로 순국하고 말았다.             

한편 황포탄의거로 불행하게 아내를 잃은 미국인 스나이더는 이후 김익상과 오성륜 등이 조국독립과 민족해방을 위하여 분투하는 투사임을 알고 일본사법당국에 ‘김익상 등을 관대하게 처리해달라’는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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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부터) 김익상·오성륜의 다나카 기이치 사살 시도를 다룬 기사, 『동아일보』(1922.4.7.) / 오성륜 / 이종암


황포탄의거의 의미와 평가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은 1933년 4월에 소위 ‘조선암살사건표’를 작성하여 치안 당국과 관계자들에게 배포하여 경각심을 촉구하였다. 이 표를 보면 일제강점기의 대표적 항일 의열투쟁 사건 8종이 집약되어 있다.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의거’, 강우규 의사의 ‘사이토(齋藤實)총독 폭탄투척’ 등과 함께 주요 사건으로 김익상 의사 등의 ‘다나카 육군대장 저격사건’을 들고 있다. 그만큼 황포탄의거가 당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음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황포탄의거는 한·중·일은 물론 구미 각국에도 널리 알려지는 등 한국인들의 치열한 독립운동을 알리는 효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황포탄의거 직후 ‘자신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성명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체포된 김익상이 일본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자 임시정부 외교총장 조소앙은 일본 정부의 우치다(內田康哉) 외무대신에게 강력한 항의서한을 전달하였다. 주요 내용은 ‘이번에 김익상을 사형에 처할지라도 이후에 또 무수한 김익상이 생겨날 것’이라는 전언이었다. 실제로 조소앙의 서한대로 한국인들의 저항은 그치지 않았고, 중국 상하이 등지에서 의열투쟁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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