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인연

혁명동지로서 부부가 된
이범석과 김마리아

혁명동지로서 부부가 된 <BR />이범석과 김마리아
글 김형목 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혁명동지로서 부부가 된 

이범석과 김마리아



이범석과 김마리아가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연해주에서 고려혁명군 활동을 하면서였다. 둘은 처음부터 호감을 가진 사이는 아니었으나, 죽음을 각오하고 일본군에 대응하는 김마리아의 모습에 이범석은 호감을 갖기 시작하였다. 잠시 헤어졌다 만주에서 다시 만난 그들은 동지로서 부부가 되었고, 독립운동의 영원한 동지이자 인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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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 이범석 / 김마리아



유복한 가정에서 다재다능함을 보이다

철기 이범석은 1900년 10월 20일 대한제국 한성부 용동에서 이문하(李文夏)와 연안 이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증조부 대에 충청남도 목천군으로 이주하였으나 아버지 대에 다시 서울로 상경하였다. 다른 이름은 이국근(李國根)·윤형권(尹衡權)·김광두(金光斗)·왕운산(王雲山)·왕모백(王慕白) 등이다.

아버지는 농상공부 참의와 궁내부 참사관 등을 역임하였다. 이범석은 풍족한 가정환경과 개방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랐으나 불행하게도 어머니를 일찍 여의게 되었다. 다행히 계모인 김해 김씨는 철부지 개구쟁이 이범석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풀었다. 김씨는 훗날 직접 이범석을 찾아가 격려와 거금의 독립자금을 아낌없이 주었다. 한편 개화사상에 감화된 아버지는 집안의 노비를 모두 해방시켰다. 아버지는 노비 정태규를 대한제국 육군으로 천거하여 군인이 되게 하였다.

이범석은 군대해산에 저항하다가 처참하게 숨진 정태규 시신을 목격하고 항일운동 투신을 결심하였다. 강원도 이천공립보통학교로 전학·졸업한 후 1913년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에도 명랑한 성격과 글짓기나 운동 등 다재다능으로 단연 두각을 나타내었다. 반면 일본인 학생들은 그를 수시로 괴롭혔다. 말다툼이나 싸움을 하면 일본인 교사는 그에게 성질이 야만스러워 남을 존경할 줄 모른다는 모욕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았다.


새로운 군사학을 배우다

1915년 여름 이범석은 재학 중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한 여운형을 만났다. 어느 날 여운형을 찾아가 중국으로 망명 의사를 전하자 즉석에서 이를 수락한다. 아버지에게 중국 망명 의사를 피력하였으나 장남이라는 이유로 망명을 만류하였다. 이에 일본인 학생으로 가장하고 열차편으로 신의주에 도착한 후 압록강 철교를 도보로 건너 안둥현에 도착하였다. 중국인으로 위장하여 펭톈(奉天 )을 지나 무사히 상하이에 안착할 수 있었다. 매형 신석우 동지인 신규식과의 만남은 향후 독립전쟁을 현장에서 누비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이범석은 신규식의 추천으로 윈난 육군강무학당 기병과에 12기로 입학하였다. 그를 포함한 배달무·김정·김세준 등은 배와 열차로 윈난강무학당에 도착하였다. 화교 이국근이라는 이름으로 입교한 후 학업에 정진하여 수석을 차지할 만큼 출중한 재질을 보였다. 1919년 수석 졸업을 기념하여 기병과 교관은 철기(鐵驥)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다. 졸업 이후 견습사관 재직 중 3·1운동 소식을 들었다. 곧 윈난성을 출발하여 6월 상하이에 도착하여 신규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을 두루 만났다. 가을에는 신흥무관학교로 가서 김광서·신팔균·지청천 등과 독립군 간부 양성에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1920년 이범석은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연성대장으로 청산리전투에 참전하였다. 우선적인 과제는 독립전쟁에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최신형 무기 확보였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러시아를 떠나 자국으로 귀국하는 체코슬로바키아 군대(체코군단)가 무기를 팔겠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모금결사대 활동 등으로 체코군단으로부터 다량의 탄환과 소총, 포탄, 화약 등을 사들이는 한편 사관생도들 군사훈련을 강화할 수 있었다. 실전을 방불케 하는 군사교육 강화는 청산리대첩을 견인하는 에너지원이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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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 징모 제3분처 위원 환송 기념



청산리전투 현장을 이끌다

당시 중일 양국은 항일무장활동을 두고 긴장된 관계였다. 중국군 멍푸더(孟富德)는 독립군 부대와 항일단체를 도로에서 멀리 떨어진 심산유곡으로 옮길 것을 요구하였다. 북로군정서는 사관연성소 수료식을 마치고 백두산 밀림지대를 향해 이동을 개시하였다. 다른 독립군 부대도 속속 허륭현 인근 지역으로 집결하였다. 1개월 도보로 10월 5일 지린성 허륭현 청산리에 도착하였다. 일본군이 청산리 주위를 포위하자 다른 독립군 부대와 협력하여 전투조직을 개편하였다. 총사령관 김좌진, 군정서 참모장 나중소, 사령관 부관 박영희 등으로 편성되었다. 

