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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포탄의거 그 후 남겨진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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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장세윤(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황포탄의거 이후 일제 경찰에 체포된 김익상은 오랜 세월 옥고를 치렀다. 김익상이 살아 돌아오기만 손꼽아 기다린 아내 송씨, 동생 김준상은 일제의 감시, 굶주림과 싸워야만 했다. 한편 오성륜의 오발로 일본군 육군대장 대신 총을 맞은 미국인 스나이더 부인의 남편은 아내를 잃은 슬픔을 감내해야 했다. 우리가 그동안 조명하지 못한 황포탄의거 이후 남겨진 사람들과 희생자들의 이야기에 주목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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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상의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힘겨운 삶을 이어나간 김익상의 가족들

김익상 체포 이후 아내 송씨, 딸, 동생 김준상(金俊相) 등 그의 가족들은 고통을 묵묵히 감당하였다. 동생 김준상은 황포탄의거 이전에 거행된 조선총독부의거를 도왔다는 혐의로 일제경찰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이후 일제 감시와 생활고에 시달린 김준상은 1925년 6월 6일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김익상의 동갑내기 아내 송씨는 어린 딸과 연전 세상을 떠난 김익상 형의 아들을 홀로 키우다가 재가하였다. 황포탄의거 이후 4년이 지난 1926년 2월 13일, 음력 설날을 맞이하여 동아일보 기자가 서울 용산 부근의 이태원리(현 이태원동)에 살고 있던 아내 송씨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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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상 아내 송씨(좌) / 김준상의 극단적 선택을 보도한 기사, 『동아일보』(1926.6.9.)(우)

“마침 어린 딸 ‘점석(7세)’에게 새 옷을 갈아입히고 앉았던 송씨는 찾아간 기자를 향하여 “어느 때나 생각이 안나겠습니까마는 설을 당하면….” 하고 말을 끝맺지 못하고 치마고름으로 눈물을 씻더니 다시 말을 계속하여 “그래도 언제나 나오리라는 말이나 있어야지요? 모진 목숨으로 나혼자 살면 무엇해요? 생각하면 가슴만 막힙니다.” 하고 한숨을 짓더니 철모르고 웃는 어린 딸의 옷깃을 어루만지며 “생전에 만나볼 것 같지 않아요. 어린 딸이나 알뜰히 키울랍니다.” 하고는 다시금 살아가는 형편 이야기를 한다. “애 아버지가 칠년 전에 집을 나간 뒤로는 작년 여름에 돌아간 작은 시아주버니(김익상 동생 김준상)가 집안살림을 하였습니다마는 지금 나혼자 어린 조카(김익상 형의 아들) 기복이가 연병정(練兵町) 저울회사에서 벌어오는 것을 가지고 올케(김준상 아내)를 데리고 네 식구가 그럭저럭 살아갑니다. 이 생각 저 생각 할수록 가슴만 아프고 감옥에 있는 애 아버지 생각뿐이에요. 설이라고 우리집은 이 모양입니다. 감옥에 있는 이를 생각하면 먹는 것도….” 말끝을 떨며 어린 딸을 안고 기자를 문밖까지 보내주었다.” 


김익상 아내 송씨 인터뷰 중,『동아일보』(1926.2.17.)


인터뷰 내용을 보면 송씨는 김익상의 형과 동생이 생활고와 일제 당국의 탄압으로 잇달아 사망하거나 자살하여 어린 조카 김기복이 벌어오는 생활비로 매우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송씨는 결국 재가하여 김익상과는 이별을 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역사의 빛이 아니라 그늘 속에서 숨죽여 삼켜야 했던 가족들의 사연은 매우 비극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오성륜과 대조적인 행적을 펼친 박영자

