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열의 발자취를 찾아서

창사(長沙)에서 만난 인연의 안내를 받다

창사(長沙)에서 만난 인연의 안내를 받다

글 김주용 독립기념관 선임연구위원


창사(長沙)에서 만난 인연의 안내를 받다


김구가 치료 받았던 상아의원은 현재 후난대학 병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 답사단이 그곳을 찾았을 땐 김구가 수술을 받았던 건물이 한창 내부수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상아의원에서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남목청에서 자동차에 실려 상아의원에 도착한 후 의사가 나를 진단해 보고는 가망이 없다고 선언하여, 입원 수속도 할 필요 없이 문간에서 명이 다하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그러다가 한두 시간 내지 세 시간 내 목숨이 연장되는 것을 본 의사는 네 시간 동안만 생명이 연장되면 방법이 있을 듯 하다고 하다가 급기야 우등병실에 입원시켜 치료에 착수하였던 것이다.

『백범일지』에 나오는 대목이다. 심지어 안중근의 셋째 동생 안공근은 김구의 피살 소식을 듣고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달음에 달려와 김구의 큰아들 김인과 함께 창사(長沙)로 돌아오기까지 했다. 백범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이 사경을 헤매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의연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상아의원 촬영을 마치고 후난농업대학(湖南農業大學)에서 중국의 육종학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 유자명의 아들 유전휘(柳展輝) 교수를 만나기 위해 길을 재촉했다. 이선자 부관장이 예약한 후난성(湖南省)의 정통 음식점에 가니 유전휘 부부와 그의 딸이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놀랍게도 딸은 우리말을 능숙하게 했다. 한국에서 유학한 덕분이라고 한다. 유 교수는 아버지의 나라에서 온 손님들에게 내일 부친과 관련된 사적지를 함께 가봤으면 한다며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우리는 이번 답사 장소 중에도 관련 사적지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저녁으로 매운 후난요리 샹차이(湘菜)를 깔끔하게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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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상아의원(19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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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상아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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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가족사진(1934년, 왼쪽 장남 인,

오른쪽 차남 신,

가운데 어머니 곽낙원 여사)



유자명이 몸담았던 후난농업대학을 찾다

아침 8시에 숙소를 나와 유자명이 말년을 보냈다던 후난농업대학으로 향했다. 대학 앞에는 벌써 유전휘 교수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는 후난농업대학교 관계자들이 기다리고 있다며 우리를 대외협력처 회의실로 안내했다. 9시 정각, 한국의 답사단 4명을 비롯하여 중국측에서는 타오동차이 통전부장, 양즈지엔 국제교류합작처장 등 5명과 유전휘 교수, 이선자 중경임시정부청사 부관장 등 11명이 간략한 좌담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는 유자명 전시관을 보다 확장하여 후대의 귀감으로 삼겠다는 후난농업대학 관계자의 굳은 의지가 엿보이는 의미 있는 대화가 오갔다.

좌담회가 끝나고 유 교수의 안내를 따라 유자명 전시관으로 향했다. 2013년 유자명의 제자들이 모금하여 유자명이 후난농업대학 근무 당시 거주했던 집에 전시관을 만들었는데, 총 5개 부분으로 전시 구성을 해놓았다. 도착해보니 창사 문물보호단위로 등록되었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일행을 맞아주었다.

유전휘 교수는 자기 아버지의 활동에 대해 이야기했다. 물론 부친에게 들은 이야기이지만 경청할 만한 것은 분명했다. 1930년 후반 유자명의 활동은 주로 재중국한인혁명세력의 통일운동에 모아졌다. 당시 난징(南京)에서는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과 김규광의 해방동맹, 최창익의 전위동맹 등이 각 조직의 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 1937년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였다. 이 단체에는 위의 3개 단체 외에 유자명의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도 참가하였다. 이후 한커우(漢口)로 이동하여 일본 조계지에 거처를 정하고 활동했는데, 이때 김약산·박정애·김규광·두군혜·최창익·허정숙·이춘암·이영준·문정일 등이 활약하였다. 유자명은 1944년 4월 임시정부 제5차 개언에 앞서 조소앙 등과 7인 헌법기초위원을 맡았다. 이때를 제외하고는 표면에 나서서 활동하기보다 작전의 배후 참모로서 역할을 하였다. 광복 후 1950년 귀국을 결심했으나 6·25전쟁 발발로 돌아가지 못하였고, 이에 중국의 후난농업대학에서 교수생활을 하며 농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유전휘 교수는 설명을 통해 이것이 자신이 중국에 있게 된 이유라고 재차 강조했다.

전시관을 둘러보고 후난농업대학 내에 설치된 유자명 동상을 촬영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2013년 후난농업대학 제2교학관과 제3교학관 사이의 공터에 세워진 유자명 동상에는 ‘한국의 국제적 전우이며, 충청북도 충주에서 태어난 후난농업대학 교수이자, 저명한 원예학자였던 독립운동가’라고 새겨져 있다. 다만 동상에는 그의 고향인 충주가 중주라고 잘못 각자되어 있었다. 타국에서 농업인으로 삶을 마감했던 위대한 국제적 인물 유자명은 그렇게 후난농업대학에서 그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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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족전선연맹 터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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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난농업대학 내 유자명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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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명 가족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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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난농업대학에서 실습강의를 하고 있는 유자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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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명 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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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명 전시관 내부

           

시간은 벌써 11시를 넘기고 있었다. 유전휘 교수를 통해 후난농업대학에서 한국인 방문단과 조촐한 점심식사를 함께하고 싶다는 의견을 전해왔다. 우리 일행은 흔쾌히 응했다. 학교 교내 식당에 마련된 자리에는 아주 특별한 포도주가 있었다. 바로 유자명이 개발한 포도로 만든 포도주였던 것이다. 간단한 시음과 함께 한중우호가 이곳에서도 강하게 싹트고 있음을 다시 한 번 느꼈다. 흐뭇한 점심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다음 목적지인 독립운동단체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를 향해 길을 나섰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