북로군정서 연성대장 겸 중대장인 이범석은 1개 대대를 백운평 숲속의 지형에 매복시켰다. 첩보원으로부터 일본군이 도착한다는 소식을 접한 이범석은 주민들에게 ‘형편없는’ 독립군임을 증언하도록 지시하였다. 청산리대첩 신호탄인 백운평전투에서 날이 저물도록 격전하여 일본군의 선봉부대를 섬멸시켰다. 이어 천수동, 어랑촌, 만록구 등지로 부대를 이동하면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커다란 전과를 올렸다. 

승리의 감격할 순간도 갖지 못한 채 독립군 연합부대는 북쪽으로 이동하였다. 홍범도·서일·지청천·김좌진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는 러시아령 이만에 안착하였다. 1921년 2월 말경에 다시 자유시(알렉셰프스크)로 옮겨갔다. 이범석은 함께 가지 않아 자유시참변을 면할 수 있었다.


중국군에서 다양한 실전 경험을 쌓다

만주에 도착한 후 동지들을 규합하여 고려혁명군을 조직하여 게릴라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고려혁명군결사대에서 활동하던 중 중국 공산군은 군벌 장쉐량 타도에 협조를 강력히 요청하였다. 결사대는 장쉐량의 토벌대를 크게 무찔러 장쉐량은 이범석에게 현상금을 내걸었다. 중공 측과 협력은 실패하여 일시 방랑생활에 들어갔다.

이듬해 마잔산(馬占山)이 이끌던 중국 동북항일군 작전과장으로 취임하고 중국군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만주사변 이후 마잔산이 다시 그를 찾았다. 국방장관으로 승진한 마잔산이 고급 참모들과 함께 소련에서 군사시설을 시찰하고 돌아오던 중 이범석은 잠시 억류되기도 하였다.

만주에서 무장항일활동의 한계에 직면하자 지청천 등과 함께 중국 관내로 활동 근거지를 옮겼다. 뤼양군관학교에 한국독립군 양성을 위한 한인특별반이 편성되자 교관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일본군 밀정에게 탄로되어 일본의 항의로 한인특별반은 해산되었다. 중화민국 국민군에 다시 입대하여 기병연대장, 고급참모, 참모처장 등을 지냈다.


국내진공작전을 주도하다

1940년 9월 17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대인 한국광복군이 결성되었다. 김구·지청천과 함께 광복군 창군에 참여하여 이후 한국광복군사령부 참모장과 제2지대장을 맡았다. 시안으로 건너가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교육 훈련과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중국군 중장 윈처지(文朝藉) 강무학당 동기로 부대 편성에 그의 도움과 원조를 받았다. 특히 그는 일본군 포로수용소에서 한국인 포로를 선발해 광복군으로 편입에 도움을 주었다. 일본군 점령지에 광복군 공작원을 파견하여 초모공작과 정보 입수 및 선전을 위한 밀정 파견, 탈영하는 한국인 출신 병사들의 황하강 도하 등 도움을 받았다. 이러한 활동은 대원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든든한 밑거름이었다.

연합군의 원조를 받기 위해 그는 미공군사령관 웨드마이어와 교섭을 시도하였다. 미첩보전략국 OSS와 합동훈련을 시도하면서 특수훈련에 참여하였다. 1945년 5월 시안 교외에서 이범석의 지휘를 받는 광복군 정진대가 OSS와 연합하여 국내진공을 위한 특수훈련을 받았다. 8월 일본의 패망 소식을 접하고 8월 18일 미군 중국전구 총사령관 고문 자격으로 비행기 편으로 김포공항에 입국하였다가 일본군에 의해 저지당하여 다시 상하이로 되돌아갔다.


정치 지도자로 일선에 나서다

일본군의 저항으로 상하이로 되돌아온 뒤 그는 광복군의 잔여 사무 정리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일본군과 만주군 패잔병 등을 설득·귀순시켜 광복군에 편입시켰다. 한편 그는 각국의 발전 역사와 근대국가 건설에 필요한 관련된 서적을 구입·탐독하였다.