오성륜의 아내는 박영자로 알려졌다. 1910년생으로 추정되는 박영자는 일찍 중국 동북지방(만주)에서 조선공산당 만주조직원으로 활동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1930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박영자의 부모는 1930년대에 일제 탄압으로 희생되었다. 그는 경북 안동 출신의 항일투사 김노숙의 친밀한 전우로서 1931년에 중국공산당 반석현(磐石縣)위원회에서 부녀회 사업을 맡았다. 이후 중국공산당 계열의 동북인민혁명군 독립사 사령부, 동북항일연군 제2군 군부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중국인 양정우(楊靖宇)가 이끄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사령부에서 남자들과 동등하게 싸우는 전투원으로 항일투쟁을 벌였다. 박영자는 인자하고 쾌활한 성격과 더불어 전투 때는 매우 용감하게 싸워 동지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군과 괴뢰 만주국군 등의 탄압으로 1940년 전후 시기 만주 항일세력이 거의 괴멸되고 말았다. 그는 중국인 조아범(曺亞範)이 이끄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 사령부에서 활동하다가 1941년 4월 경 백두산 부근의 몽강현(?江縣)에서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이미 투항한 남편 오성륜 등의 귀순 요구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절한 끝에 결국 목이 잘리는 잔인한 방법으로 피살되고 말았다. 말년에 일제에 투항하고 변절하여 일본 당국과 괴뢰 만주국 당국에 협조한 남편 오성륜의 행적과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박영자는 마치 영화 ‘암살’의 주인공과 같은 용감하고 장렬한 전사의 늠름한 기개와 불굴의 용기를 보여주었다. 한편 이종암의 아내는 서희안으로 알려졌는데, 이종암이 약관의 나이에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국내외 각지를 누비느라고 슬하에 자녀도 없었다. 안타깝게도 서희안의 행적은 잘 알 수 없다.


항일독립투사를 지지한 스나이더

황포탄의거 당시 미국인 스나이더 부인이 오성륜의 오발에 맞아 사망하는 유감천만한 일이 발생하였다. 미국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 부근의 브라질 마을에 거주하였던 그는 상하이에서 남편 스나이더와 함께 신혼여행을 즐기는 중이었다. 한순간에 아내를 잃은 스나이더는 황포탄의거를 거행한 김익상, 오성륜, 이종암에 분노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조국독립과 민족해방을 위하여 분투하는 투사임을 안 스나이더는 일본사법당국에 ‘김익상 등을 관대하게 처리해달라’는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그리고 황포탄의거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22년 4월 어느 날,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감옥에 갇혀 엄중한 심문을 받던 김익상과 오성륜을 면회하였고, 오히려 이들의 노고를 위로하는 놀라운 모습을 보였다.      

상하이에서 활동하고 있던 항일 여성운동가들의 모임인 대한애국부인회는 스나이더 부인의 죽음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였다. 이를 위해 ‘비단’에 영문으로 ‘스나이더 부인의 죽음을 도상(悼想)하노라’라는 문구를 수놓은 ‘자수(일종의 만장[輓章])’와 조의를 담은 ‘위문서간’을 남편 스나이더에게 전달하였다. 이에 스나이더는 1922년 4월 10일 대한애국부인회 회장 김순애에게 편지를 보내 인사를 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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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나이더 부인(좌) / 스나이더 편지 내용을 보도한 『독립신문』(1922.6.3.)


“그 아름답고 기이한 예물을 당신들이 손으로 만들어 사랑과 동정의 기념품으로 주었으니, 나는 내 마음에 있는 것을 당신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이 편지 쓸 임무를 맡았습니다. 내가 이 물건을 가져다가 내 집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두어 죽은 그의 많은 친구들로 하여금 그것을 볼 때마다, 당신들이 그처럼 꽃다운 예물을 ‘스나이더’에게 준 것을 기억할 것으로 확신합니다. 고상하고 또 빛나는 귀 회의 결의를 나는 늘 기억하여 잊지 않으려 하고, 또 이를 세상에 드러내려 하는 동시에 귀 애국부인회에 대하여 감사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상하이에 있는 다른 많은 친구(다 나에게 초면이었음)들의 말은 도리어 내 마음을 눌리게 할 뿐이었으나, 당신들이 나에게 한 일은 나의 찢어진 마음에 큰 감격을 주었습니다. 나의 심정과 감상을 귀 회의 모든 회원들에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귀 회의 여러 직원들을 만나 보지 못한 것을 매우 유감으로 생각하고, 또한 그들을 만나볼 기회를 잃은 것을 대단히 후회합니다. 나는 당신들에게 거듭 감사하며, 아울러 일반 회원들에게 향하는 나의 심정이 어떠한 것을 당신들의 심정이 스스로 해석할 줄로 믿습니다.”


스나이더가 대한애국부인회 회장 김순애에게 보낸 편지, 『독립신문』(1922.6.3.)    


불의의 총격으로 희생된 부인의 죽음으로 충격과 슬픔에 휩싸였음에도 불구하고, 스나이더는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에 대한 동정과 이해를 표시하며 매우 정중하고 너그러운 신사의 아량을 보여주었다. 한편 대한애국부인회의 현명한 대처는 독립운동사에서 찬란한 빛을 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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