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 살피다

민족의 시대정신을 예술로 승화하다

민족의 시대정신을 예술로 승화하다

글 심용환 역사N교육연구소 소장


민족의 시대정신을 예술로 승화하다


20세기 초반, 대한제국 말기에 들어서면서 근대 문화예술은 점차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언문일치 형식의 문장이 발전하면서 최초의 신소설로 인정되는 『혈의누』(이인직)·『자유종』(이해조)·『금수회의록』(안국선) 같은 작품들이 등장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사설극장 원각사(圓覺社, 1908)는 <은세계>, <치악산> 등을 통해 신극(新劇)운동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어려울수록 더욱 화려하게 꽃핀 문화예술

일제강점기 억압 속에서도 문화예술은 꾸준히 발전했다. 1910년대는 2인 문단 시대로 신체시(新體詩)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한 최남선과 소설 『무정』을 쓴 이광수의 시대가 열린다. 이후 1920년대에는 『창조』·『백조』·『폐허』 같은 문학잡지, 즉 동인지가 발간되기 시작하면서 문학가 김동인, 염상섭 등을 통해 장르의 다양화, 주제의식의 고도화를 이루었다. 1925년 결성된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 카프(KAPF)는 순수문학 혹은 퇴폐주의 경향이 아닌 현실주의 문학활동, 저항적인 사회주의 문학활동을 본격화했다. 동시에 이상화·한용운·김소월 등의 탁월한 시인·문학가들이 등장하면서 1920년대는 한국 문학에 있어 첫 번째 황금기였다.

이 시기 일본에서는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연극단체 토월회(土月會)가 결성되고,  6·10만세운동이 일어난 1926년에는 나운규의 무성영화 <아리랑>이 큰 인기를 끌었다. 나운규는 제작·연출·감독뿐 아니라 주연배우의 역할까지 맡으면서 한국 영화사의 중요한 획을 그었다.

중국 유학생들의 이야기들도 주목할 만하다. 의대생이었다가 문학에 눈을 돌린 김광주는 『밤이 깊어갈 때』, 『북평서 온 영감』 등 굵직한 소설을 발표했고, 김명수는 소설 『두 전차(電車) 인스펙터』로 당선되는 등 한국 문학계에서 크게 활약했다. 한편 영화계에서는 배우 김염이 중국에서 영화 황제로 칭송받으며 큰 인기를 누렸다. 당시 이규환·이경손·한창섭 등 많은 영화계 인재들이 난징(南京)과 상하이(上海) 등지에서 활발히 활동했고, 전창근은 중국에서 제작한 <양자강>을 국내에 소개해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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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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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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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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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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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리랑>

        


         

눈부신 성취와 동시에 친일이라는 얼룩이 지다

1930년대 일제의 극악한 식민지 수탈로 우리 농촌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이에 언론사가 주축이 되어 대대적인 농촌계몽운동이 일어났는데, <동아일보>의 브나로드운동과 <조선일보>의 문자보급운동이 그것이었다. 1935년 동아일보사 공모에 당선되었던 심훈의 『상록수』는 브나로드운동에 참여한 원산여고 출신 여성 농촌운동가 최용신을 모델로 한 소설로 큰 주목을 받았다. 심훈은 소설뿐 아니라 ‘그날이 오면’ 등 시문학에서도 두각을 드러내는가 하면, 영화감독으로 활동하는 등 문화예술계 다방면으로 재능을 뽐냈다.

문학뿐 아니라 음악 분야는 안익태의 ‘코리아 환상곡’, 홍난파의 ‘봉선화’, 연극 분야는 유치진의 희곡 <토막> 등 다양한 장르에서 문화예술적 성과가 이루어지는 등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한국 예술인들은 매우 역동적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문화예술계에 큰 획을 그은 인물들 가운데는 이광수·최남선·김동인·안익태·홍난파·유치진 등 친일행적으로 그 성취가 빛바랜 경우도 많았다. 특히 1937년 이후 중일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상당수의 예술인들이 친일활동에 나서면서 문화예술 분야 전반이 침체기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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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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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상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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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나로드운동 포스터(<동아일보> 1932년 7월 17일자)

           


          

부끄러움을 노래한 청년과 그가 머문 시대

유명한 문인들이 친일활동으로 스스로의 명예를 더럽히던 시기 윤동주의 등장은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기 충분했다.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윤동주는 광복을 보기 불과 여섯 달 남겨 두고 생을 마감하였으나 짧은 생애 동안 한국 문학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만주 명동촌의 부유한 가정에서 나고 자란 그는 문학청년으로 내적 성숙을 거듭하였다. 20살이 되던 해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꽃다운 청춘은 동아시아는 전쟁의 광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그 속에서 윤동주가 써내려간 시 역시 방황을 거듭했다.

윤동주의 고뇌는 비단 그만의 것이 아니었다. 망국의 현실 가운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는 당대를 지냈던 많은 청춘과 지식인들에게 숙명과도 같은 질문이었다. 당시 민족주의자들은 수양을, 사회주의자들은 보다 저돌적으로 강력한 실천성을 추구하며 세상을 바꾸고자 했다. 일제는 이에 대응하여 모범청년상을 내세우며 식민지 사회에 순응하고 순종하는 청년들을 기르고자 했다. 이렇듯 윤동주의 문학적 성취는 당시의 교육 정책과 맞물려 혼란스러워했던 청년상과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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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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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독립운동가이자 문화인으로서 살았던 김규식

예술가는 아니지만 문화예술 분야에서 활발한 교류를 하며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실천했던 인물도 있다. 김규식이 대표적인 예다. 1919년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했던 그는 임시정부 외무총장을 맡아 다방면에서 활약을 펼쳤다. 민족유일당운동·민족혁명당 참여 등 독립운동계의 통합을 위한 활동에 집중했다. 이처럼 같은 민족주의자 내부에서 발생하는 이견 차이를 좁히는 역할을 도맡았다. 사회주의 운동을 어떻게 볼 것이며, 사회주의가 지적하는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에 대해 그는 대부분 개방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사회주의 진영과의 소통이나 합작은 물론 중국 혁명세력과 다양한 협력을 이끌었던 점은 주목할 만한 행적이다.

한편 김규식의 인생에서 놓칠 수 없는 또 하나의 부분은 그가 탁월한 언어학자였으며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영어·프랑스어·독일어·러시아어·중국어·일본어까지 6개 국어에 능통했던 그는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여러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또한 『엘리자베스 시대의 연극 입문(1940, Introduction to ElizaBethan Drama)』, 『실용 영문 작법(1944, Hints on English Composition Writing)』, 『실용영문 1,2(1945, Practical English)』 등의 책을 집필했으며 중국 근대 비극시 ‘완용사(婉容詞)’를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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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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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강화회담에 참석한 김규식(앞줄 오른쪽 끝)

사실 독립운동과 문화예술은 쉽게 연결시킬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시대의 아픔을 딛고 민족을 계몽하는 위대한 작품들을 탄생시키는 한편, 일제에 투항하거나 친일 부역행위를 하는 등 스스로 명예를 실추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부끄러운 행위를 인정하고, 그것을 바로잡고자 더욱 치열하게 작품활동에 전념했던 바람직한 예술인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대한민국 문화예술이 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심용환

성균관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역사교육학을 전공했다. 현재 팟캐스트 <진짜 역사 가짜 역사>를 통해 재미있고 올바른 역사 이야기를 전파하고 있으며, CBS와 공동으로 <심용환의 근현대사 똑바로 보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헌법의 상상력』, 『심용환의 역사토크』, 『단박에 한국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