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체절명의 한국사

조선 전기의
왜구 침략

조선 전기의<BR />왜구 침략
글 김종성 역사작가


조선 전기의

왜구 침략



한민족은 고려 말부터 새로운 안보 환경에 직면하였다. 이전에도 일본인 해적들이 있기는 했지만, 이 시기부터는 왜구의 침략이 유독 두드러졌다. 조선왕조는 왜구에 대한 대처법에 있어서 고려왕조와 차별성을 보였다. 

원나라의 몰락과 왜구의 부각

원(元)나라의 패권은 14세기 중후반부터 동요하였다. 이 징후는 대륙의 반란으로도 나타났지만 해적들의 부각으로도 표현되었다. 이 시기에 두드러진 활약상을 보인 해적이 바로 왜구였다. 

동아시아에 대한 원나라의 패권이 공고해진 13세기 중후반 이후, 일본인들의 해외 활동은  위축되었다.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도 일본인들을 위축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이처럼 원나라가 강할 때는 잠잠했던 일본인들이 그들의 세계 패권이 약해지는 조짐이 나타나자 머리를 들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가 왜구의 전성기다. 몽골 역사서인 『원사』의 순제본기(순제황제 편)에 따르면, 왜구의 활동이 본격화된 시점은 1358년이다. 한편, 명나라 학자 진건(陳建)이 편찬한 『황명자치통기』에 따르면 그 시점은 1350년이다. 

이 시기 이후로 왜구가 두각을 보인 데는 이유가 더 있었다. 주원장이 또 다른 해적들을 집중 공략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 주원장이 표적으로 삼은 해적들은 오늘날의 상하이 남쪽 해역의 주산군도에 있었다. 이들에게 신경을 쓴 것은 이때만 해도 명나라 수도가 연경(북경·베이징)이 아닌 상하이 인근의 남경(난징)이었기 때문이다. 수도의 안전을 위해 주산군도 해적들을 공격하였던 것이다. 주산군도 해적에 대한 이 같은 집중적인 공략은 동아시아 바다에 대한 왜구의 지배권을 높여줬다. 왜구의 전성기는 명나라의 조력에 상당 부분 힘입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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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의정부시에 있는 신숙주묘



왜구에 대한 조선인들의 두려움

조선이 세워지기 30~40년 전부터 부각된 왜구는 고려 말뿐 아니라 조선 초기에도 계속 동아시아 질서를 교란하였다. 동아시아 바다는 이들의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로 인해 조선과 중국의 해안이 황폐화되었다. 연해 지방의 농민들은 곡식도 제대로 키울 수 없었다. 이들이 출현하는 지역적 범위도 매우 넓었다. 한반도 남부 해안뿐 아니라 황해도나 평안도의 해안에도 출몰하였다. 이들로 인한 공포심이 해안 지방에서만 나타난 것은 아니다. 지금의 전북 남원 같은 내륙 지방에도 공포심이 만연할 정도였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 한문 소설이 철학자 김시습(1435~1493)의 『금오신화』에 수록된 ‘만복사 저포기’다. 남원에 사는 양씨 청년이 결혼을 목적으로 만복사에서 부처님에게 윷놀이(저포)를 제안하는 내용이 담긴 이 소설에는 양씨가 불상 뒤에 숨어 젊은 여성이 석가에게 글을 올리는 모습을 엿보는 장면이 나온다. 글에는 이런 대목이 있었다. 


아무 고을 아무 곳에 사는 아무개가 아룁니다. 전에 변방의 방어가 무너져 왜구가 쳐들어왔을 때 칼날이 눈앞을 가득 채우고 봉화가 해마다 피어올랐습니다. 왜구들이 집들을 불살라 버리고 백성들을 노략질하니, 사람들은 동서로 달아나 숨고 사방으로 도망가기 바빴습니다. 이 와중에 친척과 하인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소녀는 냇버들처럼 연약한 몸으로 멀리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규방 깊숙이 숨어 끝까지 정절을 지키고 깨끗한 행실을 보전하면서 난리의 화를 면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딸자식이 정절을 지켜낸 것을 기특하게 여기시고 한적한 곳으로 피신시켜 임시로 초야에 묻혀 살게 하셨습니다. 그게 이미 3년이 되었습니다.


