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산책

필리핀 독립운동의 뿌리

호세 리살 Jose Riz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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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소병국(한국외국어대학교 말레이·인도네시아어과 교수)



1899년 미국이 스페인을 대신해 필리핀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에서 당시 필리핀 전체 인구의 대략 7분의 1에 해당하는 100만 명의 병사와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이는 독립을 향한 필리핀인의 강력한 열망이 분출된 것인데, 그들의 희생 이전에 필리핀 독립운동에 불씨를 지핀 호세 리살의 헌신을 기억해야한다.


3G 획득을 위한 식민지 지배

1525년 스페인은 루손 섬 상륙을 시작으로 필리핀 군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였다. 북부의 루손 섬과 중부의 비사야스 군도에는 인구와 영향권 차원에서 외래인의 침투에 조직적으로 대항할 만한 규모를 갖춘 국가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스페인은 이 지역에 용이하게 침투할 수 있었으며, 동남아시아에 진출한 다른 유럽 세력들보다 250~300년 앞선 16세기 후반에 식민지 국가를 건설하는데 성공하였다.        

스페인이 동방으로 진출해 획득하고자 한 것은 ‘3G(Gold 부의 획득·God 기독교 복음 전파·Glory 왕의 영예)’였다. 1543년 당시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재위 1556~1598)의 이름을 따 점령 지역을 ‘Filipinas(필리핀)’라 명명한 것으로 왕의 영예는 충분히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필리핀을 인구 수천만 명의 가톨릭 국가로 만들었으니 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 등 다른 경쟁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독교 복음 전파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한편 3G 목표 중 부의 획득에 대한 전망은 밝지 않았다. 필리핀 군도에서는 향료(정향·육두구·메이스)가 나지 않았고 남아메리카 페루의 은처럼 값나가는 자원도 없었기 때문이다. 


계몽 지식인층 일루스트라도스의 탄생

스페인 식민 정부는 부의 획득을 위해 중국과의 교역을 시도하였다. 북부 필리핀은 지리적으로 도서부 동남아시아에서 중국과 가장 인접한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른 유럽 세력의 견제와 남부 중국 해안에 들끓던 해적들이 큰 장애였다.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남아메리카 제국과 아시아 제국의 물자를 아카풀코와 마닐라에서 교환하는 ‘갈레온 무역’이었다. 식민 지배 초기 스페인이 높은 수익이 보장되는 투자 대상이었던 갈레온 무역에 집중하는 동안, 식민지 개발 사업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1810~1820년대 스페인 남아메리카 식민지들이 서서히 독립하기 시작하였고, 그 여파로 갈레온 무역은 18세기 말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수입원이 필요해진 식민 정부는 국제 시장을 겨냥한 황금 작물 재배에 집중하였다. 스페인은 필리핀을 점령한 지 200여 년이 흐른 뒤에나 식민지 개발 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아시엔다(대농장)가 개발되면서 필리핀 사회에 계층 분화도 시작되었다. 처음 대농장에 투자할 수 있었던 사회 계층은 세 부류였다. 토지를 매입해 보유한 국왕령 출신 스페인인, 교회, 그리고 중국인과 현지인 혼혈인(중국계 메스티소) 상업 자본가들이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대농장을 직접 경영할 수 없는 부재(不在) 지주였다. 이러한 가운데 지주에게서 토지를 임차한 후 그것을 다시 농민에게 임대하는 임대차농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임대차 농업을 통해 부를 축적해서 토지를 사들여, 대규모 환금작물 농장을 직접 경영하는 재지(在地) 지주층이 새로이 형성되었다. 이들 새 지주층은 교육에 열성적으로 투자하여 마닐라뿐 아니라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각지로 자녀를 유학 보내었다. 스페인의 식민지 개발 사업은 필리핀 민족주의 운동의 주체가 된 계몽 지식인층인 이른바 ‘일루스트라도스’가 탄생하는 계기를 마련한 셈이 되었다.


