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답을 찾다

‘어린이’라는 싹에 희망을 비추다

‘어린이’라는 싹에 희망을 비추다

글 이성주 역사칼럼니스트


‘어린이’라는 싹에 희망을 비추다


“어린이는 어른보다 한 시대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 어린이의 뜻을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
소파(小波) 방정환이라고 하면, 대개 ‘어린이라는 존칭어를 만든 사람’, ‘어린이날을 만든 사람’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어린이 인권 신장과 교육에 일생을 바친 방정환은 타고난 이야기꾼이자, 작가, 출판인이었으며 또한 독립운동가였다.


타고난 재능으로 혁신적인 사상을 발휘하다
▲보성전문학교 법과 입학 ▲3·1운동 참가 ▲일본 도요대학 철학과 입학 ▲마해송 등과 함께 ‘색동회’ 조직 ▲어린이날 제정을 비롯해 어린이 인권 신장과 교육활동에 투신 ▲1931년 7월 23일 33세로 사망

방정환을 말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한 명 있으니, 바로 장인 손병희다. 천도교 3대 교주이자 3·1운동을 이끈 민족대표 중 한 사람인 손병희는 가세가 기울어 어렵게 지내던 방정환을 자신의 딸과 혼인시켰고, 그가 자신의 꿈을 키워나갈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었다. 그러한 인연에 영향을 받아서일까, 방정환은 3·1 운동 당시 <독립신문>을 제작·배포하다가 일경에 체포된 적이 있다. 혹독한 고문을 당했지만, 다행히도 체포 직전 등사기를 우물에 버려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일본 유학을 떠난 그는 새로운 학문을 만나게 되었는데, 바로 아동문학과 아동심리학이다. 당시 유교사회인 조선에서는 장유유서(長幼有序)를 덕목으로 내세우며 어린아이를 쉽게 괄시하고 천대하곤 했다. 방정환은 이런 문화를 타파해야 한다고 역설하며 어린이문화단체 ‘색동회’를 조직, 어린이날을 제정하였다. 방정환이 내놓은 아동 권리 존중의 기치는 비단 우리나라에서뿐 아니라 세계 최초라는 점에서 더욱 놀랄 만하다. 국제연맹에서 제네바선언을 통해 내놓은 아동권리선언은 1924년에 등장했다.
방정환은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다. 손으로는 유려한 글 솜씨를 뽐내고, 목소리로는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줬다. 타고난 말재주는 특히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동화구연에서 크게 빛났다. 방정환이 출연한다고만 하면 동화구연장은 아이들로 넘쳐났다. 그는 매년 70회, 통산 1천회 이상 무대에 올랐는데, 그의 말 한마디에 따라 장안은 웃음바다가 되기도, 때론 울음바다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더욱 주목해야 하는 점은 그가 가진 천부적인 재능보단 그것을 통해 발휘된 그의 혁신적인 사상이다.
“제발 월급쟁이나 시어미 있는 데는 연애 아니라 아무거래도 가지를 말아요. 사람이 썩어요 썩어!”
방정환이 쓴 ‘여학생과 결혼하면’이란 글의 한 대목이다. 여성의 시선으로 써내려간 것으로, 직설적인 표현으로 당대 여성의 입장을 대변했다. 일제강점기에 양성평등이라니, 시대를 앞서 나가도 너무 앞서나간 게 아닌가? 하긴 ‘어린이’란 단어를 만들고, 누구도 주목하지 않은 아동인권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등의 행보만으로도 미루어 짐작하건대 방정환은 단연 진보적인 지식인이었다. 이처럼 그의 다재다능함은 선구자적인 면모를 효과적으로 발휘하는 좋은 그릇이 되었다.


싹을 위하는 나무, 싹을 짓밟는 나무
방정환이 살아생전 어린이를 그토록 귀하게 여겼던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어른이 보호하고 귀하게 여겨야 할 아이들이라서가 아니다.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어린이에게 10년을 투자하라.”
방정환은 민족의 장래가 곧 어린이들의 손에 달려있다고 생각했다. 어린이라는 ‘싹’을 위해야 민족이라는 ‘나무’가 잘 자라난다고 믿은 것이다. 비록 국권은 빼앗겼으나 장차 우리의 미래가 될 어린이들을 잘 키워내면 언제고 이 아이들이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싹을 위하는 나무는 잘 커가고, 싹을 짓밟는 나무는 죽어 버립니다.”
위의 가르침으로 방정환은 민족과 독립의 희망이 어린이에게 있음을 강조한다. 싹을 잘 키워 나무로 만들기까지는 분명 시간이 걸리지만, 정성 들여 싹을키운 나무는 튼튼하고 건강하게 성장한다. 방정환은 느리지만 확신에 찬 자신의 발걸음을 믿었으며, 숨을 거두기 불과 며칠 전 부인에게 이러한 말을 전했다.
“부인, 내 호가 왜 소파(小派)인지 아시오? 나는 여태 어린이들 가슴에 잔물결을 일으키는 일을 했소. 이 물결은 날이 갈수록 커질 것이오, 훗날에 큰 물결 대파가 되어 출렁일 테니 부인은 오래오래 살아서 그 물결을 꼭 지켜봐주시오.”


5월 5일 어린이날이 다가온다. 우리 어른들은 지금 우리나라의 미래인 어린이의 가슴에 잔물결을 일으키고 있을까. 어린이를 위해 노래와 이야기를 만들고, 그들 앞에서 이야기와 노래를 들려주던 방정환. 오늘날 하루 종일 학교와 학원 책상에만 붙들려 있는 어린이들을 보면, 그는 뭐라고 말할까. 어린이의 행복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오히려 어린이를 옥죄고 있다고 타박하지는 않을는지.

           


        

이성주

시나리오 작가 겸 역사칼럼니스트.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글쓰기를 목표로 『조선의 민낯』, 『왕들의 부부싸움』과 같은 역사서를 출간한 바 있다. 최근에는 국제정치와 관련된 연구 및 집필에 열중하고 있다.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시리즈 1, 2, 3권을 출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