소설이기는 하지만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왜구에 대한 15세기 조선인들의 두려움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이런 왜구에 대해 고려 말에는 주로 군사적 대응을 강구하였다. 그 시대에 최영과 이성계 같은 명장이 떠오른 것도 왜구와의 전투에서였다. 이런 흐름은 조선 초기에도 어느 정도 이어졌다. 세종이 주상이지만 상왕인 태종 이방원이 군사권을 쥐고 있을 때인 1419년에 이종무에 의한 대마도 토벌이 단행된 것도 그런 흐름에 따른 것이었다.


조선시대 왜구 대책의 차별성

조선시대에는 왜구에 대한 군사적 대응에 한계가 있었다. 이는 신흥 강국인 명나라의 국제정책과 관련이 있다. 명나라는 여진족을 특히 경계하였다. 여진족이 과거에 금나라를 경영한 적이 있을 뿐 아니라, 몽골이 몰락한 후에 위협 세력으로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나라는 자국처럼 여진족의 위협을 안고 사는 조선을 여진족에 대한 토벌전쟁에 끌어들였다. 

이로 인해 조선 전기의 동아시아 국제관계는 최강국인 명나라가 조선과 공동으로 여진족 군소 집단들을 토벌하면서 지역 안정을 유지하는 구도로 전개되었다. 이를 통해 명나라는 조선을 동맹관계에 묶어둘 뿐 아니라 여진족의 발호를 억제하는 외교적 성과를 거뒀다. 그런데 이 상황은 조선이 여진족 토벌에 국력을 과도하게 투입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이 때문에 조선왕조는 예전처럼 왜구와의 전투에 에너지를 많이 투입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 외교의 틀을 짠 인물이 세조시대의 신숙주다. 세조(수양대군)가 즉위한 1455년 이후의 조선 외교는 사실상 신숙주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음력으로 세조 6년 7월 27일자(양력 1460년 8월 13일자) 『세조실록』에는 신숙주가 경복궁 교태전에서 세조와 술을 마신 뒤 손을 잡고 걸어가면서 여진족 정벌에 관한 결단을 내리는 장면이 나온다. 또 『성종실록』에 수록된 ‘신숙주 졸기’에는 신숙주가 오랫동안 외교 주무부서인 예조를 관장했으며 사대교린으로 상징되는 외교정책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는 내용이 있다.  

세조의 승인 하에 신숙주가 구상한 외교 전략은 명나라·여진족·일본·대마도에 대해 이른바 맞춤형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었다. 명나라에 대해서는 사대를 하면서 동맹정책을 유지하고, 여진족에 대해서는 군사적 강공으로 압박정책을 구사하는 것이었다. 한편 일본과 대마도에 대해서는 경제적 회유책을 강구하였다. 1869년까지 대마도 지배자인 대마도주는 조선과 일본 양쪽에서 책봉을 받았다. 일례로, 세조 7년 8월 28일자(1461년 9월 30일자) 『세조실록』에는 조선 정부가 남쪽 속국의 의무를 다한 공로를 치하하면서 대마도주 종성직(宗成職)을 대마주 병마절도사로 책봉하는 한편 녹봉 지급에 관해 언급하는 내용이 나온다. 

대마도는 한편으로는 일본의 대리인으로 조선을 상대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양쪽에서 책봉을 받고 경제적 실리를 챙기는 이중 전략을 구사하였다. 이런 속에서 조선은 일본과는 교린정책을 통해 대등관계를 추구하고, 대마도에 대해서는 책봉을 해주고 조공을 받는 동시에 회사(回賜)라는 이름의 반대급부를 제공하였다. 신숙주는 이 같은 구도를 공고히 함으로써 조공과 회사라는 물물교환을 통해 대마도·일본의 경제적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대신 이들이 왜구 단속에 신경을 쓰도록 만들었다. 대마도·일본의 정치권력을 지원해주는 대신 이들의 힘을 빌려 왜구를 억압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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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에 전시된 왜구와 명나라군의 전투 모습을 담은 ‘왜구도권’



조선 전기 태평성대의 배경

신숙주의 구상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의 전략은 1592년 임진왜란 이전의 200년간 조선이 태평성대를 누리는 데 기여하였다. 조선 전기의 태평성대는 조선이 명나라와 함께 여진족을 압박하고 일본·대마도에 대한 경제적 회유로 왜구 발호를 억제하는 조건 위에서 유지되었다. 

이렇게 조선 전기의 왜구 대책은 상당히 큰 그림 속에서 형성되었다. 고려 말처럼 군사적 강공책이 두드러지지 않는 대신 경제적 우위를 바탕으로 일본·대마도를 회유하고 이들의 힘을 빌려 왜구를 견제하면서 조선의 국제적 지위를 높이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자신감과 더불어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전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