새롭게 정의한 운명 공동체 필리피노

19세기 후반, 많은 수가 중국계 메스티소 가문 출신인 일루스트라도스는 스페인에서 태어나 필리핀 지배 세력으로 군림하는 페닌술라레스의 억압과 차별에 맞서 정치·농업·교육의 개혁 등을 요구하는 이른바 ‘프로파간다(청원)운동’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이는 ‘필리핀을 스페인의 종복이 아닌 가족으로 대해주기를 요청하는 운동’이라는 의미를 내포하였다. 중국계 메스티소의 후손으로 태어나 필리핀 독립운동을 지도한 ‘호세 리살(Jose Rizal)’은 대표적인 프로파간다주의자 중 한 사람이다. 이 운동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리살이 ‘필리피노(필리핀인)’라는 운명 공동체의 개념을 정리했다는 것이다. 필리피노는 본래 필리핀에서 태어난 스페인 혈통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여기에는 일부 스페인계 메스티소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리살은 인디오, 중국계 메스티소 그리고 스페인계 메스티소 모두를 필리피노로 묶었다. 즉 그는 필리피노라는 명칭을 필리핀과 운명을 함께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여한 것이다.


식민지 지배 모순을 알린 저술 활동

1882년 의사가 되기 위해 필리핀에서 스페인으로 유학을 간 리살은 1887년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 『놀리 메 땅헤레Noli Me Tangere』라는 소설을 출간하였다. ‘놀리 메 땅헤레’는 본래 ‘나를 만지지 말라’는 뜻으로 성경의 요한복음 20장 17절에 나오는 구절인데, 후에 ‘악성 궤양’, ‘종양’ 등으로 의미가 바뀌었다. 이 때문에 소설의 제목이 ‘암(cancer)’으로도 번역되기도 하였다. 리살은 식민지 시대 스페인 사제들의 악행을 도려내야 할 질병에 비유한 것이다. 식민지 지배의 모순을 날카롭게 비판한 이 소설은 당시 스페인의 문화계와 마드리드의 지식인층, 학생들 사이에서 급속도로 확산되었고, 스페인의 식민 지배에 대한 비판 여론이 스페인에서 나오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결국 그의 서적은 스페인에서 불온서적이 되었으며, 리살은 스페인 정부의 추방령에 따라 퇴학당한 후 필리핀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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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리살 Jose Rizal (1861-1896)


필리핀 혁명의 시발점

고향으로 돌아온 리살은 1892년 필리핀 독립운동의 지도 기관인 필리핀 연맹을 결성하여 스페인 식민통치를 비판하고 민족의 자각과 해방의 기운을 촉진시켰다. 그러나 그는 독립활동에 주목한 스페인 총독부에 의해 체포되어 민다나오 섬 다피탄으로 유배되고 말았다. 이후 무장 투쟁론자들의 배후로 지목된 리살은 1896년 마닐라 북쪽 산티아고 요새에서 공개 처형되었다. 그의 죽음은 온건한 프로파간다 운동의 종식을 의미하는 한편, 식민 압제에 대한 급진적인 저항 행동을 부르는 자극제가 되었다.         

이로써 필리핀 혁명이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이 시발점은 필리핀 혁명의 아버지로 불리는 안드레스 보니파시오가 주도하는 혁명운동으로 나타났다. 프로파간다운동의 구성원으로 활동하면서 리살의 영향을 받은 그는 1892년 7월 7일 중부 루손에서 ‘가장 위대하고 숭고한 자손 연합(까띠뿌난)’이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무장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곧 중부 루손의 소작인과 농업 노동자들이 합세하여 대대적인 대중 봉기로 발전하였다.           

현재 리살이 처형당한 장소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리살 공원(Rizal Park)’이 세워졌고, 공원 한쪽에는 그의 처형 장면을 재현해 놓은 동상들이 설치되었다. 또한 그가 수감된 산티아고 요새 감옥 근처에는 ‘호세 리살 기념관’이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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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리살 공원에 세워진 호세 리살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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