1946년 6월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한 이범석은 곧바로 청년단체 조직에 착수하였다. 그는 장준하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장준하는 김구의 비서직을 사퇴하고 민족청년단에 입단하였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직면하자 미군정에 재정적 지원을 요청하였다. 광복군 활동과 투철한 반공주의 활동을 인정받아 미군정의 원조로 경제적인 빈궁함을 어느 정도 모면할 수 있었다.

한편 김구·김성수 등이 주도한 신탁통치반대운동에는 다소 소극적인 입장이었다. 1948년 김구·김규식 등이 남북협상을 주장하자 그들과 결별하고 신익희 등과 단독정부 수립에 찬성하였다.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부장관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이승만 정부와 결별하고 야당 지도자로서 길을 걸었다. 저서로 항일운동 역정을 정리한 『우둥불』, 『방랑의 정열』, 『한국의 분노』, 『톰스크의 하늘 아래』 등이 있다.

그는 1972년 심장병으로 사망하였다. 서울 남산 광장에서 성대한 국민장으로 거행되어 국립현충원 국가유공자 제2묘역에 안장되었다.


쌍권총 달인 김마리아는 영원한 동지였다

김마리아(金?利亞)는 러시아 이름으로 마리야 옐레노브나 킴(Mariya Elenovna Kim)이다. 1908년에 일가족과 함께 러시아 프리모르스키 지방 프리모르스키 주 블라디보스토크에 재이주하였다. 1923년 소련 시베리아에서 고려혁명군 예하 정치공작대원에 입문하며 항일전투에 참여하였다. 

니콜리스크에 있던 일본군이 기습해 온 일이 있었다. 그때 이범석은 적의 공격으로 불타는 사무실을 향해 비밀문서를 가져 나오기 위해 혼자 돌진해 들어가는 김마리아를 목격하였다. 특히 스파스크전투가 둘 사이를 연인으로 발전하는 전환점이었다. 이범석이 전력을 다해 강력한 요새 스파스크를 함락시킬 때 김마리아는 간호요원으로서 자원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녀는 “철기에게 무한한 매력을 느끼고 온 마음을 쏟아붓기 시작하였다”고 훗날 진솔하게 고백하였다.

1925년 김마리아는 러시아를 탈출하였다. 인텔리인 친인척 대부분이 공산혁명정부에 의해 처형되자 김마리아는 숙청을 피해 철기를 찾아 나섰다. 재회에 한없는 반가움을 가지면서 김좌진과 조성환 후견으로 한 쌍의 ‘혁명동지의 결혼’이 이루어졌다. 결혼 후 철기는 하얼빈 근처로 이사한 후 고려혁명군 결사대를 조직하여 일제 관동군을 괴롭혔다. 이때 필요한 소총이나 수류탄 등 무기 구입은 유창한 러시아어를 바탕으로 그녀가 도맡았다.해방으로 국내에서 생활을 시작할 때 마리아는 철기에게 조용히 이야기하였다. “나는 고국의 말도 서툴고 고국의 풍속도 아는 것이 없소. 하지만 당신의 생활을 돌봐주고 당신이 시련과 유혹에 부딪치면 당신의 명예를 지켜주겠소.” 이 약속은 끝까지 지켜졌다. 마리아는 공무나 정치에 관해 한 번도 나서지 않았다. 딱 한 번 빼놓고. 철기가 한국전쟁 중 대만대사로 출국당하고 나서 이승만이 다시 장관으로 기용하려 할 때였다. 화가 난 마리아가 경무대로 가서 이승만에게 대들었다. “국외로 쫓아낼 때는 언제고 아쉬우니까 또 불러들이는 건 뭐냐”라고. 이 대통령은 야화로 남아 있는 유명한 한마디를 하였다. “내가 당하기는 하였으나 철기보다 그 아내가 훨씬 낫더군.”

1970년 2월 마리아는 철기보다 2년 먼저 사망하였다. 철기는 몇 달 뒤 꿈에서 그녀를 보고는 한밤중에 일어나 마리아를 그리워하는 시를 쓴다.


빈방 찬 이불에 잠 못 이루어

이슬 맺힌 베란다에 달빛 기울고

호수 같은 가을 하늘 밤은 5경

남녘 연변에 가로등 가물가물


이범석은 독립운동가 및 정치가로서 공과는 관점에 따라 다양하다. 회고록 중 『우둥불』은 자신의 활약상을 지나치게 미화한 측면도 분명하다. 이승만 정권에서 국무총리와 국방장관으로 역할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생사를 넘나드는 극한 상황에서도 보여준 낭만과 여유는 새롭게 밝히고 평가해야 할 대목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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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시절 이범석과 애견