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황포탄의거 100주년

들어가며

1922년 3월 28일,지금부터 100년 전

쾅! 중국 상하이 황포탄 지역에 굉음이 퍼졌다.

여객선에서 내리던 일본군 육군대장이자 남작인 다나카 기이치를 향해

총탄 네 발이 연속으로 날아들었고, 뒤이어 폭탄도 투척되었다.

총을 든 자는 의열단원 김익상과 그의 동지 오성륜, 이종암이었다.

총탄은 간발의 차이로 다나카를 빗나갔고. 

애석하게도 미국인 스나이더 부인이 총상을 입고 사망하였다.

비록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지만,

이들의 항일투쟁은 조선총독부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소문은 경성을 넘고 한국을 건너, 세계 곡곡으로 퍼져나갔고

꺼져가던 독립의지에 다시금 불씨를 지폈다.


2022년 3월, 1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조국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치며 

조선총독부에 대항한 김익상의 의열투쟁 정신을

다시 한번 새겨보아야 할 때이다.

김익상을 비롯한 의열투쟁에 앞섰던 의열단원들은

정의로운 폭력으로 빼앗긴 나라와 자유를 되찾기 위하여 고군분투하였다. 

이는 신채호가 강령한 『조선혁명선언』에 잘 드러난다.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암살·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탈치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신채호가 강령한 『조선혁명선언』(1923) 중


의열투쟁은 우리민족의 울분과 억압된 자의식을 표출한 효과적인 항일독립운동 방략 가운데 하나였다.

이런 점에서 의열투쟁은 테러와 다르다. 

테러는 개인이나 집단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하고 

공격 대상을 불특정 다수로 삼아 선량한 시민을 희생시키지만, 

의열투쟁은 응징 대상을 침략의 중심부인 일제기관과 핵심인물로 특정하였다. 

의열투쟁은 죽음을 무릅쓰고 인류에게 

자유와 정의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민족의 대의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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